|
사탄은 마침내 기독교를 선택했습니다
-보수 기독교인들의 뉴에이지 담론의 허와 실
정강길
1. 들어가며
먼저 퀴즈를 하나 내어보겠다. 모차르트의 <마적>, 데쓰메탈, 백 워드 매스킹, 조지 윈스턴, 서태지, UFO, 진화론, 스머프 만화, 드래곤 볼, 사이버 공간, <포레스트 검프>, <터미네이터>, <서편제>, 특수효과, 수지침, 초능력, 요가와 명상, 피라밋, 스필버그와 루카스 그리고 이들의 SF 영화들 등등 이상 열거한 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놀라지 마시라. 정답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악마의 술수란다. 뜨아~.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물론 당신이 크리스찬과 상관없는 일반인이라면 그냥 피식 웃고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기존의 교회 신자들, 특히 교회를 다니는 청소년들은 이러한 허황된 논리에 넘어가 그만 시험에 빠진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즉, 정신적 미성숙자인 청소년들에게는 창조적이고도 건전한 대중문화의 창출이 반대되거나 왜곡되고 있을 뿐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을 바라보는 인식마저 삐뚤어지게 되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어이없는 폐해를 가능케하고 있는 그 이론적 기반이 바로 ‘낮은 울타리’의 신상언을 필두로 하여 한국 기독교계에 형성된 <뉴에이지 담론>이라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뉴에이지 담론은 한국 교계의 청소년들의 정서와 생활에 지대한 부작용을 끼치고 있는 실정이다.
2. <뉴에이지 운동>New-Age Movement이란 무엇인가?
대체로 종교인일수록 그 문화적 습성도 보수적인 경향을 잘 띤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 이것은 기독교나 불교 혹은 신앙의 보수․진보를 떠나서 대체로 그러하다고 봐진다. 그런데 여기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같은 경우는 아예 몇몇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가지고 사탄시하기까지 한다는 점에 우리는 우려를 금치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우리나라 기독교인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적 신앙의 풍토와도 연관되지만, 결정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바로 뉴에이지 운동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록음악을 <뉴에이지 운동>에 속하는 문화적 기제라고 보는 데, 흔히 록이 사탄을 숭배하고 약물과 섹스를 가까이 한다는 점을 꼬집어서 록은 사탄의 음악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정말 록이 사탄의 음악인가? 도대체 뉴에이지 운동이라는 게 무엇인가?
본래 뉴에이지 운동이라는 것은 서구에서 일어난 신비주의 경향의 문화정신 운동으로 서구 문명에 대한 위기감과 거기에 따른 전환을 부르짖는 정신사적 운동을 일컫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때까지의 서양 문명을 지탱해왔던 기독교에서 해답을 구하지 않고 동양에 눈을 돌려 새로운 삶의 대한 해답을 구하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뉴에이저들은 동양적 문양의 그림이나 생활 양식들을 많이 차용하기도 한다. 이들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새 세계의 도래를 꿈꾸며 인간의 잠재의식에 내재된 무한한 가능성들을 발굴하여 결국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로 화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새 시대는 물병자리의 시대로써 온 인간이 사랑과 평화로 하나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의 주장에는 다분히 낙관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많다고 봐진다. 비록 뉴에이지 운동이 ‘서구에서 일어난 오리엔탈리즘의 재발견’이라는 평가도 있긴 하지만, 그리고 이들의 주장이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라고도 보진 않지만, 나는 뉴에이지 운동이라는 것이 조금은 지나치게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가는 점에 대해선 별로 달가워하진 않고 있다. 정치․사회성이 탈각된 신비주의라는 것은 그 또한 보수주의로 나아갈 위험이 다분히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수적인 불교가 지니는 습성들과 흡사하다. <조화>와 <합일> 혹은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고 있긴 하지만 세계 안의 정치적․사회적 이해관계로써의 첨예한 갈등과 고통들은 구체적으로 취급되고 있진 않기에 다분히 그 주장들이 뜬구름처럼 들릴 뿐인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뉴에이지 운동이라는 것이 서구 기독교 문명에 대한 한계와 그 위기감에서 시도된 반성적 운동이라는 점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뉴에이지 운동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면 마릴린 퍼거슨(Marylin Ferguson)의「뉴에이지 혁명」(원제: The Aquarian Conspiracy)이라는 '정신세계사'에서 나온 책을 보라. 이 책은 뉴에이지 운동가들의 교과서로 인식되는 대표적 저서이다. 또하나 개념 이해에 있어서 언급할 점은 음악적 장르 중의 하나로 표현되는 <뉴에이지>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자연을 연주하는 동양적․신비적인 명상음악을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뉴에이지를 비판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은 명상음악 뿐만 아니라 록음악, 재즈, 클래식 등등에까지 넓게 아울러서 뉴에이지 문화에 따른 음악들을 몽땅 뉴에이지 음악이라고 보기도 한다. 사실 이들의 주장이 괜히 짜증나는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적 색채가 없는 대중문화 모두를 몽땅 그려 코너로 몰아넣는 데에 있다.
3. 대중문화를 트집잡고 정죄하는 뉴에이지 담론의 종사자들1)
그런데 뉴에이지를 비판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은 뉴에이지가 전적으로 서구 기독교의 한계와 그 비판에서 나왔다는 점에 대해선 그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에 대한 기독교적인 책임성과 사상적․문화적․사회학적 배경에 대한 고찰은 일언반구도 없다. 필자가 눈이 나빠서 그런지 몰라도 내가 본 뉴에이지 책에는 그런 부분에 대한 언급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즉, 학문적 깊이가 표피적이고 대단히 얕다는 것이다. 나는 이들이 미학이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있는지, 조금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할 따름이다. 기독교 이외의 것은 몽땅 뉴에이지로 보기 때문에, 혹은 세상의 학문은 배워봐야 쓰레기고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우리를 구원시켜 줄 수 있기에 다른 학문을 접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조금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더 심각한 것은 이들이 말하는 기독교조차도 몰이해라는 것이다. 즉 낮은 울타리 진영은 몰문화주의자이기에 앞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부터가 몰이해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진보적인 기독교의 열린 신학적 가능성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학 세계를 조금만이라도 진지하게 이해하고 있는 자라면 제3세계 민중․해방신학의 사회적 실천신학이나 토착화 신학과 관련한 종교 다원주의, 떼이야르의 그리스도적 진화론, 그리고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나온 과정신학적 사유 등등 이러한 것들이 마냥 덮어놓고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상언과 그 추종자들은 이에 대한 기독교적 가능성들을 전혀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컨대 단지 그러한 진보적 이해에 관해서는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아니면 그러한 것이 있다는 것은 아는 데 표피적으로만(혹은 왜곡되게) 아는 것일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연구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한 흔적이 두 눈 시퍼렇게 부릅뜨고 찾아봐도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난 뉴에이지 운동가도 아니요, 찬동가, 지지가도 아니며, 그렇다고 라즈니쉬의 열렬한 팬도 아니다. 나는 이들의 이러한 행태가 우리 사회의 창조적인 문화 발전을 종교신앙이라는 미명 하에 오히려 억제하고 있다고 보며, 자유로운 문화 발전을 정죄하고 억압하는 이들의 신앙에 대하여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점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들의 보수적 신앙의 잣대에서 기인한 대중문화에 대한 단편적 이해와 접근방식은 다분히 이분법적 발상에 근거한 <구별된 금지주의>를 띠고 있다. 즉, 그러한 세속문화는 복음주의적인 문화 가운데서 구별하여 사지도 듣지도 말고 아예 배격하자는 것이다. 그렇기에 뉴에이지 문화에 대한 대안은 당연히 오로지 복음성가만, 오로지 기독교만으로 귀결된다.4) 한때 크리스찬 대중음악(C.C.M-Contemporary Christan Music)5)을 두고도 논란이 분분할 정도였으니 우리나라 크리스찬의 보수성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4. <신본주의>의 반대는 <인본주의>Humanism가 아닌 <사탄주의>다.
이들 낮은 울타리 진영이 대중문화를 정죄하는 근거로서 가장 많이 들먹이는 신앙적 주장은 오늘날 대부분의 대중문화들이 인본주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인본주의를 신본주의의 반대로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일 뿐이다. 신본주의 반대는 무엇인가? 신본주의 반대는 바로 사탄주의다. 인간은 그 중간에서 하나님이냐 사탄이냐를 선택해야만 하는 중간자적인 존재일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애, 휴머니즘이 사탄의 술수가 될 수가 있는가. 사람이 사람으로서 참되게 살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도이며, 하나님의 뜻일진대. 즉, 이 땅의 평화에 기여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간디의 평화주의가 어떻게 사탄으로부터 왔다고 볼 수 있겠는가. 인간은 선악가운데서 끊임없이 번민하는 존재일 뿐이다. 인본주의가 사탄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비극적 가능성들을 우려하지 않은 지나친 낙관주의적 유토피즘으로 흐를 때만이 타당하다고 봐야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휴머니티로서의 인본주의는 결코 사탄적인 것이 아니다. 이 땅에 사람을 섬기러 왔던 예수는 오히려 더욱 인본주의적이었지 않은가.
5. 부작용은 대부분이 청소년들이거나 정신적인 미숙아들에게서 곧잘 나타난다.
또한 우리가 간과해선 안될 사항은 보수 기독교인들이 대중문화를 정죄함에 있어 사탄의 술수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유를 청소년들에게서 드러나는 부작용 때문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록음악을 들으면 귀신에 들린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들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그 부작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사실 이것은 청소년들의 교육과 관련한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필자 역시 청소년들의 귀신들림 같은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큼은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단지 보수 기독교인들과 보는 관점이 다르다고 하겠다. 우선 그 부작용 현상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청소년 세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하필 그 부작용이 청소년들에게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왜 주로 청소년들이 귀신에 들리고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것일까.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설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아직 청소년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점은 우리가 청소년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요소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불안정한 정서, 질풍노도의 시기, 신체적․정신적 발육기 시절에는 당연히 문화적 섭취의 소화력은 아직 뒤떨어진다. 자신에게 통제를 가하는 균형된 이성이 잡히지 않고, 모방적 심리와 쾌락적 흥분에 노출되기 쉽다. 폭력물 비디오를 보고 그것에 대한 모방범죄를 일으키는 것 또한 바로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정신적 미숙아가 어떻게 자신을 잘 추스리냐는 그 사회의 교육적 환경에 대체로 달려있다고 봐야한다. 청소년들의 욕구는 항상 과장되어 있으며, 실속은 아직 여물어지지 않았다. 성(性)에 대한 호기심과 폭력에 대한 환상은 청소년기 시절에 쉽게 접근되는 삶의 양식들이다. 대중문화의 스타들에게 곧잘 흥분하고 그들을 우상시하며, 집단에서 <왕따>6)가 되지 않으려고 대중 우상을 열심히 흉내내려는 유행이나 척박한 교육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나약함이라든가, 여고생들 사이에 유행하는 ‘분신사바’ 같은 귀신놀이에 대한 호기심도 바로 청소년기 때의 정서와 관련하는 것들이다.
6. <귀신들림>은 불균형적 문화섭취에 기인한 불안정한 정서적 반응에 해당한다.
뉴에이지를 비판하는 보수 신앙인들은 특히 기독교를 믿는 청소년들이 록음악이나 뉴에이지 명상음악을 자주 들으면 귀신에 걸리는 부작용을 낳는다고 말한다.7) 물론 영적인 세계나 귀신의 존재 따위를 믿는다고 쳐도 이러한 부작용 현상은 적어도 불균형적 대중문화 섭취에서 비롯된 병리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한다. 실제로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무서워하는 무슨 사탄이나 귀신이 사람 몸에 들어갔다기보다-물론 궁극적으로 엄밀하게 따지면 ‘병’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현상의 어긋난 모순, 또는 결핍을 의미한다고 보기에 이것이 영적인 세계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면 귀신이 들린 것이라는 말도 백퍼센트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뒤틀린 음악적 소화력에 기인한 불안정한 정서적 반응일 뿐이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우리나라의 억압된 교육체제와 그 자녀의 가정 환경과 모종의 관련을 가지며 서로 맞물려 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이 역시 보수 신앙의 잣대로 대중문화를 규정하는 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항이지만- 록음악만이 귀신 들리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례로 본인은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아주 뜨겁게 부르고 기도원에서 살아가는 열혈 신자들이 귀신에 걸리는 현상 또한 많이 봐왔다. 나는 실제 록음악을 듣고 부작용을 일으키는 사람을 아직까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찬송가 부르고 귀신에 들린 사람은 여러 번 보았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가는 옆에 있는 사람들마저 몸이 뜨겁게 달을 정도로 어떤 면에서는 더욱 은혜스럽게 들리기까지 했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보수적 신앙인들은, 그것은 하나님을 가장한 거짓 영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답변할 것이다. 아니다! 필자가 보기엔 똑같은 불균형적인 문화적 병리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비단 청소년기 시절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전체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도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문화의 편향적 섭취는 자칫 우리 자신의 정서가 거기에 함몰되기 쉬운 위험이 있는 것이다. 사탄이니, 귀신이니 하는 것은 당연히 그 기준점이 기독교인의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표현 용어인 것뿐이다. 이 세상에 비뚤어진 청소년들이나 정신병자들이 어디 기독교인뿐이던가? 물론 그들 모두가 귀신이 들렸다고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의 핵심은 보지 못하고 있다. 바로 충동적, 자극적 쾌락에만 치우친 현대인들의 정서가 너무나도 메말라 있다는 것이 오늘날 귀신들림의 진짜 이유라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문화적 환경의 이해와 그것의 충분한 소화력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현상임을 알아야 한다.
7. 종교적 기도의 효과와 온전한 병고침
계속되는 얘기에 앞서 한 가지 말해둘 것이 있다. 그러면 보수적 신앙인들의 기도가 그 부작용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효과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답은 예스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 종교적 심성이란 것은 보수, 진보를 떠나서 실제로 우리에게 정서적으로 심적 안정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를 비롯한 타종교 영역에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병고침>이란 것은 기독교 안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성어린 불심이나 무속신앙을 통해서도 얻어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절대타자(=하나님, 하늘님, 천지신명, 부처님, 알라신 등등)에게 의지하려는 종교적 심성이 병과의 투쟁에서 자신이 살겠다는 의지를 곤고히 시키는 종교적 양태에 기인한다. 당연히 여기에 대해서도 <기독교 우월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주류 신앙인들은 기독교의 병고침만이 근본적인 병고침이라고 박박 우겨될 것이다. 본인은 지금 여기서 ‘종교다원주의’를 논할 생각은 없다. 그러고 싶지만 지면상으로도 과도한 것이기에 단지 한 가지만 말해두고자 한다. 실상 객관적인 사회학자의 눈으로 본다면 모든 종교적 병고침은 똑같은 패턴의 현상으로 읽혀진다는 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 하나는 종교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예를 들어 록음악에 대한 부작용에 있어 록을 사탄으로 봄으로서 그것을 극복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평생 록음악에 대한 편견이 지워지기 어렵다는 점이 유감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문화적 편견이 오히려 청소년들의 창조적인 재능이나 발상들을 억압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에 완전한 병고침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보수적인 신앙인들에게 다양한 문화적 환경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받아들일 충분한 소화력이 없다면 이들은 세상 끝날까지 종교적인 것(기독교)과 세속적인 것(사탄)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이 땅의 기독교 아닌 모든 대중문화들을 혐오하고 경멸하며 살아가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구별된 금지주의라는 태도보다 그것에 대한 분별된 이해와 충분한 소화력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예컨대 록음악에 있어서도 그 음악적 정서에 지배당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우리네 삶과 세계를 읽어낼 줄 아는 <해석학적 눈>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올바로 서 있다면 우리가 무슨 음악을 듣던 간에 무슨 걱정이 있을 것이며, 금지된 영역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것은 보수 신앙인들이 얘기하는 귀신을 물리치는 데도 효과적이며, 대중문화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서도 벗어나게 해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대중문화 읽기에까지 우리의 시야를 확대시켜 준다. 지금 기성세대가 청소년 세대에게 주는 대안적 문화는 바로 이 점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8. 재미없는 교회문화와 재미있는 대중문화
한 가지 고마운 것은, 뉴에이지를 비판하는 보수적 신앙인들도 청소년 문화에는 관심이 지대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청소년 문화가 빈곤하다는 점에는 그들과 인식을 같이 하지만, 언제까지 오직 복음송만, 오직 기도만, 오직 기독교만으로 답을 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앞으로의 시대는 21세기를 맞아서 갈수록 사회가 복잡해지고 문화는 보다 다양해 질 것이다. 십 년 전만 해도 생소했던 컴퓨터 문화가 일반화되어 있고 여러 가지 첨단 기술이 발달하면서 거기에 따른 다양한 여가 문화가 급속도로 생산되고 있다. 요즘 교회 다니는 애들은 교회 가기 싫은 이유를 대면, 대체로 <재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나이 또래에 재미있는 컴퓨터 게임이 마우스만 살짝 클릭하면 펼쳐지고, TV스위치만 누르면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춤추며 나오는 즐거운 세상 아닌가. 교회의 찬송가나 성경말씀은 따분한데, 교회 바로 옆에 있는 PC방의 ‘스타크래프트’는 신나고 짜릿하며 즐겁다. 이것이 요즘 애들의 생각이다. 우리가 심각하게 봐야 될 문제는 자본주의 하에서 생겨난 문화의 대부분이 실속은 없고 감각적으로만 되어 가는, 즉 편한 것(향락)과 재미있는 것(쾌락)을 추구하는 쪽으로만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야말로 우리가 정작 심각하게 봐야할 문제다.
9. 자본의 논리에 따른 대중문화 산업
이같은 경향은 대중문화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지배되고 있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청소년들이 대중문화에 관심하고 스타에 열광하는 것은 미숙한 성장기에서 비롯된 대안 없는 탈출구요, 불완전한 해방구이며, 한마디로 그것은 입시 경쟁 등 그 나이 또래의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할 수 있다. 메이저 자본가들은 바로 이점을 악랄하게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대중문화의 산업이 청소년들에게 정당한 문화적 출구를 제공하지 않고, 자극적이고 감각적 상품을 생산화는 데 전력하여 청소년을 문화적 주체로 인정하기보다는 이윤추구의 공략 대상으로만 간주하여 그들의 정서를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럼으로써 대중문화 현실은 획일화되고 감각적으로 평준화되는 경향을 띤 채로 곧잘 나타난다. 이것은 자본가들이 대량소비를 조장하기 위해 수용자들의 취향을 동질화시키는 전략에 기반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대중음악 현실만 봐도 댄스와 얄팍한 발라드 일색 아닌가.8) 그렇기에 정작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대중문화 속에 깃든 뉴에이지 사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하에서 청소년들을 비롯한 현대인들의 정서를 황폐화시키는,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문화를 추구하려는 우리네 자세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 실존적 사탄의 정체인 것이다. 실질적으로 그러한 상업적 쾌락의 추구들이 진정한 문화선진국으로 나아감에 있어서도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10. 정치와 대중문화
올바른 청소년 문화의 육성은 건강한 사회적 환경의 조성에 비례한다. 나라가 어지럽고 정치판이 개판이며 이 사회가 이기주의화되면 될수록 그 속의 대중문화는 우리의 눈을 현실에서 가리게 하고 오락적인 것에만 주의를 돌리도록 하는 그런 흐름으로 나아간다. 즉, 대중문화는 자본의 원리에 따른 문제점과 더불어 정치 원리에 의한 문제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정치적 지배계층은 대중문화를 통해 대중을 비합리적이고 쾌락적 존재로 변질시켜 현실로부터 도피시키고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여 통치의 수동적 객체로 재생산해왔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현대 시민사회에서는 보수적인 종교뿐 아니라 쾌락적인 대중문화 또한 다수의 정치적 무관심을 초래하는 아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본다. 실제로 국가는 대중문화의 검열제도를 통해 대중문화의 내용이 그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통제해왔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대중들의 정치적 민주화의 대한 바램과 시민의식이 고양되고 성숙되는 문제와 같이 맞물리는 사안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주시하면서 오늘날의 청소년을 포함한 현대인들이 대중문화에 대한 바른 소비로서의 주체와 질 높은 대중문화 창조의 주역으로 나갈 수 있도록 관심하고 선도함이 필요하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가 대중문화에 정녕 관심을 가진다면 마땅히 해야할 바가 아니겠는가.
11. 사회적 대안으로서의 제안과 참교육
그렇기에 나는 개인적으로 학교 교과과목과 교회 교육에도 <대중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나 <대중문화 제대로 읽기>같은 그런 과목이나 강좌 프로그램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9) 왜냐하면 어떤 면에서 ‘수학’이나 ‘영어’나 ‘성경’은 멀리 있어도 ‘서태지’나 ‘타이타닉’ 같은 대중문화 상품들은 너무나도 가까이서 청소년들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YMCA 같은 시민단체들이 행하는 대중문화에 대한 모니터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우리 청소년들은 자극적․감각적인 문화에 너무 무방비 상태이기에 안타깝게도 거기에 쉽게 빠져든다. 기독교의 청소년 문화도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서 궁극적으로는 다양한 문화적 텍스트들을 자유로이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 있는 개방적 자세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삶을 이롭게 하는 대중문화 창조는 바로 이러한 기반에 서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재미>와 <깊이>가 더한 대중문화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청소년용 문화상품이라고 생각된다. ‘재미’는 문화적 장르가 가질 수 있는 테크니칼한 형식미 또는 대중과 매개하는 그릇에서 비롯할 수 있겠고, ‘깊이’는 인간해방(인간구원)의 메시지가 담긴 가치 있는 내용물에 상응할 수 있겠다. 재미는 대중과 만나는 출발점이요 깊이는 대중을 이끌고 갈 궁극적 지향점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죄다. 올바르고도 풍부한 문화적 감수성은 청소년들에게 참된 인간됨으로 가는 교양적 정서를 다양하게 부여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한국교회의 청소년 교육은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10) 비단 모든 문화적 가치와 대중예술은 인간구원이라는 우리네 삶의 증진과 풍부함에 집중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 대중문화란 한낱 쾌락과 유희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12. 나오며
신상언을 필두로 한 뉴에이지 공격자들은 대중문화에 대한 미학적 고찰이나 대중문화 산업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같은 것은 전혀 고찰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무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오로지 교리적 잣대로만 대중문화를 규정할 뿐이다. 결국 보수 신앙인들은 그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근본적 <패러다임>11)이 뒤바뀌지 않는 한, 항구적으로 기독교 우월주의에 근거한 문화적 독단주의 행태는 앞으로도 계속 자행될 것이다.
복잡하고 다원화된 시대적 상황에서 보수 기독교인들이 끝까지 대중문화에 대한 독단적․폐쇄적 자세를 고집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의 문화적 유산들을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이라고 본다. 사실 샤머니즘적인 요소와 유교적인 요소가 깃든 우리나라의 전통 민요와 가락, 한복이나 심청전, 심지어 태극기와 홍익 인간의 이념,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은 남대문 따위들 등등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도대체 뭐라고 할 터인지 내심 궁금해진다. 문화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각 나라의 지리적․환경적 상황에 걸맞게 내려주신 <옷>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문화는 정신의 산물이지만 그 지역의 지리적․환경적 특질에 맞게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보수 기독교인들의 문화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문화와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는 문화를 전혀 구분하지 못한 채,12) 오히려 오직 기독교만이라는 문화적 빈곤주의로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들의 얘기처럼 사탄이 대중문화를 선택했는지는 몰라도 더욱 끔찍하고도 분명한 현실을 말한다면 사탄은 대견스럽게도 이미 기독교 자체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계의 비극은 바로 이 점을 모르고 있기에 늘상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꼴불견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기독교는 마침내 사탄을 선택했습니다.] 예수가 진짜로 온다면.. 먼저 칼들고 죽일려고 하는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공감하며 글 잘 읽었습니다. 퍼 갑니다. 글 올리신 분 개인적으로 메일 좀 주세요.
이 글을 올초에 낮은울타리 홈피에도 올린 적 있습니다. 아무도 댓글 안달더라는... 안다는 건지 못 다는 건지...
뉴에이지에 앞서 우선은 포스트모던을 비판하는 게 더 좋을 겁니다. 이것이 뉴에이지를 낳게 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