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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9대 왕(재위 654∼661)으로서 성은 김(金)이요 휘는 춘추(春秋)다. 진지왕의 손자. 이찬(伊2) 용춘(龍春:龍樹)의 아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 김씨(金氏). 무열왕(武烈王)이라고도 한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城主) 품석(品釋)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백제를 치고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만났으나, 국경의 영토문제로 감금당했다가 돌아와 고구려의 옛 은혜를 저버리고 도리어 원한을 품게 되었다.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서 사신으로 일본과 당(唐)나라에 다녀왔으며, 특히 당나라에는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민족 통한의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군사원조까지 약속받아 멸족 전쟁의 길을 열었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진골(眞骨)의 신분으로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으로써 신라 최초의 진골출신 왕이 되었다. 즉위 후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守)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상정(詳定)하게 하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당나라와 계속 친교를 맺어 깊은 신뢰를 얻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신라왕(新羅王)에 책봉되었다 660년(무열왕 7) 당나라에 청원하여 당나라가 백제 정벌의 대군을 파견하자, 왕자 법민(法敏:文武王)과 김유신 등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듬해 백제 부흥군을 격파하고, 이어 고구려 정벌의 군사를 일으키다가 죽었다. 그의 재위기간에 신라 왕권의 전제화(專制化)가 확립되었고, 또한 크게 성장한 귀족세력을 중심으로 당나라의 율령제도(律令制度)를 모방한 관료체계가 정비되었으며, 구서당(九誓幢)이라는 9개 군단(軍團)의 설치로 군사조직이 강화되는 등 본격적인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 또, 김유신의 매부(妹夫)가 됨으로써 경주 김씨 왕실과 김해김씨와 결합이 이루어졌고, 그의 직계자손으로 8대가 계속됨으로써 120년 동안 정치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신라의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에 대한 개인적 원한에 근거하여 삼국통일이라는 목적의식도 없이, 백제와 고구려를 치기 위해 당나라에 원병을 요청 했다. 고구려에 연전연패하여 기가 꺽일대로 꺽인 당나라 고종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가뭄의 단비였다. 두 말할 필요 없이 원군을 보내겠다고 약속한 당 고종은 660년 3월에 소정방을 총 지휘관으로 삼고 수륙군 십만을 거느려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신라는 대장군 김유신이 장군 품일, 흠춘등과 더불어 정병 오만을 인솔하고 백제서울인 사비성으로 향했다. 아! 멸족의 길을 이렇게 시작되었던가? 역사상 중국에게 가장 큰 선물을 바치는 김춘추! 어떤 이는 이 사람을 역사의 위인이라도 부르지만 그것은 하늘이 울고 땅이 통곡할 말이로다. 김춘추는 사대외교의 결정판으로서 외세를 끌어들여 드넓은 만주 벌판과 중국 대륙, 일본을 버리고 한반도로 주저 앉은 민족의 철천지 원수이며 중국에게는 유사이래 가장 혁혁한 전공을 세운 알짜배기 효자가 되고 말아버리지 않았던가? 지금으로부터 약1300여년 전 신라, 고구려, 백제가 서로 세력을 다툴 때, 신라는 만주와 중국 동부지역 그리고 일본을 차지하여 관리할 만한 국력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그 곳을 넘볼 수 있는 국력이 있었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는 자만과 내부 분열로 자멸하고 말았다. 역사에서 가정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라 하지만 아마도 신라의 김춘추가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않았다 하더라도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도리어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에게 망하여, 중국의 산동 반도 일대와 일본 그리고 드넓은 만주벌판도 우리의 땅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다. 따라서 역사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김춘추가 외세와 연합하지만 않았더라면 오늘날처럼 우리의 민족 자존심이 구져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을 보라. 좁디 좁은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리고, 그도 못해 동서로 갈리어 아귀 다툼을 벌리고 있으니 이 모든 이유의 근본적 원인은 바로 나당연합에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수왕조가 멸망한 후, 농민봉기가 계속되었고, 각지의 관료 및 호족세력들이 할거하였다. 이연(李淵) 역시 태원(太原)의 유수로 임명되어 농민군 진압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양제가 피살되자 618년에 스스로 제위에 올라 당왕조를 세웠다. 이가 당 고조(高祖)이다. 당왕조는 민심을 수습하고 지방 할거세력을 진압하고 통합해 가는 한편, 이민족세력을 통제하면서 수에 이어 세계제국을 건설하여 갔다. 628년(태종 정관 2년) 당은 중국대륙을 재통일하였다.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다시금 긴장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먼저 당 태종은 혼란의 와중에서 급성장한 돌궐에 대한 정복에 나서서 629년에 이를 복속시켰다. 위기를 느끼던 고구려는 630년 당에 사신을 보내 봉역도(封域圖)를 바치고 양국간의 경계를 분명히 하려 하였고, 당은 631년에 고구려가 수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세운 경관(京觀)을 파괴함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위협을 노골화하였다. 640년에 고창국을 정복하여 서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한 당은 이제 서서히 동북방면의 고구려 정벌에 관심을 돌리고, 우선 진대덕(陳大德)을 파견하여 고구려 내정을 탐지하게 하였다. 당의 침략 위협에 직면한 고구려는 대당정책을 둘러싸고 강경과 온건의 갈등이 야기되어, 급기야 642년에 강경파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집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100여명의 대신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고서, 대당 초강경책을 썼다 당의 고구려 공격은 시간 문제였다. 644년 11월에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의 명령을 내렸다. 당나라군은 비사성을 함락시키고 수 양제의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았던 요동성과 백암성을 차례로 접수하였다. 다음 공격의 대상은 안시성이었다. 처음 태종은 연개소문의 정변에도 굴복하지 않은 안시성의 명성을 상기하면서 이를 우회할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정면 돌파하기로 결정하고 고립무원의 상황에 떨어진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당군은 군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사수하는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655년 9월이 되어 추위가 엄습해오기 시작하자 총퇴각하였다. 안시성의 성주는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에 양만춘(楊萬春)이라 전해 온다. 당 태종의 패전은 정복전에서 패배한 적이 없던 당으로서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당의 중신인 방현령은 표문을 올려 고구려 공략의 무모함을 주장하였고 여러 중신들의 의견도 대체로 그러했다. 당은 고구려에 대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였다. 그것은 고구려에 대한 소규모 공격을 빈번히 행하여 국력을 피폐화시키는 지구전략이었다. 당이 고구려에 대한 공격의 묘안을 찾고 있던 바로 그 즈음 648년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던 신라에서 김춘추(金春秋)가 파견되어 왔다. 단독으로 고구려를 정복한다는 것이 어려우리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던 당은 고구려의 배후에 있는 신라와 제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당은 김춘추를 최고 국빈으로 환대하고, 신라의 요청대로 나당(羅唐) 군사동맹을 기꺼이 체결하였다 그러나 나당 군사동맹을 체결한 이후에도 당은 여러 차례 단독으로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였다. 이는 장차 신라를 배제하고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막강 고구려의 벽에 부딪치며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된다. 결국 신라의 요구대로 신라와 함께 우선 백제를 공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660년 6월에 소정방이 이끄는 13만의 당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이 백제의 사비성을 기습 공격하여 백제를 멸하였다. 이어 당은 661년에 소정방(蘇定方) 등으로 하여금 수륙 35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신라는 군량 보급을 분담하였다. 그러나 철륵(鐵勒)의 반란 사건으로 당군은 일단 회군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듬해에 다시 감행된 당의 고구려 정벌은 유명한 사수(蛇水) 전투에서 대패당함으로써 또 다시 좌절되었다 막강 고구려가 당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긴 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전세는 점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당은 신라로부터 군량까지 보급받고 있었으며 666년에는 고구려의 집권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어 그 아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 고구려의 전력은 크게 분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의 장남인 남생(男生)은 아버지의 태막리지(太莫離支)의 지위를 계승하였으나 그의 동생인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이에 그는 국내성 등 6성을 거느리고 당에 투항하였다. 이어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도 휘하의 12성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668년에 이적(李勣)이 이끄는 당군과 김인문이 이끄는 신라군이 평양성을 총공격하였다. 평양성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1개월 넘게 저향하였으나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로써 고구려 왕조는 멸망하였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 부흥세력들은 각 지방에서는 성을 단위로하여 치열하게 저항하였고, 이를 바탕으로하여 만주 지역에선 발해가 건국되었으며 발해가 거란에 의한 망한 후에도 금을 건국하여 그 뒤를 이었다. 「日本書紀(일본서기)」에 따르면 비담의 반란을 전후한 시기에 김춘추는 백제의 동맹국으로 배후에서 신라를 위협해 오던 왜국으로 건너가 있었다. 그러면 김춘추가 권력 교체기의 왜국을 상대로 모험 외교를 감행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백제의 고립을 겨냥하여 왜의 새 집권 세력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日本書紀」엔 이 때 김춘추의 모습에 대해 美姿顔 善談笑(미자안 선담소), 즉 용모가 훌륭하고 담소를 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 마디로 김춘추는 외교술에 능한 존재였던 것이다. 신라로서는 영웅일지 몰라도 민족으로는 반역자의 짓일 아닐 수 없다. 한편 비록 중국이 황제국을 자처했다지만, 오늘날까지의 중국 역사를 개관해보면 그다지 자랑할 것이 없다. 중국인의 절대다수인 漢族(한족)은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동이족의 일파인 만주족, 몽골족에 의해 피눈물 나는 피식민지의 백성으로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라! 우리가 조금만 자주의식을 가졌더라면 중국은 결코 우리가 해볼 수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닌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민족 자존과 효과적인 외교술로 대응만 한다면 중국은 결코 강대국으로 군림할 수 없으며 도리어 우리 민족이 중국을 지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춘추는 민족으 자존을 팔아가며 중국을 끌여들여 민족을 패망의 길로 인도해 갔던 것이다. 중국의 중심 무대였던 양자강 이북 화북지역에서는 수·당 시대 직전까지 다섯 동이족의 16개국이 부침하면서 漢族을 지배했다. 이런 5호16국 시대의 대표적 왕조인 前秦(전진)은 티베트系 羌族(강족)의 국가였고, 後魏(후위)는 鮮卑族(선비족)이 세운 나라였다. 隋와 唐의 왕실은 漢族 출신으로 자처했지만, 그 혈통 속에는 鮮卑族과 狄人의 피가 짙게 흐르고 있던 이른바 胡漢 雜種(호한 잡종)이었다. 唐末(당말) 5代의 나라들도 거의 이민족 군벌 등이 중국 대륙을 분할하여 세운 나라들이었다. 그 후 漢族 국가인 北宋(북송)이 1백60년간 중원을 차지했지만, 역시 우리 바이칼 동이족의 일파인 거란족의 나라 遼(요)를 섬기며 영토 할양 등 온갖 수모를 받았고, 뒤이어 遼를 멸망시킨 여진족의 나라 金의 침략을 받아 양자강 이북을 빼앗기고 강남으로 쫓겨가 1백50년간 南宋(남송)으로 잔명을 겨우 이어갔다. 그런 南宋도 북방 초원에서 흥기한 칭기즈칸의 몽골족에게 계속 압박을 받아오다 그 손자인 쿠빌라이칸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정통 바이칼 동이족인 몽골족의 정복왕조 元(원)은 민족 차별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여 漢族을 최하위인 제4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유별나게 괄시했다. 그후 1백년 만에 漢族 비적 출신인 朱元璋(주원장)이 일어나 元을 漠北(막북)으로 내쫓고 中原을 되찾아 明을 세웠다. 이런 明은 2백여년 만에 다시 여진족(만주족)이 세운 淸(청)에 멸망당하고 만다. 淸은 중국을 3백년간 지배한 정복왕조였다. 이상이 중세 이래 중국의 역사로서 漢族은 동족 왕조보다 이민족 왕조의 지배를 훨씬 오랫동안 받아온 피압박 민족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중국인민을 구성하는 민족의 수가 50개를 넘게 된 까닭이다. 漢族은 압도적인 인구수와 유목민족에 비해서는 월등한 문화로써 자신들을 지배했던 이민족을 다만 중국인의 범주에 넣어 왔을 따름이다. 진골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른 사대망국자 김춘추! 그는 사대망국자답게 먼저 나라의 제도를 당나라식으로 고쳤으며 삼국 대전 직전 당에 청병하러 갔을 때는 민족의 자존심은 다 내팽개쳐버리고 당태종에게 그 장복의 개혁을 청하여 당의에 쫓으면서 우리 나라 고유의 관모 대신에 복두라는 것을 착용하기까지 했다. 실로 다른 나라 왕을 만나는 데 자기 나라 옷마저도 입지 못하는 추태를 보인 것이다 물론 신라의 사대주의 정책은 김춘추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우리나라 역대왕 중 2명에 불과한 여왕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이 재위한 시기는 신라의 중고시대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전쟁을 하던 시기이며, 국력을 키우기 위해 당과의 외교를 긴밀하게 유지하였던 시기로 선덕여왕의 외교정책은 신라사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지만 반대로 사대외교의 터를 닦아 민족을 멸망의 길로 이끌기도 한 우리 민족사의 비극이다. 이어서 신라 제28대 왕(재위 647∼654)에 오른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전임 선덕여왕의 사대망국 치맛바람 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여 대외적으로는 당(唐)나라와의 사대망국 외교를 지속하였다. 사대망국외교의 그 결정판이 바로 648년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청병외교(請兵外交)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소위 숙위외교(宿衛外交)의 전개였다. 649년에는 사대망국주의의 극에 다다라 김춘추의 건의대로 당나라 제도에 따라 복제(服制)를 개편하고, 650년 법민(法敏)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여왕이 친히 지은 《태평송(太平頌)》을 바치고, 즉위 때부터 사용하던 연호인 태화(太和)를 버리고 당나라 고종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사대아부 정책에 흡족해 한 당나라 고종은 진덕여왕이 죽은 뒤, 비단 300필과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에 추증하기까지 하였다. 물론 선덕여왕 11년(642년) 대야성(합천)을 둘러싸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서 신라는 대야성을 잃는 등 큰 타격을 받고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외세인 당나라와의 연합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 결과 신라는 648년(진덕여왕 2) 김유신 장군의 지휘하에 대야성을 탈환하게 된다. 한편 구토 설화(龜兎說話)와 관련된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삼국사기> '열전(列傳) 김유신條'에 보면 김춘추가 백제를 치려고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가 오히려 보장왕에게, 정확히 말하면 연개소문에게 잡혀 죽음의 지경에 이르게 되자, 왕의 총신(寵臣)인 선도해(先道解)에게 청포(靑布) 삼백 보를 뇌물로 주고 이 구토설화를 들은 후 그 의미를 깨닫고 이야기 속의 토끼처럼 왕을 속이고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다. 김춘추는 바로 연개소문으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벗어난 다음 부터 고구려에 대해 원한을 품고 나당연합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김유신의 위명은 東아시아를 진동시켰던 것 같다. 바로 이해(648년) 겨울에 김춘추는 셋째아들 文汪(문왕)과 함께 長安(장안)으로 들어가 당 태종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唐 태종은 김춘추에게 실로 묘한 질문을 던진다. 『그대 나라의 김유신에 대한 명성을 들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하오?』 김유신이라는 명장이 있다는데 신라가 굳이 원병을 청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뉘앙스를 깔고 있는 물음이었다. 김춘추는 역시 상대방의 속셈을 읽는 외교관이었다. 『유신이 비록 재능과 지혜가 조금 있다고 하나 황제의 위력을 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주변의 우환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이 대화만 보더라도 신라에게는 민족통일의 대업 달성이라는 의식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당 태종은 매우 흡족했다. 『참으로 군자의 나라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 태종과 김춘추는 무릇 한민족을 멸망의 길로 이끌고 반면 중국을 동아시아의 대국으로 이끄는 백제와 고구려 침략을 위한 羅唐(나당) 군사동맹을 확정했다. 여기선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에 있을 전후 처리 문제의 원칙에도 합의했다. 그 내용은 문무왕의 대당 선전포고문에 해당하는 671년의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의 문면을 보면 명확하다. 이때 당태종은 다음과 같은 영토분할안을 제시했다. 『짐이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신라가 양국에 핍박되어 매양 그 침해를 입어 편안한 날이 없음을 애달피 여김이니, 山川土地(산천토지)는 나의 탐하는 바가 아니며, 玉帛(옥백)과 子女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는 다 그대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려 한다』 이것은 麗濟(여제)를 멸망시키는 경우의 영토 분할 약정이며, 신라에 대한 持分(지분) 보장이었다. 이 얼마나 우수운 영토분할 약정인가? 한민족 영토의 20분은 19는 당나라에 내주고 20분의 1만 차지하겠다는 이 비굴의 극치를 달리는 통한의 약정이 말이다. 이 약정만 보더라도 신라가 민족통일이라는 의식으로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백제와 고구려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소박한 뜻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고서도 삼국통일을 운운한다는 것은 실로 헛소리가 아닐 수 없다. 후세 사람은 김춘추가 왜 더 많은 지분을 요구하지 못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당시의 역학 관계에서 보잘 것 없는 국력 밖에 없었던 신라로서는 격에 맞을 뿐만 아니라 그 이익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뭏든 이 때 김춘추의 對唐(대당) 외교는 신라의 입장으로선 대단한 성공작이었을지 몰라도 민족을 구렁텅이로 내모는 것임에 틀림 없었다. 김춘추는 당 태종에게 사의를 표한다. 『저의 자식이 일곱이오니 원컨대 그중 하나인 文汪(문왕)으로 하여금 성상의 곁을 떠나지 않는 宿衛(숙위)가 되게 하여 주소서』 文汪에게 이미 좌무위장군의 벼슬을 내렸던 당 태종은 다시 그에게 宿衛를 겸하게 했다. 숙위라면 황제의 경호를 위해 주변국에서 파견한 왕족 혹은 귀족의 자제로서 인질적 성격도 띠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황궁에 머물며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외교관 역할을 했다. 이로써 김춘추는 당 태종과 핫 라인을 개설했던 셈이다. 이후 김춘추는 정상을 향한 길을 밟아 간다. 그러나 그는 海路(해로)를 통해 귀국하다가 고구려의 해상 순라대를 만나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겪기도 한다. 이때 김춘추의 목숨을 구했던 사람이 그의 시종 溫君解(온군해)였다. 위기의 순간, 온군해는 김춘추의 옷과 모자를 착용하고 김춘추인 것처럼 가장했다. 갑판으로 뛰어든 고구려의 순라병은 김춘추로 잘못 알고 온군해를 난도질했다. 그런 소란 속에서 김춘추는 작은 배로 바꿔 타고 신라로 복귀했다고 한다. 돌아보건대 사대 망민족의 주역 김춘추는 그때 당시 죽었어야 옳았다 「삼국사기」에는 「(660년) 3월에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 김인문(무열왕의 차남)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장군 劉伯英(유백영) 등 수륙군 13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는 동시에 칙명을 내려 무열왕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장병을 거느리고 당군을 지원하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열왕이 蘇烈의 절제를 받는 羅唐 연합군의 형성이었다. 얼마나 한심한 연합군 형성인가? 일국의 왕이라는 작자가 당나라 일개 장수의 부하라니? 오호 통재라! 請兵(청병)을 했던 신라로선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 할지 모르지만 민족의 자존을 버리면 모든 일이 다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 아니던가? 나당연합을 분석하건대 신라의 입장에서 멀리 있는 唐과 연합하여 가까운 백제를 치는 것은 병법에서 말하는 遠交近攻(원교근공)이다. 「孫子兵法」에서는 遠交近攻의 전략을 채택할 경우 자국보다 강한 나라와 동맹을 맺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동맹국에게 자국까지 먹혀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힘들게 원병온 나라가 약한 먹이를 두고 그냥 돌아갈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몽매의 극에 달했던 신라의 수뇌부는 이러한 兵家(병가)의 상식마저 간과하고 나당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결국은 민족을 멸망의 길로 인도했던 것이다. 당은 백제 공략에 앞서 658년과 659년에 연이어 요동 지역을 공략함으로써 고구려가 밖으로 눈을 돌릴 수 없도록 견제했다. 왜국은 당시 대규모 호화 토목 공사를 일으킨 여왕 濟明(제명)의 亂政 때문에 한반도 문제에 즉각적으로 개입할 만한 국력을 갖지 못했다. 한편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되풀이한다. 백제 멸망 한 해 전(659년 여름 4월)에도 백제군은 신라의 獨山(독산), 桐岑(동잠) 두 성을 침공했다. 이러한 백제의 빈번한 신라 침략은 치밀한 전략 아래 결행되었다고 하기보다는 즉흥적으로 감행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사실 말기의 백제는 신라에 대해 공세적 위치에 있었지만, 한 번도 결정적 승리를 쟁취한 바가 없었다. 의자왕은 전투에서는 자주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했다. 서양의 戰爭史家(전쟁사가)들은 이런 경우를 피루스(Pyrrhus)의 승리라 일컫는다. 古代 에피로스의 王인 피루스는 전투 능력에 관한 한 알렉산더 大王 이래 최고의 강자로 회자되었으나, 너무 잦은 전투로 유능한 장졸들을 무분별하게 소모시킨 끝에 자기 당대에 패망했다. 동양에서는 後漢(후한) 말기의 최대 군벌 董卓(동탁)의 말로가 그러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멸망 당시 백제의 국세는 5部, 37郡, 2백城, 76만戶로 되어 있다. 오랜 전란으로 인해 집집마다 사망자가 많았던 점을 감안하여 1호당 가족수를 4인으로 잡더라도 백제의 인구가 3백만에 달했던 것이다. 668년 멸망 당시 고구려의 국세는 5部, 1백76城, 69만 戶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고구려에 비해 영토는 훨씬 좁았으나 인구수는 오히려 더 많았던 것이다. 이것은 백제의 농경지가 기름져 농업 생산량이 많고, 그만큼 인구밀도가 높았다는 얘기다. 역사의 기록이 없어 속단할 수 없지만, 농경사회인 삼국 가운데 國富(국부)를 축적하는 데 관한 한 백제가 고구려나 신라보다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배층의 향락 때문에 백제는 부국강병에 실패했던 것이다. 의자왕의 항복 후 당은 백제 땅에 5도독부를 설치했다. 당초 약속을 어기고, 백제에 대한 지배권을 신라에 주지 않고 당의 직할 식민지로 삼았다. BC 108년 한(漢)나라에 의해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멸망하면서 2226년 간 계속된 고조선은 막을 내리게 되고, 여러 형태의 부족국가들이 할거하게 된다. 이 전국(戰國)시대를 거쳐 BC 50년을 전후하여 삼국시대로 접어들게 되는데, BC 37년 북부여 땅에서 일어나 만주 일대를 장악한 나라가 고구려이며 이 고구려의 건국정신 이 바로 다물이다. 즉,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은 '단군조선의 위대한 역사와 강역을 회복하겠다'는 기치를 들고 건국에 나섰으며 연호를 「다물도(都)」라 지었다. 다물정신은 진취적이며, 그 정신으로 일으킨 고구려의 기상과 국력은 강대했다. 백제 역시 BC 18년 건국 직후부터 한반도 서해안을 넘어 중국 발해만 및 양자강 하구의 동지나 해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넓히는 한편 고대 일본의 여러 세력을 지배하는 커다란 해상제국(海上帝國)으로 성장한다. 백제의 국력이 융성하기 시작한 234년 고이왕(古爾王)때부터 479년 동성왕(東成王)까지 240여년 간 백제는 때마침 중국대륙이 후한 이후의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로 대혼란기를 겪고 있음을 틈타 적극적인 대륙진출 전략을 구사한다. 백제는 시조인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 동명성왕과 한 형제였듯이 각기 건국 이후에도 한결같이 고조선시대의 역사와 강역회복을 강력히 추진하여 한때는 고구려 이상으로 거대한 영토와 해상패권을 장악하였으니, 바로 백제의 다물시대였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침공으로부터 시작된 신라의 삼국 대전은 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큰 고비를 넘긴다. 그러나 신라는 오히려 삼국 대전 이전보다 당(唐)으로부터 더 낮은 수준의 신국(臣國) 취급을 받게 된다. 그도 그럴것이 민족을 이민족에게 팔아 먹었으니 비록 중국 입장에서는 신라야말로 중국역사에 가장 큰 효자 노릇을 하였다고 생각되었더라도 무지몽매한 족속으로밖에 이해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멸망(668)후 대조영(大祚榮)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옛 고구려 땅에 건국된 나라가 대진국 발해(698∼926)이다. 발해는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고구려 이후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발해는 고구려의 유지(遺志)를 이은 자주적 독립국가였고 당·신라·일본과 대등하게 교류하며 220여년간 만주대륙을 호령했던 우리 민족사의 중요부분임은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다. 발해의 원래 국명이 대진(大辰)이었음도 옛 단군조선의 3조선(진,번, 막)을 총괄적으로 통치한 나라가 진조선(辰朝鮮)이었기에 그 이름을 계승한 것이요, 그 뒤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며 수도를 다섯 군데나 두고 만주일대를 차례로 장악해 나갔던 것은 그 건국과 국가 발전철학의 밑바탕에 무엇보다 고구려 고토회복의 정신이 깔려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가 만일 민족통일의 의식이 있었다면 당연히 발해와의 통일을 도모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그런 정신도 그럴만한 힘도 없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지난, 1,000년간 잃어버린 만주 땅을 되찾자'는 다물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는 외세만 불러들이지 않았어도 이처럼 힘겨운 다물운동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신라의 나당연합군 형성이야말로 1000여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민족의 아픔과 통한으로 남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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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 중학교 국사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그 떄 이런 말 하신다고 경고 받았었는데... 제가 전에도 말 했듯이 우리 역사에서 제일 잘못된 부분이 이 때부터입니다. 통일신라가 아니라 치욕의 역사입니다.
신선한 시각입니다.아무리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 하더라도 지나면 그 정치역학을 다 숨길수는 없겠습니다.
우리의 고대사나 삼국시대의 역사를 보면 매번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여야하는게 너무나 많습니다. 깊이 들어가지않아서가 아니라 식민사관의 역사를 배운 탓이지요. 우리의 역사교육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분명 필요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항상 우리의 식견을 넓혀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