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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7장 1~16절/ 하나님의 구원계획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가정은 우리의 육신과 정신의 안식처입니다. 세상에 보이는 어떤 조건과 환경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가정이 평안과 행복이 보장되지 않으면 참된 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 평안하고 행복한 것이 최고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단위입니다. 가정이 바로 세워지면 사회도 바르게 되지만, 가정이 파괴될 때 사회는 그만큼 불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불화한 가정에서 직장에 나가 일하는 사람이 최고의 능률을 올릴 수 없고 자신의 책임을 바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대개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옛 글에 가화만사성(家和万事成)이란 말은 의미 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안이 화평해야 무엇이든지 잘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잠언 15장 17절에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가정은 평화의 상징입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어질 때 가정에서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그 가정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사건이 무엇입니까? 그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커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는데 자신과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미워하여 죽인 사건입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어진 다음에 나타난 증거가 바로 가족 간의 경쟁이었고 살인으로 인하여 다시 가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였습니다.(창4;16) 부모로서 제일 가슴에 못을 박는 쓰라림은 자식이 부모보다 세상을 먼저 떠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오래 사는 수(壽)가 오복(五福) 가운데 첫째 복에 들지마는 수즉다욕(壽卽多辱)이란 말이 있는 것이 사람이 오래 살다 보면 자식을 앞세우는 욕을 당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병들어 세상을 떠나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하물며 미워하여 형이 동생을 죽였으니 그 부모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에게 가장 기쁘고 행복한 일은 자녀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효를 다하는 것은 좋은 음식으로 잘 대접하고 공경하는 것도 필요하지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님 앞에서 자녀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요즘에 자녀들의 다툼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여 마음아파 하는 어르신들을 가끔 뵐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힘들어 합니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자녀들 간에도 조금도 참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경쟁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가장 모범적인 가정, 구원받은 가정, 노아의 가정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10,12,18,21,25) 처음 세상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실 때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였고 만물을 다 지으시고 나중에 인간을 지으신 다음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25) 하였습니다. 너무나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인류의 대표가 되는 아담의 범죄한 이후로 세상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인간이 그만 타락하고 나서는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어서 세상은 죄악으로 채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엇이든 자기의 본분을 다할 때는 아름답고 좋으나 그 본분을 다하지 못할 때에는 더러워지고 마는 것입니다. 꽃이 아름다우나 꽃이 피어 아름답고 향기를 발할 때 좋은 것이지 꽃이 지면 썩어지고 냄새를 내는 것입니다. 짐승도 살아서 움직일 때 요긴하고 귀엽지 병들고 죽어지면 썩은 냄새 밖에 날 것이 없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더욱 그러합니다. 살았을 때 아름답지 병들고 죽으면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되어 집에서 멀리 묘지에 깊이 묻어버리고 맙니다. 짐승이 죽으면 고기라도 먹고 거름으로라도 사용하지만 사람이 죽으면 아무데도 쓰지를 못합니다.
사람이 귀하게 대접을 받은 이유는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있기에 사람은 귀한 것인데 이 영혼이 살아 있을 때에야 사람답게 살고 사람으로서의 고귀한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데, 영혼이 죽으면 세상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 인간의 영혼이 타락하니까 만물이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롬8;22)
창세기 6장 5~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힘이니라.”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 할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오히려 하나님이 근심하시고 걱정하시고 한탄하시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을 보시고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능력이 있고 지혜가 비상하고 문화를 발전시킨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길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 위에서 모든 인간과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새들까지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창6;7. 17절) 이것이 소위 물의 심판이요 노아 때의 홍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이 악해서 하나님에게 근심이 될 지경이요,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할 지경에 이르렀지마는 전부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였습니다. 악인들이 세상을 잡고 흔드는 세상이었지만 의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거역하는 사람이 땅에 가득했으나 그래도 그들 중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노아였습니다. 노아는 세상에 안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이요 사람들의 도움이 되는 존재요 위로가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창세기 6장 8절에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보고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6장 13절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시면서 창세기 6장 14절에 “너는 고페르(전나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하시고 그 방주의 규격까지 그 모양을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노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행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의 믿음이 아닙니까?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믿었습니다. 노아가 500살이 되었을 때인데 이제 이 땅을 홍수로 멸하시겠다고 하시니 생각해보면 과거 수천 년 동안 이런 일이 없었는데, 더구나 내가 500년을 살 때까지 이런 일이 없었는데 하며 이치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믿은 것뿐입니다. 믿을 뿐만 아닙니다. 그대로 행했습니다. 큰 배를 지었습니다. 산에서 전나무를 가져다가 짓는 큰 공사였습니다. 그것도 1년, 2년 정도의 공사가 아니었습니다. 120년이란 기간이 걸렸습니다. 더구나 그렇게 큰 방주를 바닷가에서 짓는다면 몰라도 바다와는 먼 육지에 배를 짓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노아가 하는 일에 함께 시키는 대로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루에 얼마씩 품값을 받기 위해서 일한 것뿐이고 그들에게 믿음이 있어서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짐작이지만 노아의 지시에 의해서 품삯을 받고 일을 하면서도 노아가 잠시 떠나기만 하면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노아를 흉보았을 것입니다. 흔히 젊은 사람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감님 망령이셔, 할머니 노망이셔” 합니다. 아마 노아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만 앉으면 노아는 듣지 못하게 저희들끼리 “저 영감이 아마 이젠 정신이 좀 이상해진 것 같아 그까짓 것 우리는 일하는 자리가 생겼으니 상관할 것 없지만 아니 이런 큰 배는 무엇을 하려고 이렇게 만들지? 더구나 이런 배를 어떻게 바다에 끌고 가지? 이제 얼마 있으면 영감님 말대로 하면 큰 홍수가 난다고 하는데 홍수나면 산으로 올라가면 될 테지? 무엇 때문에 이런 물질과 시간의 낭비를 하는가? 말이야.” “그러기에 망령이라잖아. 우리야 굿이나 보다 떡이나 먹으면 될 것 아니야?” “글쎄 그건 그렇고, 노아 영감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하는데 우리가 어쨌다는 거야. 그러면 우리도 자기처럼 이런 미친 노릇하며 살라는 건가?” 이런 대화 끊이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왜요? 이건 제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에 보면 노아의 날에,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는 날에 오래 참고 기다렸으나 순종치 아니하다가 멸망하였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그들에게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망령으로만 여겼습니다.
노아와 그 당시의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노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노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이는 분처럼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이는 것만 위해 살았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을 애써서 하나님을 위해 일했으나 그의 여덟 가족 외에는 모두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작은 무리(minority)입니다. 노아는 그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 장차 멸망당할 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불쌍히 여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노아의 가정을 동정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노아의 말을 헛소리로 들었습니다. 그저 늙은이의 망령으로 여겼습니다. 악한 세대의 특징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귓등으로 듣습니다. 왜요?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요, 비과학적이니까?. 드디어 방주가 완성되었습니다. 창세기 6장 22절에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대공사가 마쳐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노아의 말을 듣고도 자신들의 임금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소돔성에 있던 롯의 가정을 하나님의 사자가 건져낼 때. 네 식구 그러니까 롯의 처와 두 딸 그리고 정혼한 두 사위를 빨리 데리고 소알까지 피하라고 하였으며 이제 곧 하늘에서 불이 내려 이 소돔성이 망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이 사실을 롯이 자기 사위감 될 사람들에게 말했더니 그 사위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어요? 창세기 19장 14절에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고 하였습니다. 진리를 말하나 농담으로 여기는 세대는 악한 세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지 않으십니까? 롯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기던 두 사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오신 여러분에게 농담이나 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로 한다면 여러분을 좋으십니까? 그것을 위해 있습니까? 롯의 말이 농담이었습니까? 노아의 말이 공갈이었습니다. 더구나 롯의 아내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사자가 소돔성을 떠나갈 때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돌아보다가 어떻게 되었어요? 소금기둥이 되었지요. (창19‘26) 하나님의 말씀하실 때 하라면 하고, 가라면 가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고, 서라면 서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행복한 가정, 축복받은 가정의 모습을 봅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받은 가정입니다. 노아의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생각하였습니다. 1절에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말씀합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나도 함께 동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세상의 것들을 좋아한다고 나도 좋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세상에 죄악이 가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120년의 시간동안 전도도 하며 자신의 사명을 위해 함께 일해준 일꾼들에게 열심이 설득하기도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를 않았습니다. 아니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멸하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7절에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2~3절에서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서 유전하게 하라”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단지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수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정결한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정결한 짐승만 방주에 들인 것이 아니라 부정한 짐승도 방주에 들임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 세상이 죄악에 빠진다 할지라도 아직 때가 남아 있는 한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고 부르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4~5절에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하나님은 방주에 짐승이나 공중의 새를 데려올 수 있는 기간을 정하였습니다. 7일이라는 짧은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노아가 방주에서 지낼 모든 짐승들을 다 데려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이 노아의 방주에 들어갈 짐승들을 방주가 있는 곳으로 이끌어 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듣고 이제는 자신이 지은 방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 떠나고 이제는 하나님이 보내신 동물들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모두 순종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노아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들을 바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해 나가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순종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6~7절에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600세라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하였습니다. 노아의 가정이 홍수가 나서 집에 물이 들어올 때 방주에 들어갔습니까? 아닙니다. 비가오기 전에 날이 흐리지도 않을 때 그저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시므로 들어갔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비웃었을 것입니다. “저거 미친 것들 좀 보게. 저 방주 속에 들어가는 것 좀 보게. 무엇을 하려고 저러지, 늙은이는 망령이라 하더라도 그 자식들은 왜 저러지? 젊은 것들이 이성(理性)도 없나? 그것도 부전자전(父傳子傳)인가?” 사람들은 비난하고 조롱하고 멸시하는 말들을 퍼 부었습니다.
8~10절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갔으며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공중의 새까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한대로 나아왔습니다. 사실 노아는 7일 동안 이들을 맞아 각자에 맞는 칸막이에 들어가도록 하는데 시간을 썼습니다. 하나님이 짐승이나 공중의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들을 노아에게 나오게 하고 노아는 이것들을 방주에 넣는 데, 바쁜 일상을 보냈습니다. 모든 짐승이나 새나 땅에 기는 것들이 방중에 들어가고 7일 후에 땅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비가 오기 시작할 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11~12절에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그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노아가 600세 되는 해 2월 17일에 땅 밑에서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이 열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지역에도 많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몇 칠 동안 계속되는 비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도 요동치고 있습니다., 곳곳에 산사태가 나기도 하고 제방이 넘치기도 하였습니다. 인명피해도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말씀대로 땅에서는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습니다. 이전에 상수도시설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에 시골에서 샘물을 파는 수소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샘물이 터져 나오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왜 가능하였을까요? 물이 귀하여 물을 얻은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비가 많이 오면서 오수뚜껑이 날아갈 정도로 물살이 세어 밖으로 물이 넘치면 수많은 인명피해가 납니다. 또한 비가 많이 내리면 하는 말들이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 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표현하는 말을 보면 “하늘의 창문이 열렸다‘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렇게 40주야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및 공주의 새까지 들어간 다음에 노아의 가정의 식구들도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방주에 들어간 다음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어떤 사람은 말했을는지 모릅니다. “정말 노아 영감님이 말하던 홍수인가?”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다보면 맑은 날도 있고 비 오는 날도 있지, 오늘이 처음인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흘, 나흘 지속되니, “이거 정말 장마가 오나” 하고 말했습니다. 물이 점점 불어나서 집에까지 들어오니까? 이번엔 큰 장마라고 하면서 언덕으로 피했습니다. 물이 언덕을 넘으니까? 큰 홍수라고 하면서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노아의 경고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15~16절에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노아가 순종하였습니다. 모든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들어간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것들을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아를 들여보내신 후 방주의 문을 하나님이 닫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닫으시면 열 자가 없고 하나님이 열어 주셨을 때 들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노아의 나이 600세 되는 해 2월 17일에 땅 밑에서 물이 솟아나고 하늘에서 창문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지면서 지면에 있는 모든 생물이 죽임을 당하는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가정은 어떠하였습니까? 온 가족이 믿었습니다. 말씀대로 따라 순종했습니다. 온 식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노아의 가정은 방주에 들어갔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결과 모두가 구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을 통해서 모두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주인공이 되길 축원합니다. 우리 가정에서 한 사람이라도 아직 그리스도 밖에 살며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이 계시다면 우리가 믿는 믿음의 고백을 분명하게 전함으로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구원의 은혜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며 이 시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