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하 5
3. 사울의 보좌를 계승하는 다윗(5장)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를 7년 반 동안 다스렸다. 이제 그는 33년 동안 전체 민족을 다스리게 되었으며, 총 40년 이상을 통치한다. 다윗은 세 번 기름부음을 받았다. 사무엘이 베들레헴 집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주었고, 유다 사람들이 헤브론에서 기름을 부었었다(2:4). 하나님께서 다윗의 모든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그에게 평화를 주신 후에 다윗이 부른 승리의 노래를 시편 18편에서 찾아 보자. 이 시는 괴로움 가운데 있을 때 읽으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이끌어내어 더욱 큰 축복으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물론 다윗은 시련이 많은 것을 즐거워하지는 않았으나 뒤를 돌아보며 그것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
왕은 이제 예루살렘을 수도로 택하였다. 이 요새는 이전에 점령당한 일이 없었고(수 15:63/ 삿 1:21) 여부스 사람들은 오만하여 다윗이 공격하는 것을 무시하였다.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고 그들은 조롱하였다. 그러나, 다윗과 신하들은 이 조롱을 패전의 외침으로 갚아 주었다. 역대상 11장 5-8절은 하나님께서 성문을 여는 데에 충성된 요압을 사용하셨음을 말해 준다. 어떤 이들은 다윗의 신하들이 수로를 통하여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성에 기어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고고학자들은 그 당시에는 수로가 설치되지 않았었다고 주장한다. 본문에서 볼 때는 입성하는 방법으로 수로를 사용한 것이 분명하며, 요압이 왕의 능숙한 계획을 수행한 듯하다.
다윗이 자신의 성을 건설하자마자 옛 원수 블레셋이 돌아왔다! 우리의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이것은 진리이다. 사단은 “승리 후의 소강 상태“를 이용하여 다시 우리를 공격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다윗은 여호와의 뜻이 승리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즉각적으로 하나님과 상의하였다. 두번째 공격은 첫번째 공격과 다른 것에 유의하자(22-25절). 다윗은 또다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만큼 충분히 지혜로웠음에 대해서도 주목하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으로 그를 인도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복사“하지 않도록 돌보아야 한다. 새로운 결정을 주시도록 새롭게 구해야 한다.
물론 다윗이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활 전체를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과 같다. 하나님의 뜻 밖에 남겨진 부분들은 반역을 일으키며 문제를 야기시킨다. 우리는 그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므로(5:1/엡 5:30),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도록 초청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완전한 평화와 승리를 소유하게 된다.
왕좌를 향한 다윗의 길은 여러 해가 걸렸으며 많은 시련이 따랐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었으며 대적에게 복수하거나 앙갚음하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 일에 있어서 다윗이 하나님의 때와 계획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격려를 받는다는 것을 아셨다. 하나님은 만일 우리가 그를 신뢰하기만 하면 우리에게도 똑같이 행하실 것이다."
삼하 6:1-11
▣ 본향으로 옮겨진 법궤-사무엘하 6장-
본 장을 연구하려면 역대상 13, 15, 16장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 장들이 다윗의 생애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하여 추가로 자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시편 132편 1-6절은 법궤가 제자리로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찬양하고 싶은 강렬한 그의 소망을 대변해 준다. 약 80년 동안 법궤는 기럇여아림에 있었으며(유다의 바알/ 삼상 6:21-7:2), 다윗은 예루살렘에 법궤를 둘 특별한 장막을 준비하여(대상 15:1) 이 성스러운 궤를 본향으로 되돌려올 준비를 하였다. 그가 이 임무를 끝마치는 데는 3개월 이상이나 걸렸다(6:11).
1. 하나님을 노하게 한 다윗(6:1-11)
물론 다윗의 편에서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이 온당한 욕심이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열성“을 가지거나 또는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 고의적으로 그릇된 형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다윗은 여호와와 상의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정치적인 지도자들과 의논하였다(대상 13:1-4/삼하 5:19/삼하 5:23). 그의 주된 동기는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것보다는 그의 통치 하에 있는 민족을 단합시키려는 데에 있는 것같다. 13장 3절에서 다윗은 사울이 법궤를 소홀히 하였던 것을 비난한다. 아마도 이러한 발언은 6장 20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사울의 딸, 미갈의 행동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모든 지도자들과 회중들은 다윗의 계획에 동의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후의 일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윗의 그 다음 실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다. 법궤를 레위인들이 그들의 어깨에 메도록 요청하는 대신(민 3:27-31/민 4:15/민 7:9/민 10:21), 블레셋이 하던 대로 세상의 본을 따라 법궤를 새 수레에 실었다(삼상 6장). 하나님이 블레셋이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셨던 것은 그들이 말씀을 교육받은 언약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거룩한 명령을 무시하고 이방 민족을 흉내낸다는 것은 재난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또는 교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신 형식“을 따르는 대신 “세상“을 따르는가!(롬 12:2/출 25:40) 모든 백성들은 열정적으로 기뻐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방법이 하나님의 눈에 합당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다른 나라들처럼“ 되기를 원했다(삼상 8:5). 그리고 그 일은 언제나 그들을 비극으로 인도해 갔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인간의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다. 황소들은 비틀거렸고 법궤는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로 인해 세번째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레위인이 아닌 사람이 법궤를 만졌다(민 4:15). 하나님은 그 사람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실 수 밖에 없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을 입고 주님의 말씀을 위반해도 된다고 허용하는 일이 된다. 이같이 갑작스런 심판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그의 마음이 하나님과 완전히 바른 관계에 있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처음에 그는 화를 내었으며 다음에 그는 두려워하였다. 잠시 중단하고 심판에 대한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는 않고 다윗은 대열을 정지시키고 재빨리 법궤를 배치하였다. 역대상 26장 1-4절은 오벧에돔의 가족이 레위지파에 속하였으며 법궤를 안전하게 돌볼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나의 실수가 다른 실수로 이끌어 간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일과 그 뜻을 성취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삼하 6:11-19
2. 자기의 열성을 과시하는 다윗(6:11-19)
석달이란 기간 동안에 다윗이 자기의 마음을 성찰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그는 법궤를 운반하기 위하여, 또한 하나님의 지시를 발견하기 위하여 율법을 들추었을 것이 분명하다(대상 15:1-2/대상 12-13).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집을 축복하고 계셨으며 다윗은 그 축복이 전체 민족에게 있기를 원했다. 이번에는 장막을 준비하였고 레위인들도 자신들의 임무를 적절히 준비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찌어다!“
시편 24편은 이 사건을 축하하기 위하여 지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대상 16장 7절 이하를 보면 시편 105편이 이 행복한 사건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다윗이 자신의 마음의 기쁨을 표현하도록 하는 데 사용하셨으며 그의 노래는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였다. 왕은 자신의 용의를 제쳐놓고 제사장의 겸손한 옷을 입은 채 대열을 인도해 갔다. 레위인들은 여섯 발걸음을 내딛고 잠깐 멈추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으시는지 보려고 기다렸다. 아무 심판이 없자 그들은 제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남은 길을 진행해 갔다.
여호와 앞에서 다윗이 “춤을 춘 것“은 하나님의 법궤가 백성들에게 회복된 것을 기뻐하여 자연발생적으로 그 기쁨을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다윗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위엄이 없는 일이었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정반대로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에 기쁨과 찬양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모두 제어해서는 안된다. 어떤 신자들은 이와 같은 행동들을 극단적인 육의 일로 규정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거짓된 근엄성으로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죄를 범한다. 끝으로, 다윗의 “춤“은 근대적인 “춤“을 찬성하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은여호와 앞에서 그를 찬양하기 위하여 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백성들을 축복하고 법궤가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선물을 주었다. 오래 전에 “영광이 떠났었다.“ 이제 만군의 여호와(“군대들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다시 돌아오셨다! 다윗이 기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삼하 6:20-23
3. 아내를 징계하는 다윗(6:20-23)
우리는 앞서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에게 적합한 아내가 결코 아니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사울의 가족에 속하였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진실로 나타내 본 일은 한 번도 없다. 사무엘상 19장 13절은 그녀가 우상을 섬겼음을 시사한다! 다윗은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인하여 그녀를 아내로 취하지 않았으며, 골리앗을 죽임으로, 또한 사울의 살인적인 요구를 성취함으로 “그녀를 얻었다.“(삼상 17:25/삼상 18:17-27). 사울의 가족과의 평생 동맹은 그 시작으로부터 문제거리였으며 모든 신성하지 못한 동맹들이 다 이러하다(고후 6:14-18). 다윗과 사울 사이의 대결은 육신과 영 사이의 전쟁을 예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미갈과 연합한 것은 육신에 양보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미갈이 왜 그의 남편을 경멸하였는지를 아는 데는 많은 상상력이 동원되는 일은 아니다. 물론 그녀의 죄악된 태도가 여러 해를 두고 내적으로 자라갔던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아버지의 무기 책임자에게 승리의 “상“으로 결혼을 하게 된 것을 원망하였다. 그녀는 다윗이 다른 아내들을 취한 것을 원망하였는데(5:13-16/3:2-5), 이들은 모두 그녀가 다윗과 결혼한 후에 선택된 여인들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부끄럽게 죽임을 당하였으며 그의 적이 이제는 승리 가운데 전이스라엘을 다스린다. 물론 이러한 모든 이유들을 넘어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여호와의 일들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던 불신자였다(고전 2:14-16). 그녀는 이런 화려한 의식을 통해서 다윗이 그의 왕권을 표현하기를 원하였으나, 다윗은 자기의 지위를 보통 사람들과 함께 하여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기를 더 좋아하였다.
찬양의 위대한 시간이 지난 후 미갈이 다윗에게 한 심한 말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추구할 때는 반드시 사단은 “미갈“을 우리에게 보낸다는 것은 대체로 맞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한 편 구석에는 바리새인들이 있어서 그를 비판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녀의 사악한 말은 사악한 마음을 나타낸다. 다윗은 그녀가 처결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네 손이 너로 범죄케하거든 찍어 내어 버리라!“ 그는 미갈이 여호와의 일에 있어서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그녀를 내어 쫓고 결혼의 특권을 주지 못하게 하였다. 유대 여인에게 있어서 자녀들이 없이 죽는다는 것은 그녀에게 큰 수치였다. 다윗은 그녀의 어리석음에 따라 그녀에게 응대하였다(잠 26:5).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비판할 때,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동기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 때, 낙심해서는 안된다. 다윗이 다른 성도들 같았더라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좋아, 나는 더이상 여호와를 섬기지 않겠어! 내 아내조차도 그 진가를 인정해 주지 않는군!“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다윗은 훨씬 많은 일들을 계획하였으며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건설하려는 것을 본다. 사단이 길에 어떠한 장애를 두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여호와를 높이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합당한 정신이다."
삼하 7:1-3
▣ 다윗 언약-사무엘하 7장-
본 장의 12, 16절은 주된 교훈을 요약하고 있다(“당신의 보좌... 그리고 당신의 씨“). 다윗과의 언약은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 언약은 역대상 17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은 유대 민족에 대한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하나님은 자손과 땅과 전 민족에 대한 축복을 약속하셨으나(창 15장), 다윗과의 언약에서는 약속된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을 통하여(롬 1:4) 다윗의 보좌로부터 이스라엘의 왕국을 통치하게 될 것을 계시하셨다.
1. 고귀한 목적(7:1-3)
망명의 날들과 위험은 끝났다. 다윗은 자기의 집에서 안식과 축복을 누리고 있었다. 왕은 선지자 나단과 교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여호와의 일들을 논의하였다. 이 장면을 다니엘 4장 30절과 비교하라. 여기서 느부갓네살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대신 자기의 행한 일을 자랑하고 있다.
다윗은 항상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집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시 132편). 그리고 그의 소망은 법궤를 위하여 아름다운 집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나(대상 22:8), 다윗의 사랑은 인정하셨다. 왜냐하면 이 소원이 그의 마음에 있었기 때문이다(왕상 8:18). 나단은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이 밝히신 뜻을 알지 못했으며 다윗에게 권하여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일을 행하라고 하였다. 다윗과 나단은 둘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하여 마음을 열어 놓고 있었으며 주께서 말씀하실 때는 듣고 순종하였다. 우리는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언제나 서로를 격려해야 마땅하며 서로 선한 일을 하도록 자극을 주어야 한다(히 10:24-25).
다윗은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집을 가장 귀한 것으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욱더 그를 닮아가야 하겠다!"
삼하 7:8-17
2. 놀라운 약속(7:8-17)
나단은 “밤에“ 말씀을 묵상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에게 밤에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두울 때에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가 종종 있다!(창 15장, 하나님의 아브라함과의 언약) “주께서 밤에 나를 권고(방문)하시며“(시 17:3). 하나님은 나단에게 특별한 멧세지를 주셔서 왕에게 전하게하셨으며, 이 멧세지에는 다음의 사항들이 들어 있다.
하나님의 은혜(5-10절)-하나님은 이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로 “천막집“에 거하셨으니 얼마나 은혜스러우신가! 그는 애굽의 신들이 즐기는 정교한 성전을 요구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자신을 겸손케 하셨으며“ 장막에 거하시어 백성들과 함께 여행하셨고 그들보다 앞서 가시며 길을 열어 놓으셨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그리스도)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taberna-cled)...“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또다른 증거는 다윗을 대우하심에 있었다. 하나님은 목장으로부터 그를 부르셔서 보좌에 두셨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적들을 물리쳐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축복의 장소로 인도하셨으며 다시는 이동치 않을 것이었다(10절/ 동사가 과거로 되어야 한다-“내가 약속했었던“).
하나님의 목적(11-16절)-“집“이란 단어가 이 구절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즉 물질적인 집, 성전(13절)의 의미와 인간의 집안, 다윗의 가족(11, 16, 13, 25, 27, 29절)의 의미이다. 왕의 가족을 “집“이라고 부르는 것은 관습이었으며, 마치 영국에서 “윈저 가(家)“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다윗은 돌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를 원하였으나, 하나님은 왕족, 곧 그의 보좌에서 다스릴 가족으로서 다윗의 집을 창설하려고 하셨다.
이 언약의 개념들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중요하다. 우리는 우선 이 언약들 중의 일부가 다윗의 보좌를 계승한 솔로몬에게서 성취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대상 22:6-16 참조). 하나님은 그 가족 중의 다른 사람들이 사악한 음모들을 꾸몄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을 보좌에 앉혔다. 그리고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아름다운 성전을 건설하도록 허락하셨다. 솔로몬과 그의 후손들이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지켜 그들을 징계하셨다(시 89:20-37 참조). 그러나 이 언약에 있는 어떤 사항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보좌가 영원하리라고 말씀하신다(13절). 그리고 다윗의 집과 왕국이 영원할 것 또한 말씀하신다(16절). 우리는 오늘날 다윗의 후손들이 보좌에 앉아 있지 않음을 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지키시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시편 83편 33-37절에서 다윗의 후손들을 징계할지라도 다윗과의 약속을 깨뜨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셨다.
이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누가복음 1장 28-33절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보낸 멧세지를 주의깊게 읽어보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보좌와 왕국을 그리스도께 약속하신 것을 주목해 보자.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오늘날의 교회에 적용시킨다. 그러나 만일이 천사의 멧세지의 남은 부분을 문자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보좌와 왕국을 어떻게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스가랴는 그리스도께서 조상들의 언약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하였다(눅 1:68-75). 우리가 확신하기는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 동안에 다윗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실 때 다윗의 언약을 성취하실 것이다(계 20:1-6). 구약 예언서들에 나오는 모든 위대한 왕국 약속들이 성취될 때도 그 때이다. 사도행전 15장 13-18절에서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권고하시기를 마치고 자기 이름으로 한 백성을 불러내신(교회) 후에 다윗의 집(장막)을 다시 세우실 것으로 이해했다."
삼하 7:18-29
3. 겸손한 기도(7:18-29)
다윗은 나단으로부터 멧세지를 받고 기도하러 갔으며 여호와의 말씀을 성취하시도록 하나님께 구한다(28-29절). 만일 우리가 교훈이나 설교를 들은 후에 “그 멧세지를 가지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풍성하게“ 주시기를 즐겨하신다. 다윗은 지상적인 성전을 건설하도록 허락을 받고자 기도했으나, 하나님은 영원한 왕국을 그에게 약속하심으로 응답하셨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의 행위는 다윗으로 하여금 여호와 앞에 겸손하게 하였다. 그리고 기도 중에 왕은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특권적인 지위를 깨닫고 있었다(22-24절).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며 얼마나 위대한 일들을 이루셨던가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의 관심은 자기의 이름이 칭송을 받는 것이 아니었으며 여호와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었다(26절/ 빌 1:20-21). “주께서 말씀하셨으니 이제 그 약속들을 이루소서!“라고 다윗은 기도하였다. 아브라함처럼 다윗도 “약속하신 그 일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롬 4:21).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집을 짓도록 허락지 않으신 것을 인하여 실망하였는가? 아니다! 누가 건설하느냐 하는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구약의 약속들과 하나님이 유대인과 맺으신 언약들을 해석함에 있어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두 가지 근본적인 부류의 견해가 있다.
(1)전천년설-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1,000년간 통치하실 때에 구약 언약들이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다.
(2)후천년설-이 예언들과 언약들을 오늘날 교회에 영적으로 적용시킨다.
전천년설을 믿는 연구자들이 이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보는 반면, 후천년설을 믿는 학자들은 “영적으로“ 보기를 더 좋아한다. 이 두 가지 설은 모두 성경의 영감을 믿는다. 다만 차이점은 영감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에 있다.우리는 주 안에서 후천년설의 주장자들을 영접하며 비록 성경의 진리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 해도 그들과 교제한다. 우리는 어떤 한 가지 해석을 교제의 시금석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전천년설의 관점을 더 좋아하며, 구약 예언들과 언약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이들이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 민족에 적용되는 것을 더 지지한다.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구약의 모든 약속들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따라서, 그의 미래 왕국에 대한 약속들 또한 문자적으로 성취되지 않으리라는 근거가 없다. 우리가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해석할 것이며, 결국에는 해석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대립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찰스 라이리, “오늘날의 세대주의“를 참조하라(Chatles Ryrie, Dispensationalism Today, Moo-dy Press,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