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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철중 의학전문기자
대장암 때문에 대장의 절반을 절제한 지인은 병원으로 출퇴근한다. 외래에서 항암제 주사를 맞기 위해서다. 몸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 모를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는 암센터에 들어설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고 한다. '암센터'라는 이름 때문에 자신이 암환자라는 사실을 매일 되새기게 된다는 것이다. 암센터에 갈 때마다 자신은 암이라는 질병에 속한 한 부류라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듣고 보니 그랬다. 왜 병원들은 모두 암센터라는 이름을 쓸까. 질병으로 환자를 나누는 의료 공급자 시각에서 나온 명칭은 아닐까. 치매센터, 당뇨센터도 마찬가지다.
이제 암센터가 아니라 암치유센터라고 명명하면 좋겠다. 그러면 환자들은 "나 오늘, 암치유센터 간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암이 왠지 점점 나아지는 느낌이 들지 싶다. 희망은 무의식에서 시작해 의식으로 올라와야 커진다.
중환자실이라는 이름도 그렇다. 종합병원에 가면 내과계·외과계 중환자실 등의 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것도 환자를 기능적으로 분류해 지은 이름처럼 보인다. 그곳은 가뜩이나 들어가기 겁나는 곳이다. 주변에 가족도 없고, 면회도 드문드문 되고, 의료기기 소음이 온종일 귓전을 맴돈다. 중환자만 모여 있는 곳이라는 어감(語感)의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 희망보다는 절망감이 먼저 들 것 같다. 해서, 중환자실 간판도 중립적인 의미로 바꿨으면 좋겠다. 집중치료실이라고 하면 어떨까. 중환자실 영어 이름(Intensive Care Unit)도 집중치료실에 가깝다.
병·의원 개업 가에서는 시류(時流)에 발 빠르게 진료과목 앞에 형용사와 부사, 추상명사를 붙인 지 오래다. 소화기내과 간판에는 '속 편한' '위튼' 식의 이름이 붙고, 대장 항문 분야는 '장쾌' '상쾌'가 등장한다. 성형외과에는 노골적으로 '갸름한' '신데렐라' 'V라인' '리셋(reset)' '작은 얼굴' 등이 걸린다. 이비인후과에서는 '숨 편한', 부인 성형 산부인과에서는 '처음처럼'이 단연 압권이다.
우리는 지난 2009년 신종플루 '사태'를 겪었다. 세상에 처음 등장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국내 미디어와 보건복지부는 신종플루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기존의 플루(flu·독감)와 차별화하고, 알아듣기 편하라고 붙인 이름이다. 처음에는 이 바이러스가 돼지한테서 왔다고 해서 '돼지 독감'이라고 불렀다가 축산업계가 반발하자 대안으로 나온 성명이 신종플루다. 하지만 이게 나중에 문제가 됐다. 신종(新種)이라는 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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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신종이라고 하면 뭔가 듣도 보도 못한 느낌이 든다. 용어 자체가 불안감을 주고, 괴기스러운 병이라는 선입견을 준다. 실제로는 신종플루가 겨울철에 유행하는 통상적인 인플루엔자보다 독성이 낮았음에도 '신종'이라는 포장 때문에 과도한 공포감과 쓸데없는 과민 반응을 일으켰다. 그냥 객관적으로 2009년 H1N1 인플루엔자라고 불렀으면 좋았을 뻔했다. 이처럼 보건의료 위기 상황에서는 질병의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대처 행태와 대응 방식이 달라진다. 공포도 무의식에서 비롯해 의식으로 발전한다.
질병 이름 때문에 환자들이 사회적 편견과 낙인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정신분열병이다. 정신이 분열됐다니…, 말만 들어도 무섭게 들린다. 정신분열병 환자들의 범죄율이 일반인보다 낮음에도 사회적으로 다소 엽기적인 범죄가 발생하면 흔히들 정신분열증을 거론한다. 이것도 용어가 주는 선입견이다. 정신분열병 환자들은 무시무시한 질병 이름의 낙인 때문에 조기에 병원에 가서 제대로 진단받거나 치료받는 것을 꺼렸다. 밖에서 안으로 숨으니 병은 더 깊어졌다. 그래서 대한신경정신과의학회는 정신분열병 개명 작업을 했고, 마침내 2012년부터 공식 질병 이름이 조현병(調絃病)으로 바뀌었다.
조현은 '현악기의 줄을 고르다'는 뜻이다. 조율을 통해 현악기가 좋은 소리를 내듯 정신의 부조화도 치료를 통해 조화롭게 하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현병이 뇌 신경망의 이상에서 발병한다는 점에서 뇌 신경망이 느슨하거나 너무 단단하지 않게 적절하게 조율돼야 한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병의 의미도 살리면서 잘 순화된 질병 이름이다. 우리나라의 조현병 개명(改名) 스토리는 최근 영국의 세계적인 의학전문지 '랜싯(Lancet)'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제 조현병 환자들이 발병 초기부터 밖으로 나와 편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기대해 본다.
시인 김춘추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암센터를 암치유센터라고 불러주었을 때, 그 희망의 선율이 환자에게도 전해져 그들의 고통과 질병이 잘 조율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