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연방 이래 인류의 제2 황금기의 시작이라고 여겨지는 로엔그람 왕조 알렉산더 1세의 성장세는 그의 재위 말엽까지도 무리없이 이어졌다. 전쟁이 끝나 지출이 줄어 쌓이는 자금, 개발되는 기술, 늘어나는 인구가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는 원동력이 되고 그 개척이 경제성장을 견인하고 다시 자금이 쌓이고 기술개발에 투자할 여력이 생겨 더 넓은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게 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며 이 시대의 사람들은 지금의 시대가 은하연방의 재림이라고 말하는데 모든 이들이 동의하였다. 단지 정치적 자유가 그 때에 비해 적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실 정치적 자유도 점진적으로는 확대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구 제국령과 구 동맹령은 페잔을 통한 교류가 확대되며 양 지역의 경제성장을 촉진하였지만 교류는 단지 물적 교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문화적, 인적, 사상적 등 교류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교류들은 무엇이든지 이어졌다.
알렉산더 1세 치세 초기에, 제국의 경제력은 구 제국령 쪽에 우위에 있었다 문벌귀족들이 대거 정리되며 대다수 평민들의 경제력이 상승했고 전시상황임에도 제국의 재정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평민들을 위한 여러 정책이 안정적으로 이어지며 평민들 또한 '열심히만 일하면 잘살수 있다.'는 말이 진실이라고 여겨 열심히 일했고 전후에도 이 기조가 이어졌기에 원래부터 제국의 GDP는 동맹보다 약간 상회하였는데 알렉산더 1세 치세 초기에는 1인당 GDP도 추월하였다.
반면 구 동맹령은 오랜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답보와 제국령 침공작전과 그 이후에 벌어진 구국군사회의 쿠데타 등으로 재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고 그 여파로 경제적 불황이 닥쳤다. 그러나 이를 해결해야 할 동맹정부는 무능했고 제국 강점 이후에도 여러 사건사고가 이어지다 보니 동맹 시민들 중에서는 적게나마 제국으로 넘어가 일자리를 구하는 이들도 있었고 알렉산더 1세 치세 초중기에는 이러한 숫자가 더욱더 늘어나게 되었다.
반대로 구 제국령 사람이 구 동맹령 지역으로 넘어가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구 골덴바움 왕조 속에서 자유를 원하던 이들이었는데 이들 중에서 더 많은 자유를 원하던 이들이나 개쳑 붐이 더 활발한 동맹령에서 한몫 잡아 잘살아 보려는 이들 등이 이주하였는데 그 숫자는 동맹령에서 넘어가는 이들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지만 아주 적은 숫자라 할 수는 없었다.
이 외에도 두 지역은 학문, 기술의 개발 및 연구, 문화적 교류 등으로 인적 교류까지 잦았는데 이중 학문적 교류가 로엔그람 왕조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구 제국령에서 구 동맹령으로 넘어간 이들은 대부분 전제주의자들로 뛰어난 지도자 아래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체제를 찬양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상향이 이루어지는 시대속에서 그들의 주장은 구 동맹 시민들에게 제법 먹히기도 했지만 하지만 어릴때부터 골덴바움 왕조의 폭정과 실정에 대해 배운 이들이 그들에게 '폭군이나 암군이 나올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에는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 이른바 '공화주의자'라 불린 이들 중에서 이 시대에 활동할 수 있던 이들은 급진파가 아닌 온건파로 지금의 로엔그람 왕조의 지배는 받아들인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이들로서 그들은 현재의 전제정치는 부정하지 않으면서 단지 과거 골덴바움 시대의 사례에 비추어 미래에 있을 안 좋은 가능성을 지적하였고 전제주의자들도 그 시대의 폭정을 감안하면 로엔그람 왕조 또한 폭군이 나올 수 있다는 주장에 '불경하다' 등의 말만 할 수 있을 뿐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는 없었다.
물론 지기스문트 2세나 아우구스트 2세가 쫓겨난 사례처럼 '그런 황제는 쫓아내고 새 황제를 옹립하면 된다'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골덴바움 왕조에서 황제가 강제로 쫓겨난 사례들을 보면 도저히 왕조 자체적으로도 답이 없을 정도로 실정을 저지르거나 불세출의 천재가 나타나고서야 가능했었기에 이 역시도 설득력이 약했다. 때문에 이들의 전제주의 설파는 구 동맹령에서 그렇게 강력하게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이러한 예시로서 구 동맹령들에서는 매년 알레 하이네센 기념행사를 열었고 제국 인사들조차도 민심을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하여 하이네센의 업적을 칭송(어디까지나 골덴바움 왕조의 폭정에서 사람들을 구한 것만 해당되고 민주공화정을 설립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회피)할 정도로 아무리 제국의 선정이 지속되어도 구 동맹 시민들 가슴 속에서 민주공화주의가 꺼지는 일은 없었다. 물론 선정 속에서 정치에 대한 무관심 또한 강해졌지만 이 역시도 전제주의에 찬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건 아니었다.
심지어 신세대에서도 민주주의 자치령에서는 자신들의 정체성인 민주주의 교육을 잊지 않았기에 민주주의 사상은 잊혀지지 않았고 오히려 극도로 심한 혼란 속에서 반쯤 체념적으로라도 전제정치를 받아들이거나 극히 일부는 진심으로 전제정치에 찬동하기라도 한 부모에 비해서 평화속에서 태어난 신세대는 경제적 풍요에 비례하지 못하는 정치적 자유에 불만을 품고 민주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반면 구 제국령은 구 동맹령에서 대거 유입된 동맹 유민들이 함께 가져온 민주공화주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접하며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구세대는 익숙한 전제정치를 옹호했지만 명확하게 논리적인 근거는 없었고 신세대에게는 새로움을 느끼게 해주었으며 지식인 층에서는 민주주의에 호감을 표하는 기류가 강했다. 이러한 기류 속에서 황제가 응답하였기에 알렉산더 1세의 치세 속에서 제국의 정치적 자유는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다.
물론 제국이 마냥 민주주의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지만은 않아서 많은 민주주의자들이 잠시 징역살이를 하기도 했고 정치적 자유가 점진적으로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제국은 전제군주제였고 황제는 신성불가침했으며 민주주의자들도 아직 공화주의까지는 입에 담지 않았다. 이는 대중들이 민주주의에는 찬동하는 이들이 많았어도 공화주의까지 주장하기에는 많은 이들이 로엔그람 왕조의 통치에 비교적 만족하는 기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민주주의 요구에 순순히 응함으로서 아이러니하지만 알렉산더 1세는 로엔그람 왕조의 명운이 짧아지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물론 오롯이 그의 책임인 것만은 아니고 그 다음의 후계자가 민심이 부응하지 못하는 행적을 남긴 것이 더 크기에 그의 책임보다는 후계자의 책임이 더 크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알렉산더 1세의 치세 말기에도 안정기는 이어졌다. 단지 앞서 말한 민주주의 요구 확대와 후기로 갈수록 구 동맹령 지역이 구 제국령 지역 못지않게 성장한 상황 속에서 벌어진 더 많은 요구와 다곤 성역 회전부터 이어진 갈등으로 인해 벌어지는 지역감정 등의 불씨들이 서서히 발생하기 시작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