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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마 16:21-28)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완성할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어봤습니다(마 16:15). 이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마 16:16).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전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했지만, 이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조금 전,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사람의 일을 생각함으로 책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으로, 책망과 꾸중보다는 항상 주님의 칭찬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칭찬받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4절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오늘은 “오직 예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직 예수”를 바라보고, 주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로마서 14: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진 것도,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님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합니다. 내 욕심, 내 교만, 내 체면, 나만 생각합니다. 사람의 영광을 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저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먼저,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봄으로,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자기의 뜻대로 사신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사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지고 싶은 것도 많지만, 주님을 위하여,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과장된 쇼맨십, 풍부한 관현악 음향, 고전음악의 대중화에 대한 공헌으로 유명한 “레오폴드 스토코우스키”(1882-1972)라는 지휘자가 관현악단을 이끌고 많은 청중들 앞에서 “베토벤”의 “서곡”을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곡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 트럼펫 연주자를 청중석에 미리 앉혀놓고, 사인을 보내면, 갑자기 일어나서, 솔로로 연주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지휘자가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청중석을 향해서 지휘봉을 휘둘렀습니다. 이제 트럼펫 연주자가 갑자기 일어나서, 연주를 해서 청중들을 감동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트럼펫 연주자가 트럼펫을 불지 않았습니다. 청중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휘자는 다시 청중석을 향해서 지휘봉을 휘둘렀습니다.
그래도 트럼펫을 불지 않았습니다. 청중들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원인을 알고 보니까, 트럼펫 연주자가 갑자기 일어나서 연주를 하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경비원이 연주를 방해하는 자인 줄 알고, 붙잡아서 주저앉혔습니다. 그러면서 경비원은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한 사람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트럼펫 연주자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자신이야 말로, 이 연주회를 망친 장본인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우리는 때로 대단한 일을 하는 줄 알고 이렇게 의기양양할 때가 있습니다. 참 우스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는 길을 막아서며, “안 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하면서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큰일을 한 것처럼 당당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뜻을 막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막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뜻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55: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책망을 받지 않으려면, 주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이 너무 심해서, 목숨을 구하고자, 로마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를 등지고 도망가고 있는데, 예수님이 로마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놀라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쿼바디스 도미네!)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네가 버린 로마로 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고백했습니다. “주여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다시 가겠습니다.”
베드로는 로마로 다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에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로마서 8:5-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간에, 먼저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는 사람은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먼저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지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육신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육신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오직 예수”를 생각하며, 주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육신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골로새서 3:2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위의 것은 무엇이고, 땅의 것은 무엇입니까?
위의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요, 땅의 것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과 자기를 생각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땅의 것이 아니라, 먼저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생각하고,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나, 자기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직 예수”를 바라보고, 주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14: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 자기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은 자기가 감당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모습으로 산다 할지라도, 십자가를 외면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자신이 받은 사명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아름다운 공원을 찾아가서, 멋진 단풍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펼쳐놓고 잔뜩 준비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어릴 적 소풍가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는 것처럼 힘들고, 어렵고, 희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십자가를 피한다면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밖으로 도망쳐도 거기 십자가가 있고, 안으로 숨어도 거기 십자가를 볼 것이다. 위로 올라가도 십자가가 기다리고, 밑으로 파고들어도 십자가가 있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의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힘들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글로 남겼습니다.
찬송가 158장은 주기철 목사님이 작사한 곡입니다.
서쪽하늘 붉은 노을 언덕위에 비치누나 연약하신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 쓴 가시관과 몸에 걸친 붉은 옷에 피흘리며 걸어가신 영문밖의 길이라네
2. 한발자국 두발자국 걸어가는 자국마다 땀과 눈물 붉은피가 가득하게 고였구나
간악하다 유대인들 포악하다 로마병정 걸음마다 자국마다 갖은 곤욕 보셨도다
3.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없이는 못가는 길 영문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의 복 얻으려면 이 길만을 걸어야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4. 아픈 다리 싸매주고 저는 다리 고쳐주고 보지 못한 눈을 열어 영생길을 보여주니
온갖 고통 다하여도 제 십자가 바로 지고 골고다의 높은 고개 나도 가게 하옵소서
찬송가 158장에는 4절까지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글입니다.
십자가에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가오랴
주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먼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소금 인형이 하나 있었습니다. 소금 인형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바닷가를 가게 되었습니다. 넓은 바다를 보고 기뻤습니다. 파도가 밀려왔습니다. 바다가 말했습니다.
“너는 누구니?” “나는 소금인형”
“넌 누구니?” “나는 바다”
“야 되게 좋네, 나 너랑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지?”
바다가 말했습니다. “이리 들어와”
망설이던 소금 인형은 바닷가로 뛰어들었습니다. 바다가 소금 인형에게 물었습니다.
“넌 누구니?” “난 바다야” 소금 인형은 소금이 아니라 바다가 되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주님과 하나가 되어, 주님이 가신 길을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주님과 하나가 되어, 주님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날마다, “오직 예수”를 생각함으로, 끝까지 믿음의 길을 달려갈 때에, 주님과 하나되어, 생명과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주님과 하나가 되어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고자 합니다.
날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