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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원대 최상국 감독, '물 찬 제비' 87년 수퍼리그 득점왕-도움왕 동시 석권 | |
기사입력 2012-03-28 오후 4:09:00 | 최종수정 2012-03-28 오후 4:09:26 | |
▲지난 21일 호원대구장에서 가진 전주공고와의 연습경기에서 선수들에게 작전지시를 내리고 있는 최상국 감독 ⓒ ksport
87년 프로축구 수퍼리그(현 K-리그)득점왕과 도움왕을 동시에 석권하며 한국프로축구 역사상 깨지지 않은 기록을 남긴 최상국(당시 포철 소속) 감독이다.
수퍼리그 원년멤버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은퇴 후 모교 청주대학교에서 12년, 2003년부터 호원대학교에서 9년째 제자들을 양성하며 제2의 축구인생을 걷고 있다. 그런 그에게 지난 3월초 호원대학교 스포츠레저학과 교수임명을 받아 축구선수로서 자신의 꿈이었던 교수의 꿈도 이뤘다. 지금부터 그가 축구와 함께 해 온 인생스토리에 대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축구가족 4형제 축구선수, 축구가 좋았던 어린 시절
“어릴 때부터 공을 좋아했어요. 형들 때문에 더 공과 가까이 지냈어요. 형들이 공을 잘 찼어요. 저 위로 형들 3명이 있는데 모두 축구를 했어요. 나름대로 공을 좀 찬다는 형들이었는데 모두 고등학교까지 축구를 하고 그만뒀어요. 대학도 못가고 그때만 해도 축구환경이 열악했어요.
그때는 못사는 집안의 아이들이 축구를 많이 했는데 그렇다보니 중간에 그만두는 불상사가 많았죠. 요즘은 없는 집안의 애들은 축구하기 힘들어요. 축구가 변한 정도가 아니라 많이 바뀌었죠.”
어린 시절 형들이 못다 이룬 꿈에 대해 못내 아쉬웠다. 그런 아쉬움을 동생인 제가 성취해줄 것으로 형들은 큰 기대를 했다.
“한 집안에 4명이나 축구를 하다 보니 어머님께서 뒷바라지에 고생이 많았죠.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한다고 객지생활을 했어요. 가족과 떨어져서 하는 합숙생활이 힘들고 외롭기도 했지만 그때는 재밌었던 것 같아요. 축구를 워낙 좋아했으니까. 축구를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외로움 같은 건 잊어먹을 수 있었죠.”
▲최상국 감독 아래서 지도를 받고 있는 호원대학교 선수단 ⓒ ksport 운도 없고 고달팠던 중-고-대학 축구시절
중학교 때는 성적이 좋았는데 고교 때는 멤버도 좋았는데 왜 그렇게 성적을 내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라는 말로 중-고교 선수생활의 이야기보따리 풀어 놓는다.
“중학교 시절 전국대회에서 2번 우승했고, 2번 준우승, 1번 3위를 차지했어요. 모든 대회에서 저희 학교가 휩쓸고 다닌 셈이죠. 중-고교 때 유명한 선배들이 많았어요. 우리학교에서 국가대표 출신이 많이 나왔어요. 저희 학년 때도 그렇고 선후배들도 유명한 선수가 많이 나왔어요.”
그는 명문 청주대성중-대성고를 졸업했다. 청주 대성고(전 청주상고)는 역대 국가대표를 많이 배출했다. 한국축구 불세출의 영웅 최순호(전 강원FC 감독. 전 국가대표)를 비롯해 이재희(현 청주대 감독. 전 국가대표)등 선배들이 있고, 동기생들인 신상근(전 포철. 럭키금성. 전 국가대표)과 정기동(전 국가대표)이 있다. 이후에도 이운재(전남)와 박성배, 이장관, 서혁수 등 걸출한 후배들을 배출하며 명문학교 축구부로 자리 잡고 있다.
고등학교 때 멤버가 좋았음에도 대회에 큰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목표로 했던 상위권 대학교가 아닌 지방 청주대학교를 입학했다. 실망이 컸다. 그는 그곳에서 축구를 하는 게 즐겁지 않았다. 축구가 멀어졌고, 좌절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대학은 그에게 새로운 것을 일깨워 주었고, 좌절을 밟고 일어서는 발판이 되어 주었다.
“솔직히 더 좋은 대학을 희망했어요. 나 자신은 좋은 대학에서 꿈을 펼칠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그 바람이 안 되다 보니까 포기가 되어버렸죠. 1학년 때는 운동을 대충했어요. 경기에 잠시 들어가 대충 시간만 보내고 나오곤 했어요. 대학생활이 그저 형식이 되어 버린 거죠. 2학년 때는 축구를 포기했어요. 그때 대학교가 사범대라서 교사자격증이 있었어요. 그래서 교사로 갈까 고민하다 군대를 가려고 지원하면서 축구를 포기했어요. 하지만 군대도 제 뜻대로 되지 않고, 그래서 축구를 더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상무지만 그때는 공군 팀이 있었는데 보름간 훈련을 받은 결과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입대를 못했어요. 여러 가지로 힘들었어요. 군대마저 못가니까 내 자신이 참 한심했어요. 축구를 거의 2년 정도 쉬다시피 했어요. 그 때 고교선배님이시자 대학교 때 은사이셨던 조성달 교수님께서 제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어요.”
그는 조성달 교수님 덕분으로 다시 축구화를 신었다. 그가 방황을 접고 다시 축구공을 만진 곳은 수퍼리그의 시작이다.
▲선수들에게 작전지시를 내릴고 있는 최상국 감독 ⓒ ksport
축구를 다시 시작한 포철, 그 곳에서 다시 태어나다.
“축구에 대해 회의를 느끼던 차에 포항(포항제철)에 입단하면서 축구를 다시 했어요. 대학을 계속 다녔으면 어떻게 될 줄 몰랐지만 포철에 입단한 건 잘한 것 같아요. 조성달 교수님이 포항에 테스트를 받아보라고 하셨는데 결국 테스트를 통과해 입단하게 되었죠.”
입단 후 그는 축구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무조건 열심히 했다. 그는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고, 옆을 볼 시간도 뒤를 볼 시간도 없었다. 2년 이란 공백 기간을 따라잡기 위해선 무조건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생각은 실천으로 옮겨지면서 곧 빛을 발했다.
“제가 입단했을 때 프로가 처음 생겼어요. 수퍼리그 원년 멤버로 게임을 뛰는 영광을 누렸는데 그때 분위기가 워낙 좋았어요. 선수들의 기량도 몰라보게 향상됐고, 무엇보다 홈앤드어웨이 경기를 하다 보니 선수들 개념부터 프로화로 바뀌었어요. 수퍼리그로 인해 우리나라 축구가 한 단계 발전하지 않았나 싶어요.”
“수퍼리그 출범을 하고 군인차를 타고 카퍼레이드를 했어요. 축구 붐이 일어나 관중도 많았고요. 앉을 자리가 없어 육상트랙까지 내려와 구경을 했으니까요. 얼마나 열기가 대단했는지 실감하세요. 지금은 축구는 발전했는데 관중들이 없어 안타까워요.”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그의 말에 탄성이 흘렀다. 많이 발전해야 하는데 그때보다 오히려 관중들이 더 줄어들고 있다는 말에 적잖은 실망을 했다.
“포항에 입단하면서 실력이 일취월장 했어요. 개막하고 첫 해 도움순위 2위. 몇 경기되지 않았지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어요. 다시 축구를 하는 게 즐거웠고 관중도 많고 그들 앞에서 축구를 하다보니까 제가 업이 됐어요. 정말 축구할 맛이 났어요.”
그가 넣은 수많은 골 중에 기억에 남는 골이 터졌다. 바로 85년 그 해의 베스트 골을 최상국 그가 터뜨렸다.
“예전에는 그 해의 최고 멋진 골을 ‘골든볼’이라고 상을 줬어요. 멋진 골을 뽑아서 국민들이 투표를 하고 뽑히면 상을 받죠. 제가 그 해에 골든볼로 뽑혔어요. 럭키금성(현 FC서울)가 경기를 했는데 그때 용병이었던 호샤가 띄어준 볼을 골 에어리어에서 왼발슈팅을 했는데 일명 바나나킥으로 볼이 휘어져 들어간 거예요. 그 골이 그해 골든볼이 됐어요.”
“그 외에도 많은 골을 만들어 냈는데 86년 유공(현 제주)이랑 경기를 했는데 지금 없어진 서울운동장에서 게임을 했죠. 골키퍼가 킥한 걸 제가 잡아서 바로 슈팅을 연결했는데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 골도 참 기억에 남아요.”
그러나 잘나가던 그에게도 슬럼프는 있었다. 하지만 더 잘할 수 있다는 마음을 믿었기에 슬럼프라 논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스쳐지나가는 바람이랄까.
“하지만 86년도에 월드컵예선전을 치르느라 게임을 많이 뛰지 못했어요. 공격 포인트도 올리지 못했고, 스스로 참 힘든 시기였어요. 시즌이 끝나고 방출대상자에 제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어요. 몸값도 많이 떨어졌고, 힘들었어요.”
“87년 킹스컵대회(2월)에서 자신감을 얻게 되었어요. 꿋꿋이 이겨내고 열심히 했어요. 동계훈련을 통해 단점으로 지적된 개인플레이랑 문전처리부분을 보완했고, 욕심도 버리고 침착하게 경기운영을 하는 자제력을 기르는데 힘을 썼죠.”
약점을 극복하고 그는 욕심이 있었다. 스트라이커로 최고의 자리에 팀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힘을 내어 그라운드를 질주했다.
“포항에서 줄곧 포워드만 봤어요. 지금은 윙 포워드라는 포지션인데 예전에는 스트라이커라고 했어요. 축구를 하는 25년 동안 줄곧 그 자리만 봤으니 도가 터인 셈이죠.(웃음) 운이 좋았는지 크게 다쳐본 적은 없어요. 남들은 크게 다쳐 공백 기간을 두곤 하는데 저 같은 경우 그런 게 없어요. 자기관리를 잘해야 했다고 하나 제 스스로 운이 참 좋은 선수 였어요.” 부상을 피하는 것도 능력이다. 그는 분명 운도 좋고 능력도 있는 선수였다.
▲올 시즌 기대해도 좋다. 대학 U-리그 개막을 얼마 두지 않고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호원대 선수단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 ksport
태극마크를 가슴에 다는 순간을 기억하면 짜릿함이 온몸에 전율을 감싼다. 1987년 제8회 아시안 컵 명단에 ‘최상국’이라는 이름이 당당히 올라갔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이 대회는 2무 2패라는 성적으로 쓴맛을 봤다. 하지만 그때는 개인적으로 배운 게 더 많았다.
“87년 아시안 컵 명단에 제 이름이 올랐어요. 굉장히 영광이었죠. 예전에는 학연이 많이 따랐기 때문에 제가 대표 팀에 뽑힌다는 게 신기했어요. 시골학교에서 갓 올라와 포항제철에서 게임을 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는데 대표 팀에 들어갔다는 건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그때 선배님들이 쟁쟁했어요. 박창선, 허정무, 이강조 등 대선배님들과 함께 볼을 찬다는 게 얼마나 영광이에요. 대표팀에서 이들 선배들과 함께 한다는 현실이 저에게 꿈만 같은 이야기였어요.”
“대표팀에서 해외선수들과 겨루면서 많은 차이를 느꼈어요. 텔레비전에서만 보다가 직접 부딪혀보니까 정말 많은 차이도 느끼고 부족함도 많이 느끼게 됐죠. 한국축구가 많이 발전되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많이 발전을 해야겠다고 많이 느끼게 되었죠.”
87년 대통령배에서 미국을 상대한 한국, 1대0의 승리에 그의 이름이 올라왔다. 결승골을 넣은 이가 바로 최상국 이었다.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며 뿌듯해하는 모습이었다.
“87년 대통령배에서 미국이랑 경기였을 듯싶어요. 제 기억에 좋은 골을 넣은 것 같아요. 저희가 역습을 당하다가 정해원이 인터셉트해 볼을 걷어냈는데 제가 상대진영으로 돌아서면서 때린 볼이 그대로 골 문안으로 들어갔어요. 35M정도 되는 중거리슈팅이었는데 지금도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멋지게 들어갔거든요.”
그때를 회상하며 20년을 훌쩍 넘긴 지금에도 태극마크의 짜릿함을 잊을 수 없다.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나가 골을 넣었다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겨진다. 그런 자신감으로 앞을 내다보고 달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행복의 정상에 도달했다.
최상국에 있어 87년은 잊지를 못한다. 그에게 축구선수생활중 최고의 한해였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해로 돌아가고 싶다. 그해의 경기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87년 럭키금성과 했던 경기가 기억에 남아요.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했던 경기였는데 저희가 이겼으면 우승권에 들어가는 경기였어요. 그런데 럭키금성(현 FC서울)에게 발목을 잡히는 바람에 우리는 좌절하고 대우(현 부산 아이파크)는 우승을 했어요. 비록 졌지만 긴박했던 그 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지나온 많은 순간이 하나의 필름처럼 기억을 스쳐가지만 그에게 최고의 기억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축구계 역사를 썼던 그때이다. 득점와과 도움왕을 동시에 석권했던 87년의 그 해.
“여러 장면이 기억에 스쳐지나가지만 87년에 득점왕과 도움왕을 동시에 석권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운 좋게 제가 그런 영광을 누렸고, 그때가 제일 좋은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는 1987년 시즌에서 15골을 뽑아내 2위인 노수진(유공), 이흥실(포철)을 3골 차로 따돌리며 최고 골잡이의 자리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어시스트부분에서도 8개로 1위를 마크함으로써 87년 프로축구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정상이 우뚝 섰다.
지도자로 생긴 꿈, 교수의 꿈 마침내 이뤘다.
1991년 그는 선수의 길을 그만뒀다. 은퇴를 생각지도 않았고 더 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감독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고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떠밀려 은퇴를 결심했다.
“감독님한테 인정을 받지 못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은퇴를 결심하게 됐죠.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면 사라지는 스타가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때는 인정받지 못하면 그만둔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미련 없이 은퇴를 했어요. 구단에서는 지도자로 남길 원했는데 지도자는 하기 싫어서 나왔어요. 교수의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자를 하지 않으려고 했죠. 그런데 현재 지도자를 하고 있어요.(웃음) 지도자를 하면서도 교수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는데 마침내 지난 3월초 호원대학교 교수로 정식 임명장을 수여 받았어요.”
“지도자 입문은 제가 1년을 다녔던 청주대학교에서 시작했어요. 92년부터 2003년까지 10년 정도를 그곳에서 보냈죠.”
그리고 그는 청주대학교에서의 10년의 지도자 생활을 접고 새로운 곳에서 둥지를 텄다. 포항에 있을 적 선배와 연결되어 첫 창단하게 된 호원대학교에 창단 감독으로 오게 됐다. 올해로 9년째인데 그동안 열정적으로 팀을 이끌었다. 그의 새로운 도전은 좋은 성적으로 보답해 왔다.
그는 그동안 지도자로서 받은 고충에 대해 털어 놓았다.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 받는 스트레스가 많다. 지도자들은 ‘선수일 때가 좋았어’ 라는 말을 자주 한다. 제자들을 가르치다보니까 힘든 점이 많아요. 선수였을 때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지도자가 되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선수생활이 좋다는 이유가 그런 얘기인 것 같아요.”
그는 지도자로서 받는 힘든 점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그 말속에서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한없이 아끼는 제자들이다. 모두가 잘 되길 바라지만 그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요즘 지능적인 축구를 하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지능을 어디까지 발전시켜야 하는 건지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아이들에게 바라는 부분이지만 아이들 머리가 한계가 있는데 어떻게 지능적으로 하라고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 같은 경우 ‘네가 머리를 쓸 줄 알아야만 축구를 더 잘할 수 있다’라고 말은 해요. 하지만 내가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모르는 게 많은데 더 이상을 바란다면 내가 잘못된 지도자가 되는 거예요. 전 그런 점이 가장 힘들어요.”
제자들에게 바라지만 그들이 따라주지 못하는 점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지도자로서 어쩔 수 없이 계속 바랄 수밖에 없다.
▲오랜 숙원이었던 자신의 꿈인 대학교수에 취임한 최상국 감독, 그가 앞으로 펼쳐 나갈 대학강단의 모습이 기대된다. ⓒ ksport
“지도자의 마음으로 축구를 본다면 대학교를 지도하는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요. 그렇게 본다면 많이 평등화가 돼서 선수들에게 기회가 많이 열린 것 같아요. 예전에는 학연위주로 모이다 보니까 수도권의 소위 잘나가는 학교를 나와야 좋은 선수가 된다고 할 정도였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는 것 같아요. 요즘 선수들이 나온 학교를 봐도 그래요. 정말 지방학교를 나와서도 잘하는 선수가 얼마나 많아요. 이제는 조금 부족한 학교를 가더라도 자기 스스로만 잘하면 더 좋은 길이 열리게 되어있어요.”
“하지만 길은 많이 열려 있어도 본인이 그 길을 가지 않으려 하는 걸 보면 잘못되지 않았나 싶어요. 요즘 아이들은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대학에 와서 60%는 축구를 그만둬요. ‘축구를 그만두면 할 일이 있느냐. 안 좋은 곳에 고생하면서 알바 할 바에 여기서 끝까지 해봐라’라고 하지만 마음이 이미 떠나버렸더라고요. 여기에는 미련이 없다고 가버리는데 그게 잘못 된 줄 알면서도 붙잡기가 참 힘들어요.”
“그런데 잘된 아이들은 꼭 잘되고, 못된 아이들은 아주 못되는 것 같아요. 잘된 사람이 있으면 못된 사람이 있는 게 마련이지만 정말 앞길이 보이는 잘하는 제자들이 관둘 때는 마음이 아파요. 누구든지 길은 다 있고, 가능성도 다 있는데 그걸 버티지 못하고 관두고 가버려요. 대화로 다 잡으려 하지만 대화자체가 안 되서 많이 힘들죠.”
제자들에게 크게 바라는 건 없다. 단지 축구를 하는 자식들이 나쁜 길을 가지 않길 원하듯 자식 같은 제자들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축구를 그만두는 게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어린나이에 빨리 포기해버리면 그다음에 어떤 어려움이 닥칠 때 견디지 않고 또 다시 포기하게 될 제자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버지 같은 마음이다.
그는 한국축구에 바란다. 자신의 제자들만 봐달라는 게 아니다. 시합을 치르면서 우리 편. 상대편에 참 좋은 선수들을 발견한다. 그 선수들이 발굴되어 잘 배운다면 한국축구를 짊어지고 갈 재목으로 손색이 없다고 했다.
“좋은 선수를 많이 배출해야 해요. 제자들이 잘될 수 있게끔 많은 지도자들이 잘 가르쳐야 하고 저 역시 훌륭한 제자를 배출하는 데 힘써야겠죠. 우리 지도자들이 더 많은 한국축구 발전을 위해 계기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많은 의견을 나누고 새로운 움직임이 필요할 때인 것 같아요.”
그의 좌우명은 至誠開途(지성개도-지극한 정성을 쏟으면 길이 열린다)이다. 그는 지극정성으로 이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맛 본 최고의 순간들을 제자들에게 맛보여 주고 싶어 한다. 그의 지극한 정성은 곧 제자들의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앞으로 교수, 지도자로서 빛을 발할 그의 모습을 기대해 보자. 그리고 그의 좌우명처럼 한국축구도 지극정성을 쏟으면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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