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5, 회사 동료들과 연풍성지 성지순례를 마치고 문경새재를 들렀습니다.
연풍성지에서 문경새재까지는 20분 정도면 갈 수 있어 하루 코스로 아주 좋습니다.
연풍에서 이화령 터널을 지나면 문경땅입니다.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기도 하고요.
문경새재는 봄이면 봄대로 여름이면 여름대로, 또 가을이나 겨울에 와도 풍경이 다릅니다.
옛날 영남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갈 때면 꼭 문경 새재를 넘어서 한양으로 올라 갔다고 합니다.
가깝기도 하지만, 문경새재를 넘어야 급제한다는 전설이 있어 일부러라도 새재를 넘었습니다.
문경새재는 골이 깊지만, 완만한 경사라서 한나절이면 넘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제 1관문 (조흘관)-제2관문(조곡관)-제3관문(조령관)까지 왕복 3~4시간이면 됩니다.
지금은 문경시에서 길에 고운 마사토를 깔아 놓아 맨발로 걸을수 있게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전체적인 코스가 완만해서 어린이 손을 잡은 젊은 부모들과
할아버지 할머니 들도 즐겁게 트레킹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날도 남녀노소의 알록달록한 등산복이 세대를 무시하고 함께 어울렸습니다.
또한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면서 별도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라면 연풍성지와 연계한 성지순례 코스도 좋고,
신자가 아니더라도 가족끼리 트레킹 코스로도 추천할 만 합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손잡고 걷는 십리길은 나중에 커서라도 좋은 추억이 될 겁니다.
서울에서 2시간 거리니까 별도 숙박 걱정없이 하루면 넉넉하게 다녀 올수 있습니다.
제 1관에서 출발해서 제3관을 올라가는게 부담된다면, 차량으로 제 3관문으로 이동,
제3관문에서 제1관문으로 내려오는 내리막길을 택해도 좋습니다.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합류하면 되고요.
토요일이라서 많은 차량들이 주차장을 채우고 있습니다. 2,000원의 주차료를 받습니다.
제1관문으로 가는 길...양쪽에는 은행잎이 가로수로 심어져서 정취를 더해 줍니다.
우리가 간 지난 주는 은행잎이 많이 떨어져서 또 다른 걷는 맛을 더했습니다.
입구에 있는 선비상입니다. 요즘의 간편한 등산복에 비해...복장이 거추장 스럽다는 느낌입니다.
문경새재 박물관입니다. 아직 내부 수리중...
소망의 항아리 탑, 덕망의 탑, 희망의 탑, ...
토요일을 맞아 많은 등산객들이 문경새재를 찾았습니다.
나무에 하얀 종이가 장식처럼 나풀 거리는데...한지에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소망이 적혀서 바람에 날립니다
멀리 보이는 성벽이 제 1관인 조흘관입니다. 영남제1관문...
왼쪽으로는 절벽과 맞닿아 있어 저 관문을 지키면 대군을 막을수 있는 맥입니다.
옛날 임진왜란때 기병을 지휘한 신립장군이 저 관문보다 탄금대를 택해서 전멸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신립장군만 탓할수는 없습니다.
문경 관문이 천험의 방어요새임은 맞지만, 아마 저곳을 몇개 소부대로 공격하게 하고...
본대는 왼쪽으로 멀리 돌아 달래강을 따라 충주로 진격한다면 새재를 지키는 방어군의 배후가
노출 되게 되어 있습니다.
가토오 기요마사도 뛰어난 장수로 바보처럼 저 관문에다 일렬종대로 전투력을 집중시켜
병력을 소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문경새재를 포기하고 달천강을 배수진으로 삼은
신립장군을 욕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양 측이 처한 군사적인 상황을 보면 신립장군의 의도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 기병8천명을 산골짜기에 몰아넣는 모습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단...신립장군이 그 당시 조정의 입만 살아 있는 대신들처럼
왜군들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부분은 후세의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승리를 할 수있는데...그 당시는 왜국의 문물과 전투력은 가급적 낮추고
유교사상을 맹신하던 우리나라와 대국(중국)의 우월성을 입으로만 강조했습니다.
왜군의 선봉대장은 가토오 기요마사...이기는 싸움만 하는 백전의 승장이었습니다.
그리고, 15,000명의 병사들은 오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정예병이었습니다.
예나지금이나 유비무환의 임전태세 유지와 지휘관의 통찰력이 필요한건 똑 같습니다.
어쨋든 하룻길을 막은 신립장군과 전몰 군사들의 명복을 빕니다.
몇 개 남은 까치밥으로 감을 남겨 놓는 여유가 보기 좋습니다.
오른쪽 산기슭까지 성벽을 쌓았습니다. 아마 1개 중대 규모의 방어진인듯 싶습니다.
경상도 관찰사들의 기념비 입니다. 제일 앞은 이곳 현감?이 철탑을 주조해서 특별하게 자신의 공적을
후세에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 연못에서 맨발로 걸으면서 묻었던 흙을 씻을수 있습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맨발로 걷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지만...
지압을 할 수 있도록 고운 자갈을 깔아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왕건 촬영지라고 합니다. 입장료를 받길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옛날부터 과거 합격을 빌며 한사람 두사람 쌓아놓은 돌탑...저 돌의 주인중에 과거에 급제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린 선비도 있을 겁니다.
계곡을 가로 질러 나무다리가 걸려 있습니다. 옛날에도 건너편에 주막이 있어서 지친 선비들의 목도 축이고
산적을 피하기 위해 함께 산을 넘을 길동무를 기다렸습니다.
마지막 단풍이 등산객을 맞습니다.
이렇게 고운 마사토로 길을 다져 놓아서 맨발로 걸어도 발이 아프지 않을것 같습니다.
예배굴이라고 옛날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던 초대 교인들이 이곳 굴에 모여서 예배(미사)드리던 곳...
천주교 성지라고 안내표지판에 써 있어서 올라갔다가 왔습니다.
지금은 낙엽이 많아서 낙상사고를 조심해야 합니다.
이백여년 전에 한글로 적은 '산불됴심' 표지판...옛날 지방 현감의 안전의식이 돋보입니다.
제2관문인 조곡관입니다. 이곳에서는 제 1관보다 더 폭이 좁아서 천혜의 방어요새가 됩니다.
우리 일행은 다음 일정이 있어 이곳에서 회군했습니다.
이곳까지 약 4km정도 걸어 올라온 것 같습니다. 우리 일행은 왕복 1시간 30분...천천히 걸어도 2시간정도?...
다시 제 1관을 향해 내려오는 길..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 왔습니다.
사진은 없지만 문경새재 주차장 옆 식당의 산채비빔밥이 유명합니다.
초곡관 과 새재 할매집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까지 왔으면 문경의 산나물 맛을 음미하는 것도 괜찮겠지요...
첫댓글 조상님들의 발자취가 느껴집니다. 성벽도 제법 웅장해 보이구요. 감사합니다.
키달아찌님 반갑습니다. 아찌님께서 느끼시는 것처럼 성벽이 공성전을 위해 높지는 않더군요. 과거에도 이 상태였는지?...아니면 후세에 복원을 하면서 높이를 낮춘건지?... 관문 높이로 봐서는 아마 옛날에도 이 정도 규모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중에 기회되면 한번 가보시면 가족 트레킹 코스로 아주 만족하실 겁니다. ㅎㅎ 추워지는 날씨에 건강 조심하십시요.
아찌님께서 먼저 다녀가셨군요...임란중의 가토오기요마사의 회고담을 보면 "문경새제를 방어하였더라면 왜군은 서울로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달래강을 따라 한양으로 가는 길도 있으나 이곳은 요새중의 요새로 왕건이 신라를 쳐들어 갈 때 사용한 요새가 있습니다 사람 한사람이 절벽으로 오르는 길이 있습니다 군사로 일 수는 지금도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일명 토끼 뻥대 (절벽이라는사투리)입니다. 토끼가 절벽을 기어 오르더라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곳을 잘 보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꽃삽 어딨지?
ㅎㅎ꽃삽님 견해에 동감합니다. 아마, 달래강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돌게 되지요. 당시 전투력으로 봐서 기요마사가 조선군을 우습게 본 경향도 있지요?... 문경새재를 넘고난뒤에 아찔했을겁니다. ㅎㅎ 그러나 어차피 당시의 조선 군사력으로는 3군으로 나뉘어서 북진하는 왜군을 맞설 능력은 부족했기에 신립장군도 한판승부를 노렸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장기전으로 3군을 상대할수는 없었으니까요... 어쨌든 아픈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날씨가 풀려도 겨울은 겨울인가 봅니다. 감기조심하시고 건강 잘 챙기시길 빕니다.
문경새제에서 보는 단풍은 더 진합니다 지형적인 원인도 있겠지만 많은 선비와 행락객들의 마음을 담아 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름답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방문했을 때는 단풍의 마지막 끝자락이라서 선홍빛으로 빛나는 단풍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원색 등산복이 단풍처럼 화려하더군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