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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당성홍)인주도령중랑장공파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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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씨 자료방2 스크랩 南陽(唐城)洪氏,中郞將破17世大宗孫.영평현령公의처조부,柳季聞선생.
홍왕식 추천 0 조회 7 14.05.06 16: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남양(당성)홍씨,중랑장파17세대종손.영평현령공의처조부,유계문선생.

南陽(唐城)洪氏麟州都領,中郞將派17世大宗孫,영평현령.贈.좌통례공의처조부.

강원감사,,유수.(유수)..유계문선생기록.

강원관찰사.인물고,,강원500년..

留守  유계문(柳季聞)  1383(우왕 9)∼1445(세종 27)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숙행(叔行). 식(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택(安澤)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관(寬)이며, 어머니는 안씨(安氏)이다.

아버지 관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봉된 이래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훈구 가문(勳舊家門)의 후예이다.

처부는 성수랑(成守良)이다.



1408년(태종 8) 생원으로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일찍이 문한관(文翰官)을 역임했고, 이조정랑, 의정부사인 등을 거쳐 1423년(세종 5) 판사재감사 겸 지형조사(判司宰監事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이 때 도관정랑(都官正郎) 김유공(金有恭)과 함께 보충군(補充軍) 누락자를 심사하다 일 처리를 잘못해 일시 파면되었다.

다음해 재기용되어,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으로서 대호군 지함(池含)과 함께 야인 추장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회유하기 위해 동북면에 파견되었다.

많은 시련을 견디어내면서 동맹가첩목아를 회유해 조선 측의 제의를 관철시켰고,

이 해 다시 아목하(阿木河)에 같은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이어 사간원우사간이 되었으나, 문화현령 왕효건(王孝乾)을 통해 백성들의 공물(貢物)을 수탈하다가 일시 파면되었다.

 곧 우의정이었던 아버지의 후원으로 좌사간에 다시 임용되었다.

 이후 급격한 승진을 거듭해 1426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외직에 나갔다가 곧 소환되어 이조참의, 형조참판 등을 거쳐 1430년 대사헌이 되었다.

이 때 대간(臺諫)의 관원과 함께 뇌물을 받고 장리(贓吏)인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 태석균(太石鈞)의 고신(告身)에 서명했는데,

 이 때문에 의금부의 치죄를 받고 직첩을 박탈당하였다.

 2년 뒤 아버지의 간곡한 소청에 의해 다시 서용되었고,

이어서 1435년(세종17) 강원도 도관찰사 한성부윤 등을 거쳐 1437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다시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을 때, 강원도도관찰사 재직시의 비행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1440년 경주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장기간에 걸쳐 외직에 있었다는 점을 이유로 이를 사피(辭避 : 사양하면서 회피함.)하다 왕의 노여움을 크게 사 의금부에 하옥 당하였다.

그 뒤 인수부윤(仁壽府尹), 호조참판, 판한성부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43년 개성부유수에 임명되었고, 2년 후 왕의 행궁(行宮)에 문안 가다가 영서역(迎曙驛)에 이르러 길에서 갑자기 죽었다.

문명(文名)이 있었다고 하며, 글씨를 잘 써서 태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안지(安止), 최흥효(崔興孝) 등과 함께 ≪금자법화경 金字法華經≫을 쓰기도 하였다.

또, 대간으로 있을 때에는 불교의 폐해와 개선, 주자가례의 보급, 염리(廉吏)의 등용과 장리의 제거를 통한 민폐 제거, 공법 개정(貢法改正) 등을 주장해 당시 사회의 병폐를 많이 개선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상위직으로 진출하면서 일에 성실함이 없었고, 뇌물을 받고 불법을 저질러 자주 탄핵을 받아 파면되기도 하였다.

 시호는 안숙(安肅)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國朝榜目, 海東雜錄, 大東野乘





개성부 유수 유계문의 졸기

 세종 27/01/02(병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유계문(柳季聞)이 졸(卒)하였다.

 계문의 자는 숙행(叔行)이며, 우의정 유관(柳寬)의 아들이다.

급제하여 벼슬을 여러번 옮겨 이조 정랑에 이르고, 의정부 사인(舍人)·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겸지형조(兼知刑曹)로 발탁되었다.

 갑진년에 교서(敎書)와 선온(宣?)을 받들고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에게 훈유하러 갔는데, 맹가첩목아가 의심하여 들판에 장막을 설치하고 접대하는지라, 계문이 교서의 뜻과 하사한 술을 설명해 이르고 술잔을 수없이 주고받으면서, 말씨와 웃음이 친절하고 흐뭇하니, 맹가첩목아가 의심을 풀고 기꺼이 복종하고, 곧 처첩(妻妾)을 내어 보이고 술을 치게 하였다.

이 해에 또 선온을 가지고 아목하(阿木河)에 갔다가 돌아왔고, 우사간(右司諫)으로 옮겼다.

 을사년에는 예조 참의가 되었다가, 나가서 충청도 관찰사가 되고, 형조참판, 공조참판, 사헌부 대사헌과,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의 관찰사를 잇달아 지냈다.

신유년에는 한성 부사(漢城府事)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판서로 옮겼고,

계해년에는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행궁(行宮)에 문안드리러 오다가 영서역(迎曙驛)에 이르러 길에서 갑자기 졸도해 숨졌다.

 향년이 63세다.

 이틀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조상(弔喪)과 부의(賻儀)를 의식대로 하였다.

시호를 안숙(安肅)이라 하였으니,

 안(安)은 너그럽고 부드럽고 화평함[寬柔和平]을 뜻하고,

 숙(肅)은 마음을 굳게 가져 결단성 있음[執心決斷]을 뜻한 것이다.

사람됨이 너그럽고 용납성이 있어서 소소한 말절(末節)에 구애됨이 없었다.

 아들은 유권, 유보, 유환, 유정, 유제, 유조이다.





개성부 유수 유계문에게 사제(賜祭)하다

세종 27/02/03(정미)



  개성부 유수 유계문(柳季聞)에게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경은 용자(容姿)가 괴걸차고 성질이 너그러웠도다.

대대로 충성과 근면을 두텁게 하고 가풍이 선비의 바탕을 전하여 왔도다.

일찍이 현량과에 장원하여 빛난 소문이 나날이 드러나고, 여러번 중외에 벼슬하여 간 곳마다 공적이 있었도다.

 미원(薇院)과 백부(栢府)에 풍절(風節)이 혼자 드높았고, 형부(刑府)와 경조(京兆)에 판결이 잘못됨이 없었도다.

여러 번 범방(范滂)의 고삐를 잡아서 뜻을 징청(澄?)하기에 두었고, 오로지 중국의 조정에 맞대하여서 말을 상명(祥明)하도록 상주하였도다.

무엇을 한들 불가(不可)하였겠으랴. 처사가 모두 격에 맞았도다.

송도(松都)를 돌이켜 보면 서무가 복잡한데, 경에게 힘입어서 조치가 잘못됨이 없었도다. 기한이 지났으나 부르지 아니하고 믿고 의지하기를, 더욱 두터이 하였도다.

 어찌하여 하늘이 사정이 없어서 이승에서 저승 가기를 이다지도 빠르게 하는고. 멀리서 옛 덕을 가만히 생각하니, 참으로 가슴 아픔을 금할 길 없도다.

이에 예관에게 명하여 약소한 <제물을> 베푸노니, 혼령이 어둡지 않거든 다행히 흠향을 할지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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