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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8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12주)
잔치에 초대받을 때와 잔치에 초대할 때
렘2:4~13; 히13:1~8, 15~16; 눅14:1, 7~11
오늘 예레미야서 말씀은 주전 7세기 말엽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씀입니다. 이 주전 7세기라는 상황은 유다에게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기울어지고 있던 유다가 곧 바빌로니아에 멸망하고 마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렇게 유다가 망해 가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던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을 자신의 아픔처럼 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다가 망하지 않도록 애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빨리 망해야 한다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갖 고난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그에게 붙여진 별칭이 “눈물의 예언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약소국이라서 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 마음속에 있는 선함,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자비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망한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신탁을 빌어 말하기를, 본디 이스라엘은 거룩하게 구별된 나의(하나님) 수확의 첫 열매였는데, 그래서 너희를 그 기름진 땅으로 인도하여 가장 좋은 것을 먹게 하였는데, 너희들은 내 땅에 들어오자마자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것을 부정하게 만들었다고 질타합니다. 제사장은 주님을 찾지 않았고, 율사들은 나를 알지 못하고, 통치자들은 나에게 맞서 범죄하며, 예언자들은 도움도 주지 못하는 우상들만 쫓아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한 일을 한번 잘 살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늘도 이것을 보고 놀라고 떨다가 새파랗게 질려 버리고 말 것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한 일이 그 정도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예레미야는 그 유명한 말씀을 전하지요.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으로 샘을 삼은 것! 이것이 유다의 멸망의 이유였습니다. 지지난 주일에 본 요하네스 타울러의 말에 의하면, 외부에서 들어온 저수통, 들어온 대로 다시 빠지는 저수통에 의존하고 있으면서 근본 바탕에서 스미어 흘러나오는 샘물은 완전히 도외시하고 틀어막아버린 것이지요.
여러분, 이스라엘의 남북 왕조에는 주전 8세기부터 이런 식으로 말하는 예언자들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아모스를 필두로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이 이런 예언자들입니다. 모두 15명입니다. 이런 예언자들은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오늘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기만과 부정과 거짓을 폭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돌이키라고 외쳤습니다. 이 “돌이키라”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슈브>라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이 사람들을 “슈브의 예언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구약성경 예언서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칼 야스퍼스가 말한, “축의 시대”(Axial Age)라는 말이 있지요. 이 시기는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의 시기로, 인류의 정신적 발전에서 위대한 변환점이 되었던 시기를 말합니다. 놀랍게도 이 시기는 세계의 여러 곳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약육강식의 세계, 폭력적인 힘의 논리만이 지배하던 세계,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였던 세계에, 갑자기 인간의 내면의 등불을 밝히는 위대한 영적 철학적 천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사상적 영적 수원지로 삼는 모든 것들이 이 시대에 등장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한 마디로 인간 내면으로 돌아가기, 인간의 본디 선한 본성을 깨닫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 인도에서는 붓다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중국에서는 노자, 공자, 맹자가,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의 신비가들이, 중동에서는 예레미야와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각자의 내면으로 들어가라고, 그 내면에 켜진 등불을 발견하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에만 진정 자신들 앞에 놓여 있는 현실 속에서 거센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참된 자비를 실천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인간답게 된다고 설파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황금율, 동정심, 사랑, 환대가 인류의 가슴 속에 숨어 있던 본성임을 드러냈습니다. 물론 당시의 대중들이 그렇게 살았다는 말이 아니라 몇몇의 현인들과 예언자들이 그것을 선포했다는 말입니다. 가령, 호세아가 선포하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하나님 알기를 더 바란다”(호6:6)고 설파했을 때, 겉으로 보여지고 형식적으로 행해지는 피의 제사보다 각자의 내면 속에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의 더 중요한 핵심임을 말해줍니다. 거의 이천 육칠백년 전에 이런 전세계적으로 일어난 위대한 전환은 지금도 참으로 놀랍고 우리에게 빛을 밝혀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되지 않아 팔레스틴에서 활동하신 예수님을 통해 위대한 전환의 정수를 만나게 되지요.)
오늘 예레미야가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리고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으로 샘을 삼았다고 탄식하는 것도, “너희가 바치는 온갖 번제물도 싫고 온갖 희생제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렘6:20)라며, “나의 딸, 나의 백성아, 너는 굵은 베옷을 허리에 두르고, 잿더미 속에서 뒹굴어라. 외아들을 잃은 어미처럼 통곡하고 슬피 부르짖어라”(렘6:26) 외쳤던 것도, 각자 자신의 내면 안에 있는 하나님께로 겸손히 돌아가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내면으로 겸손히 돌아가는 것이 나라가 망하는가 아닌가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고, 아니, 나라가 망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외침이었습니다. 각자 안에 있는 하나님께로 돌아가 진실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일시적 “절망”이라는 진실이어도 말입니다.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글을 한번 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처형을 당할 뻔했다. (왜요? 유다는 망한다, 망해야 한다고 외치고 다녔으니까요. 그래서 한 동안 관저 구치소와 근위대 뜰 안에 갇혀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석방된 뒤에도 계속 도시를 돌아다니며 무시무시한 신탁을 내놓았다. 그의 이름은 과장된 비관주의의 대명사가 되었지만(그는 늘 망한다, 망하는 것을 피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는 옳았다.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용기 있는 태도는 축의 시대의 핵심 원리 가운데 하나를 표현했다. 즉 사람들이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겁이 난다 해도, 모래에 머리를 박고 진실을 마주하기를 거부한다면 영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예레미야의 예언, “너희가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리고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으로 샘을 삼았다”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지금도 우리를 모골이 송연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바리새파 사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의 집에 음식을 잡수시러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뭘 하시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 말의 더 직접적인 의미는 엿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때 예수님도 지켜보고 계시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초청받은 사람들의 태도, 모습, 행동거지였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율법교사나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팔레스틴의 결혼잔치 풍습에, 결혼잔치에 초대되어 가면, 남자손님들은 각자의 자리에 비스듬히 앉게 되는데, 중앙의 자리에 부와 권력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앉는 명예스러운 자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와 권력과 지위에 따라 앉는 자리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이때도 식사초대를 받은 이들이 서로 높은 자리(중앙의 자리)에 앉으려고 눈에 보이지 않는 눈치 싸움, 그야말로 집단 역동을 벌어지는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간파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은 비유를 하나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에 초대받거든 선뜻 높은 자리(중앙의 자리)에 앉았다가 변두리로 쫓겨나는 망신을 당하지 말아라. 오히려 맨 끝 자리(변두리의 자리)에 앉으면 초청한 사람이 너를 높은 자리로 올릴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라고 결론짓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비유라기보다는 잠언에 자주 나오는 교만하지 말라는 금언이나 권고 같습니다. 가령 잠언 같은 데 보면 이런 권고가 많이 나오지요.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높은 사람의 자리에 끼어들지 말아라. 너의 눈 앞에 있는 높은 관리들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을 듣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잠언 25:6~7)라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가 구태여 이것을 “비유”라고 말하면서, “혼인잔치”를 언급한 것은 이 말씀이 단지 교만하지 말라는 현세적인 권고를 넘어 우리에게 비유의 어떤 핵심을 전해주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늘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의 어떤 모습 혹은 본질을 전해주시려는 것이지요. “혼인잔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실 때 많이 사용되던 소재였지요.
그러니까 오늘의 이 비유는 실제로 어떤 잔치나 모임에 가서 괜히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끝자리로 내려앉는 창피를 당하지 말아라, 너희가 짐짓 맨 끝 자리에 앉아 있으면(곧 닥칠 역전이나 보상을 바라면서, 이 위선을 한번 잘 보십시오) 누군가가 너를 높은 자리에 앉게 할 것이라는 처세술을 말해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는 이런 곳이다, 라는 것을 전해주려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본다면, 초대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 자신이겠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초대되어 간 곳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혼인잔치입니다. 이 잔치는 종말론적인 기쁨이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 자리에서 초대받은 손님들의 등급을 매길 최종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신이 가진 것이 많은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가장 낮은 사람이 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난함을 인정하고 참된 겸손에 이른 사람은 높은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자주 등장하듯이, 하나님 나라는 이런 역전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두 번 놀란다고 하지요. 분명히 와야 할 사람인데 오지 않아서 놀라고, 분명히 오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어서 놀란다는 겁니다. 우수개 소리겠지만, 이 말이 주는 의미는 하나님 나라는 매우 은밀하며(사람이 겉으로 봐서는 모른다는 것이죠), 사람이 판단하는 자리가 아닌,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자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가장 깊은 속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판단이 중요한 겁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심기를 이리저리 살피며 눈치 보면서 하나님을 회유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것초차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하늘나라의 일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가난함을 인정하고 참된 겸손에 이른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생수의 근원을 제대로 발견하고, 비록 조금씩 스미어 나오는 샘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삶의 원천으로 삼는 사람이지요. 반대로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했던 사람은 물이 전혀 고이지 않는 웅덩이를 스스로 파고 그것을 자신의 샘으로 삼은 사람이겠지요.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만든 저수통의 크기만이 관심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늘 끊임없이 자신의 저수통을 남들 것과 비교하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두 번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말씀은 잔치를 열고 초대한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식사자리를 마련한다면, 네 친구나 형제들이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말아라. 그러면 그들도 너를 초대할 것이고, 그러면서 너희는 서로 공덕을 주고받아 아무 것도 남은 것은 없게 된다. 오히려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사람들,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그들은 너를 초대할 수가 없기 때문에 네가 베푼 대접은 네 중심에 숨어계시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자비로운 초대가 될 것이고, 그 모든 것을 마지막 날 숨어계신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는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의 나라가 아니며, 잘난 사람, 부자들이 자신들의 성공과 기쁨에 서로 취하는 가진 자만의 잔치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부족한 사람, 못난 사람, 가진 것 없는 사람, 약한 사람이 초대되는 자리가 될 것을 암시합니다. 이 구절은 바로 뒤에 나오는 큰 잔치의 비유(눅14:15~24)에서, 대부분의 초대자들이 잔치에 오기를 거부하자 잔치를 준비한 사람이 마지막에 가서, 종들에 하는 말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눅14:21)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열릴까요? 우리의 잘난 것들, 우리의 자랑거리들, 우리의 성취, 우리의 소유를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가장 연약함, 장애들, 결핍, 가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겸손이 주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앞의 비유나 뒤의 이야기가 모두 한 가지로 수렴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가난함을 인정하고 참된 겸손에 이른 사람이 가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가난과 약함을 초대하여 함께 해야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참된 겸손(humilitas)이란, 우리가 흙에서 온 존재임을, 우리가 땅에 밀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땅에서 벗어날 없다는 사실을, 우리의 어두운 면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하나님께서 깊이 사랑하고 계심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나약함, 자신이 흙에서 온 육체라는 것, 자신의 인간성, 자신의 어두운 면들을 받아들일, 초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와 어둠을 그대로 숨겨두고 억압한 채, 밖에서는 그것을 가리고 포장하기 위해 거짓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와 어둠, 부끄러움, 자신의 안에 있는 쓰레기들을 그대로 자신의 것을 받아들이고,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그림자와의 화해이며, 자신의 경험과 기억과 과거와의 화해가 됩니다. 이 화해가 열리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약한 자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소수자들을 우리의 생각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들을 향해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잔치는, 바로 자신의 가난함과 부족함과 약함을 편안하게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하나님께서 그런 자신을 깊이 사랑하신다는, 참된 겸손에 이른 사람을 위해 준비된 잔치입니다. 그런 겸손의 사람은 자기비난이나 부끄러움, 분노, 낙심으로 휩싸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편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확신을 갖는 것, 이 두 가지가 자신 안에서 균형 있게 받아들여지는 사람입니다.
이제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신선한 바람과 투명한 햇살을 만나게 될 가을을 맞게 됩니다. 이때 주님의 은총을 힘입고 우리도 우리의 여름내 지니고 왔던 여러 가지 무거움을 내려놓고 좀 더 가볍고 투명하게 걸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조금 더 온화하게, 자비롭게 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물이 새는 웅덩이를 스스로 파서 그것으로 우리의 샘을 삼지 않게 하시고, 주님을 우리 생수의 근원으로 삼을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우리가 만들어가느라 더욱 무거워지지 않게 하시고 가볍고 온화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중보기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