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iil Shafran 첼로의 거장 다니엘 샤프란
"내가 만약 다니엘 샤프란 같은 첼리스트만 될 수 있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그쪽으로 뛰어들고 싶다."
이건 십수 년 전 내가 주제넘게 어느 잡지에 썼던 글이다. 하필 직접 연주를 들어 본 적도 없고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 이름을 내세웠을까? 그건 그 당시 우연히 구하게된 이 사람의 판에 완전히 미쳐 있었기 때문이다. 구태여 다니엘 샤프란이 아니더라도 나는 첼로란 악기에 오래 전부터 매혹되었던 사람이다. 첼로 소리는 모든 악기 소리 가운데 사람 목소리와 가장 닮은 소리라는 말이 있다. 얼마나 정확한 진단인지 확인할 길이 없으나 그 소리가 현악기 중에서 윤택하고 부드럽고 포근하고 은밀한 깊이를 지니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여체를 닮은 그 생김새 역시 사람의 손길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악기를 켤 줄 몰라도 옆에 세워 둔 첼로를 보면 공연히 다가가서 두 팔로 껴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체격이 좋은 야노스 슈타커 같은 사람이 첼로를 한 손으로 들고 무대로 나오고 있을 때 그 모습은 연인으로 삼은 비너스와 함께 걸어나오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고 의젓하고 멋이 있다. 나는 왜 첼로란 악기를 스무 살이 한참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을까? 카잘스처럼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던들 비록 집안 형편이 여의치는 않더라도 뭔가 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나는 요즘에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이런 푸념을 가끔 하곤 한다. 부드럽고 포근하고 은밀한 여인, 첼로 현대 첼로의 명장 카잘스의 자서전을 보면 이 악기와의 최초의 만남이 무척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밴드렐에서 피아노 3중주단의 연주가 있었다. 첼리스트는 바르셀로나 사립음악원 선생님인 호셉 가르시아. 넓은 이마에 팔자 수염을 기른 잘생긴 그는 그가 연주하는 악기와 어딘지 잘 어울려 보였다. 나는 그때까지 첼로를 본 적이 없었는데 그것을 처음 보는 순간 거기에 반해 버렸다. 장중한 첫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압도되었다. 그 소리는 너무 부드럽고 아름다웠으며 마치 사람의 음성과 같았다. (중략) 그 연주회를 본 뒤 나는 아버지께 그것을 하나 갖게 해달라고 계속 간청했다. 지금부터 80년도 더 오래전인 그 때 나는 벌써 이 악기와 결혼했던 것이다."
이것은 아주 행복하고 축복받은 만남의 장면이다. 그는 그 이후에도 한동안 제대로 된 악기를 갖지 못했다. 현대 첼로의 역사를 바꿔 놓은 이 거장은 하마터면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목수가 될 뻔했다. 이 경우엔 가난이 더욱 빛이 나고 돋보인다. 가난이 그의 예술을 더욱 풍요롭고 깊이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중국 출신 장왕도 아주 극적으로 음악의 무대에 들어선 행운아다. 그는 더벅머리 초등학생일 때 마침 중국여행 중이었던 아이작 스턴에게 발견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때까지 그는 뚜렷한 목적 없이 그저 평범한 교사에게 첼로를 배우고 있던 더벅머리 소년이었다. 마침 중국에 온 아이작 스턴에게 어떤 아이가 첼로를 제법 켜는데 한번 들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왔다. 시골 초등학교 교실 같은 장소에서 스턴은 장왕 소년의 연주를 들었다. 소년은 까까머리에 허름한 반바지 차림이었고 영양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중국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생각하면 이 소년의 당시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첼로를 들고 의자에 앉은 아이는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장왕은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곡을 연주해 보였는데, 아마 마땅히 연주할 첼로곡을 아직 배우지 못했거나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구하기 쉬운 악보를 놓고 연습을 했던 탓일 것이다. 연주가 시작되자, 스턴은 금방 이 소년이 첼로에 비상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년 장왕은 정확한 음정으로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렬하게 그 음악이 지닌 감흥을 유감없이 표현해 냈다. 최근 레이저 디스크 상품으로 소개된 '탱글우드의 요요 마'를 보면 빛바랜 사진 같은 이 장면이 잠깐 소개되는데 철부지 소년 장왕이 거장 스턴 앞에서 조금도 꿀리지 않고 스스로 음악을 즐기며 여유작작하게 연주를 해나가는 인상적인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재능의 승리에 통쾌감을 느끼게 된다. 가난, 음악이 없거나 음악에 대해 무지한 환경, 이런 것들을 재능이 송곳처럼 뚫고 나와서 드디어 샛별처럼 빛을 내뿜는 것이다. 다니엘 샤프란을 알게 된 것은 베토벤 첼로 소나타가 수록된 그의 판을 우연히 입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아마 15년쯤 전의 일로 기억된다. 이 판은 정상적 루트로 흘러온 게 아니고 외국군의 라이브러리에서 빠져 나온 중고품이었다. 그만큼 그의 판이 귀하다는 얘기가 되는데, 나는 아직도 베토벤 소나타 이외에 그가 연주한 다른 곡을 들어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 연주를 들었을 때 독특하고 강렬한 그의 개성에 단숨에 빨려들어 갔다. 베토벤 첼로 소나타라면 보통은 3번이 애청되고 많이 알려져 있다. 요즘은 그렇지도 않지만 한때는 무대에 나선 연주가들조차 마치 고정 페러토리처럼 3번을 꼭 끼워 넣곤 했었다. 2번은 왠지 처지는 느낌이며 1번은 되풀이해서 들어도 언제나 너무 낯설어서 좀처럼 친해지기 힘들었다. 그런데 다니엘 샤프란의 연주에서 지금까지 가졌던 그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이 한꺼번에 깨져 버렸다. 지루해서 듣지 않던 2번, 너무 생소해서 멀리했던 1번이 아연 활기를 띠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특히 1번의 활력과 웅장한 맛, 극도로 절제된 비장감은 압권이었다. '연주가에 따라 음악이 달라지는 구나!' 나는 이 점을 절실하게 느꼈다.
망명 전의 로스트로포비치와 쌍벽을 이뤘던 인물 이 음악은 첼리스트라면 누구나 한 번씩 녹음을 남겨 놓고 있기 때문에 비교가 아주 용이하다. 야노스 슈타커, 로스트로포비치, 모리스 장드롱, 카즐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의 연주를 구해 들을 수 있다. 슈타커의 정확성과 장인적 기교는 정평이 나 있다. 나도 그의 애호가 중 한 사람이다. 몇 년 전 호암아트홀에서 그가 연주하는 쿠프랭의 첼로 협주곡을 들었을 때는 한동안 그야말로 무아지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의 기교는 현란할 뿐만 아니라 청교도적인 절제 아래 음악을 통제하고 있었다. 베토벤 '첼로 협주곡 3번'을 무대에서 내게 처음 들려 준 사람도 슈타커였다. 로스트로포비치의 따뜻하고 장중한 연주 스타일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모리스 장드롱은 경쾌하고 날렵하다. 카잘스는 녹음 상태가 완벽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심금을 울리는 선 굵은 저음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베토벤 첼로 소나타에 관한 한 누구도 다니엘 샤프란만큼 그 음악 속에서 활달하고 자유롭게 숨을 쉬지는 못한다. 샤프란의 연주는 강렬하고 섬세하고 심줄 같은 탄력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음악을 듣는 동안 긴장에서 놓여날 수가 없게 만든다. 다른 연주가들이 오선지에 놓여 있는 기호를 음악으로 살려 놓는다면 샤프란은 그것을 숨쉬고 움직이는 생물체로 되살려 놓는다. 적어도 베토벤 첼로 소나타에서는 그렇다. 성 페테르부르크 태생인 샤프란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웠고 열 살 때 데뷔 무대에 섰다. 1973년 그가 소연방 첼로 경연대회에서 첫 수상할 때 14세였으니까 지금 아마 71세가 아닌가 추정된다. 그는 1949년의 부다페스트 청년음악제와 1950년 프라하 콘테스트에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참여한 바가 있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미국으로 망명했을 때 누군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소련에는 아직 다니엘 샤프란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소련인들은 로스트로포비치의 망명을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다니엘 샤프란이 5월에 서울 무대에 선다고 한다. 음악지의 예고란에 나온 이 기사를 읽고 눈이 번쩍 뜨였다. 누가 착오로 이름을 잘못 적은 게 아닐까 하고 의심까지 해봤다. 그러나 잘하면 5월에 서울에서 1630년제 명기 안토니오 아마티를 한 손에 들고 무대로 걸어나오는 71세의 다니엘 샤프란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가 정말 여기에 올까? 그가 온다면 금년 5월은 내게 한층 뜻 깊은 5월이 될 게 분명하다. PS. 다닐 샤프란은 1996년 5월에 내한 연주회를 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1월에 사망했다. 글 : 송 영 (소설가)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