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은 주일마다 '바이블25'와 '당당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인생은 술래자
올가을 군포지방에서 교역자 영성순례를 다녀왔다. 스페인-포르투갈 여정은 그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문화없이 발을 딛기가 어려울 만큼 영성의 자취로 무성하였다. 인문지리와 자연지리 모두에 그리스도교 상징물들을 표현해 두었으니, 여행자들의 눈으로도 신앙의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유럽 여행의 명분으로 영성순례라는 이름을 내세운 것이 무색하지 않은 까닭은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방문한 덕분이다. 가장 기대를 모은 곳이기도 했다.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El Camino de Santiago)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의 자취를 따라가는 순례길이다. 비록 빠듯한 일정상 하루도 걷지 못했으나, 저가 항공 브일링(Veuiling) 편으로 그곳으로 날아간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프랑스 생 장(St. Jean Pied de Port)에서 시작해 스페인 북부를 통과하여 콤포스텔라(Compostela)에 도착한 순례자들의 감격은 오죽 벅찰까? 그들이 누리는 감동이 옆에서 지켜보는 관광객에게도 전달되었다.
유럽 사람들은 자기 집 앞에서부터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기도 한다. 순례자들이 자신만의 산티아고 지도를 작성하는 셈이다. 스위스 쮜리히에 사는 한복녀 권사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간호사로 은퇴한 그이는 날마다 산티아고를 향한다. 새벽에 일어나 기차를 타고 집을 나서서 어제까지 걸었던 길을 이어서 걷는다.
매일 저녁이면 홀로 사는 집으로 돌아오고, 아침이면 다시 순례길을 나선다. 정명성의 시(‘가을 밤길’)처럼 “어둠에서 깨어나 어둠으로 스러지는 하루/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독일 국경에 위치한 보덴제로부터 프랑스 국경까지 스위스 길 420Km 완주를 목표로 한다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한적한 시골길을 지날 때면 교회 입구에 놓아둔 순례자를 위한 음료와 간식을 먹을 수 있다.
산티아고 길을 여행하는 순례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 이전 2019년도 통계에 따르면 산티아고 길을 100Km 이상 걸은 사람은 모두 34만 7,578명인데, 그중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8,224명으로 세계 8위였다. 그리고 지금 순례길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점점 더 붐비고 있다. 순례자는 길을 걷는 사람이고, 길을 찾는 사람이다. 그러니 순례자를 ‘술래자’로 부르는 언어유희도 가능하다. 어린 시절 아이들의 놀이에서 홀로 ‘술래’가 되는 일은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다.
순례자가 걷는 길을 가리켜 ‘트레일’(Trail)이란 말을 사용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차마고도, 제주도 올레길 등 트레킹 코스로 불리는 그런 길이다. 물론 잘 포장된 자동차도로가 아니다. 시골 먼지 길이나, 인적이 드믄 산속 임도(林道)쯤으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런 마음으로 두근두근 걷는 여정이다.
반가운 소식은 대한민국 국토의 가장자리를 중단 없이 걸을 수 있는 트레일이 개통되었다고 한다. 한반도를 한 바퀴 아니, 반 바퀴 도는 코리아 둘레길은 2009년 착공을 시작한 지 15년 만에 전 구간을 완공하였다. 총 연장거리는 4,530Km로 가장 늦게 문을 연 DMZ 평화의 길(510Km)을 끝으로 동해의 해파랑길(750Km), 남해의 남파랑길(1,470Km) 그리고 서해의 서해랑길(1,800Km)이 모두 한 길로 열렸다.
모든 순례자는 자신의 길을 걷는다. 많은 사람이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어도 각양각색 다른 호흡과 마음가짐, 보폭과 목적을 지닌 채 걷게 마련이다. 저마다 삶의 기도가 다른 까닭이다. 하긴 동네 약수터로 가는 길이든, 마음먹고 걷는 지리산 둘레길이든, 날마다 되풀이하는 건강 만보 걷기든, 다 비슷비슷한 이유로 일용할 순례 중이다.
돌아보면 길을 걷는 까닭은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평생 걸어왔지만, 걸어온 길에 성취감과 함께 미련이 남고, 걸어갈 길에 두려움과 희망이 교차한다. 남과 북을 가로지른 생생한 분단 현실의 접경 지역을 걷는 이유는 불화의 길을 넘어 평화의 길을 찾으려는데 목적이 있다. 한반도의 분단 현장이 코리아 둘레길을 통해 세계적 이정표가 된 배경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례자는 모두 술래자가 되어야 한다. ‘순례’와 ‘술래’가 이음동의(異音同意)어로 들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