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宅
/윤행원
집은 낡을 대로 낡았고 허물어져 있다.
방안에 있는 달력을 보니 1991년이다. 12년을 사람이 살지 않고 방치(放置) 했다는 증거다.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옛 집이다. 우리 가족이 새로 집을 짓고 약 15년간 거처했던 곳이다. 지금은 이 집을 떠난 지 40년도 더 된다.
그 후 같은 동네에 살던 딴 사람이 이 집에서 한동안 살다가 모두들 서울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자식들이 서울에서 다들 잘 살고 있어서 집을 팔 이유는 없고, 어느 날 여기다 새로 집을 지어 老年에 한적한 農村生活을 즐기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이 집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팔지를 않고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옛날의 아련한 추억 속에 잠긴다. 대문 밖에 바로 붙어 있는 남새밭을 합쳐 약 160평의 옛날 우리 가족이 꿈을 키우며 평화스럽게 살았던 정든 집. 어릴 때는 그렇게도 크고 넓기만 했던 집이었는데 지금 자세히 보니 내 덩치가 커서 그런지 마치 소꿉놀이 집 같은 아늑하고 조그마한 방들이다.
어머님과 어린 형제들이 거처했던 큰 방은 나지막한 천장에다 사각형의 조그마한 방이다. 할머니가 홍시를 꽁꽁 숨겨놓고 이따금 손자들에게 꺼내 주시던 나무선반은 간 곳 없고, 20촉짜리 형광등이 초라하게 걸쳐 있다. 추석이나 설 명절이면 큰방에 차례 상을 차려놓고 방안에선 모자라 마루에 일렬로 서고, 그래도 모자라 마당에 덕석을 깔아놓고 온 일가친척이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
큰방을 지나 옆문으로 들어가면 할머니가 거처하시던 쪽방엔 헌 가구 허접쓰래기만 널려있다. 이 방에서 만년의 할머니는 오랫동안 병환이셨는데 누나가 정성껏 할머니 병 수발을 했다.
동생들이 태어났던 작은 방. 문짝은 낡아 문틀만 앙상하고 바깥 아궁이 위에 있는 문은 망가지고 지붕은 헐어서 하늘이 삐꿈이 보인다. 어머님이 동생들을 해산(解産) 하실 땐 이방을 사용 하셨고, 큰 형님 첫째 딸도 이방에서 순산(順産)했다. 큰형수 시집와서 첫날밤도 이 방에서 치렀다. 여름엔 참으로 시원하기도 했던 방이었다. 혼자 서성거리고 있노라니 만감(萬感)이 스쳐 지나간다.
마당 건너 아버지가 거처하시던 사랑방. 거기서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양약(洋藥)을 파셨고 밤이면 거기서 주무셨다. 아스피린이나 다이야징을 주로 많이 팔았는데 약 효험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먼 동네에서도 약을 사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문다지 사이를 둔 바로 옆방은 우리 어린 자식들이 쓰던 공부방 겸 놀이 방이었다.
큰 형님이 군대에 있으면서 가지고 온 철 침대가 스프링이 하도 좋아서 우리들은 침대 위에서 껑충껑충 뛰면서 장난을 쳤다. 특히 태묵이와 대용이 친구와 이 방에서 잘 놀았는데 심하게 장난을 칠 땐 아버지는 미닫이를 살며시 여시고는 "이노옴 들" 하고 주의를 주시기도 하셨다.
중학 일 학년 때 나는 이 방에서 사촌 형님과 한자공부 시합을 하기도 했다. 일주일 동안 공부해서 한 자라도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이기기로 한 게임이었다. 지지 않는 성미는 그때도 있었던지 죽자 살자 공부한 덕분에(물론 그前에 배운 것도 있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일주일 만에 千字文에서 470 여字를 써내어서 지지부진했던 사촌 형님을 단연 앞서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사랑방에서 대문 쪽으로 쪽마루가 있었는데 한 귀퉁이엔 오줌을 받아 놓는 커다란 항아리가 있었고 우리들은 쪽마루 끝에서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누곤 했었다. 그때는 비료가 귀했고 인분과 오줌이 중요한 거름이었다. 오줌 한 방울을 참으로 소중히 받아 두든 시절이었다. 사랑채 가운데는 소 외양간이 있었고 그 옆엔 우리들 방을 따뜻하게 하는 아궁이가 있었다. 작은 형님은 여기서 소여물을 끓이면서도 열심히 漢字 工夫를 했다. 천자문도 이 아궁이에서 공부했고 명심보감도 소여물을 끓이면서 외웠다.
그때 작은 형님은 우리 집에선 큰 일꾼이었다. 산에 가서 나무도 (어떤 땐) 두어짐씩 해다 날랐고 5일마다 서는 장날에는 나무 짐을 팔아 집안 용돈을 보태기도 했다. 그때 작은 형님의 별명이 '아코'라고 했다. 매우 부지런한 일꾼이란 뜻이란다.
외양간 옆엔 화장실이 있었는데 한쪽 벽이 없는 난장에다 앞에는 가마니로 가리개를 해 두었는데 겨울에 일을 볼 때는 엉덩이가 어지간히 추웠다. 바로 위 시렁에 할머니 관(棺)을 미리 짜서 얹어 놓았는데 어린 나는 통시(화장실) 갈 때마다 무서워했다.
나는 그 옛날 오순도순 정답게 살았던 우리 집 고가(古家)를 지금 보고 있다.
山川은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간 곳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옛 집에 돌아 왔건만 아름다운 옛날로 다시 돌아 갈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이 나를 슬프게 한다. 어머니 아버지가 너무나 그리워진다. 가슴 한편에선 맵싸한 추억의 아픔이 아련하게 몰려온다.
평화롭고 아름답게 살았던 옛날의 회상(回想)에 가슴 시리게 눈물이 난다. 어쩌지 못하는 세월의 허망함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이른 새벽이면 사랑방에서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우리 가족들의 기상신호(起床信號) 이기도 했다.
그러면 모두들 일어나서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각자 제 할 일을 시작했다. 나는 아무리 추워도 개똥망태를 둘러메고 밤 새 동내골목에 싸 놓은 꽁꽁 얼어붙은 개똥을 주서다 망태에다 담아 우리 집 화장실 똥통에다 쓸어 넣어 거름을 보태곤 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음식 만들기에 바빴고 누나는 어린 동생들을 옆 겨드랑이로 붙들고 미지근한 물로 얼굴을 씻기면서 코를 힝힝 풀게 했다. 작은형은 땔감나무 하러 갈 준비를 했다. 연장을 갈기도 했고 쇠죽을 끓이기도 했다.
그때는 어린 동생들이 올망졸망 했지만 안 싸우고 자기들끼리 잘 놀아 주기만 하면 고마웠다. 아침을 마치고 나면 아버지는 밭으로 가시거나 논으로 일 하러 나가시곤 했다. 참으로 아늑하고 평화로운 시절이었다.
아침 밥상은 아버지는 독상(獨床)을 차려 주셨다. 우리들은 보리밥을 먹었지만 아버지의 밥그릇은 쌀이 반쯤은 섞인 밥이었다. 우리들은 아버지가 남긴 밥 한 숟가락 먹고 싶어 아버지 상 물릴 때까지 뭉그적거리기도 했다. 계란도 아버지 상에만 올랐는데 가끔 아버지가 찐 계란을 조금 주시면 게 눈 감추듯 번개같이 (꿀맛같이) 삼켜 버렸다.
할머니 방 바깥 쪽 문을 열면 포도나무가 한 그루가 있었는데 여름이면 무성한 포도넝쿨 밑에서 깔아 놓은 대나무 평상(平床)위에 앉아서 온 가족이 수박이랑 참외도 먹곤 했다. 초가을쯤엔 달디 단 포도송이가 탐스러웠다.
그 옆에 농기구(農器具)를 두는 헛간이 있었고 가운데 칸에는 돼지를 키웠다. 그리고 그 옆에는 땔나무를 태우고 남은 재를 아궁이에서 꺼내 모아두는 잿간이 있었는데 어떤 땐 아직도 남은 불 씨앗이 벌겋게 달아 있기도 했다.
문 밖 남새밭 귀퉁이엔 맑은 물이 가득한 샘이 있었고, 그 옆에는 향나무 한 그루가 아담하고 토실토실하게 자라고 있었다. 남새밭엔 가지랑 고추 그리고 배추를 심었고, 집 담 밑엔 호박을 심어 가을이면 담이랑 그리고 초가(草家)지붕 위에 널려있는 누렇고 커다란 호박덩어리가 볼만했다.
사과나무도 한 그루 심었는데 그 땐 농약 쓸 생각은 엄두에도 없었고 나무 밑 근처에 인분을 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정성을 바쳐도 사과 열매는 볼품이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남새밭 옆 십 미터쯤 되는 길가에는 감나무가 두 그루 있었는데 가을이면 감이 빨갛게 주렁주렁 메 달려 있는 게 시골의 정취를 한껏 보태기도 했다.
나는 그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되씹으면서 집 이곳저곳을 한동안 서성거렸다.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다. 지나 온 세월을 물릴 수가 있어 어머니 아버지와 어린 형제들과 도란도란 정겹게 살았든 평화로운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름답고 꿈결 같은 어릴 때의 그리움에 가슴이 매인다.
한국수필 등단작품 (2004년 1,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