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역사문화 탐방
▲ 함께한 사람들(존칭생략)...
쵸이스 가을 고덕 길친구 봄별 별사탕 최실비아 향기 황토비비 그리고 사진에는 없는 드르니 이같또로따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1405년(태종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
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형제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광해군 때에 재건된 창덕궁은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法宮)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창덕궁은 응봉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더불어 비원으로 잘 알려진 후원은 각
권역마다 정자, 연못,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으로 등록되었다.(창덕궁 홈피에서)
▲ 수령 475년의 은행나무
▲ 밝고 따스한 아침 햇살이 고궁에 내려 앉는다. 우리의 긴 그림자도 함께 걷는다.
▲ 1박2일 촬영팀이라던가.
인정문
인정전의 정문으로 태종5년(1405) 창건한 것이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광해군 원년(1608) 재건하였다. 영조
20년(1744) 10월 승정원 화재때 좌우 행각과 함께 소실되어 이듬해 3월에 재건하였다. 순조3년(1803) 12월에
선정전 서행각에서 화재가 나 인정전 등이 소실되매 이듬해 12월에 개건하였는데 이 문도 그때 재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다포계양식, 팔작지붕의 평삼문형으로 가구수범에서 조선후기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1910년에
일제에 의해 주위건물과 함께 일부변형 되었다. 현재 외벽을 만들고 앞뒤에 문을 달았으나 원래는 중앙 고주
사이에 문을 달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3급으로 쌓은 석조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원주(圓柱)를 세웠으며 기둥
윗몸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짜 돌려 공포(慊包)를 받았다. 공포는 외2출목, 내2출목, 짜임은 삼제공이
중첩하는 형상이고 도리받침부재는 운형(雲形)으로 깎았다. 외부의 평방과 창방은 중앙 평주(平柱) 위에서만
초각물(草刻物)을 삽입하여 놓았으며 내부는 이제공(二提慊)까지는 직절(直絶)한 첨차 끝이 되었으며 그 위는
운궁(雲宮)처럼 되어 도리까지 나가 보 아래에서 보아지가 되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단청은 반초머리의 모루단청이다. 인정문 좌우 행각과 인정전의 문비(門扉)는 일제 때에 왜식(倭式)이 가미
되어 변형된 부분이 많다. 인정문에서는 역대의 많은 왕들의 즉위가 있었는데 효종 · 현종 · 숙종 · 영조 등이
이 곳에서 즉위하였다.(다음 대한민국구석구석)
▲ 남산 타워를 당겨 찰칵~
▲ 반송(盤松) 힌 그루 고궁 정원의 운치를 더 해준다.
▲ 선정정 청기와 지붕
▲ 낙선재
낙선재에 대한 세세한 해설을 기대했으나... 너무 짧게 끝나 아쉬움이 컷다.
해설사가 추운 날씨 탓인지는 모르지만... 겨우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 마쳤다.
차라리 로따가 해도 최소 10분은 설명할 수 있는데...
▲낙선재는...
보물 제1764호.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에 중건된 궁궐 내부의 사대부 주택형식의 건축물이다.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맨 좌측에 낙선재가 크게 자리 잡고 그 우측으로 석복헌과
수강재가 연이어져 있으며, 이들 뒤편에는 화초, 석물, 꽃담 굴뚝 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화계와 그 위의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이 위치해 있다.
낙선재는 원래 창경궁에 속해있던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하고 있다. 중희당과 수강재를 이웃
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건설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756년(영조 32)에 화재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영조대에도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1847년(헌종 13)에 중건된 낙선재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세워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고종대에 들어와서 중희당과 가까운 낙선재를 종종 편전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생겼다. 특히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낙선재를 집무실로 정하고 대신들과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
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였다.
낙선재는 연경당과 함께 궁궐 내에서 단청을 하지 않고 일반적인 주거의 형태를 취한 특이한 건물이다.
낙선재의 정문은 장락문(長樂門)으로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낙선재 본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기둥 위 짜임은 간소한 초익공 형식으로 되어 있다. 서쪽 끝 한 칸은 앞으로 돌출
시켜 2칸 누마루를 두고 제일 뒤는 온돌방을 들였다. 그 옆으로 2칸 대청이 있고 다시 2칸 온돌방을 두었으며
가장 동쪽 칸은 마루방이다. 가운데 4칸은 전퇴 부분을 개방해서 통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누마루 아래
에서 아궁이를 가리기 위해 설치한 칸막이에는 현대적인 느낌의 추상적인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얼음이
갈라진 모양을 하고 있어 빙렬(氷裂)문양이라고 하는데 장식 효과와 함께 화재를 경계하는 의미도 지닌다.
이 밖에 각종 창호의 무늬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실내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원형문이 있다.
낙선재의 후원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화계가 있고 괴석 등을 전시하였다. 또 벽돌로 문양을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화계 뒤로는 상량정(上凉亭)과 서고가 있고, 서쪽으로 소주합루와 만난다.
상량정의 원래 이름은 평원루(平遠樓)인데 일제강점기 동안 상량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상량정의 뒤에는
긴 평면을 갖는 맞배지붕 서고가 있다. 정면은 나무판을 세로로 세워 만든 판벽이고 좌우벽은 궁장을 쌓는
것처럼 돌과 벽돌로 장식했다. 여기에 많은 양의 서화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낙선재 후원에서 소주합루
영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만월문을 지나도록 되어 있다. 만월문은 벽돌로 쌓은 것으로 개구부가 원형이다.
조선 후기부터 궁궐에 등장하는 중국풍 요소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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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본래 창덕궁의 후원으로 후원(後苑) 또는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 금원이라고 불렀으며,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은 일제 때 용어이다. 〈태종실록〉에 1406년(태종 6) 4월 창덕궁 동북쪽에 해온정(解溫亭)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정원은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459년(세조 5)에는 후원 좌우에 연못을
만들고, 열무정(閱武亭)을 세웠다.
1463년에는 후원을 확장하여 경계가 거의 성균관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창덕궁과 함께 후원도
불타버렸으나 광해군 때 복원되었다. 이때의 모습이 왕조실록의 주해에 기록되어 있는데 "기이한 화초와
괴석들을 늘어놓고 원유의 꽃과 돌 사이의 곳곳에 작은 정자들을 만들어 그 기교하고 사치스러움이 예전에
일찍이 없었다"라고 했다. 1636년(인조 14)에 지금의 소요정(逍遙亭)인 탄서정(歎逝亭), 태극정(太極亭)인
운영정(雲影亭), 청의정(淸漪亭) 등을 세웠고, 청의정 앞쪽 암반에 샘을 파고 물길을 돌려 폭포를 만들었으며
옥류천(玉流川)이라는 인조의 친필을 바위에 새겨놓았다. 1642년에는 취규정(聚奎亭)을, 1644년에는 뒷날
관덕정인 취미정을, 1645년에는 희우정(喜雨亭)인 취향정(醉香亭)을, 1646년에는 청연각(淸讌閣)인 벽하정
(碧荷亭)을, 1647년에는 취승정(聚勝亭)과 관풍정(觀豊亭)을 세웠다. 1688년(숙종 14)에는 청심정(淸心亭)과
빙옥지를, 1690년에는 술성각 옛 자리에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을 세웠다. 1704년에는 대보단을 축조했고, 1707년에는 택수재(澤水齋)를 세웠다. 1776년에는 왕실의 도서를 두는 규장각을 세웠는데 이는 주합루
(宙合樓)라 부르는 중층 누각이며, 그 아래 연못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택수재를 지금의 부용정(芙蓉亭)으로
고쳤다. 1828년(순조 28)에는 사대부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 후원 안의 개금재 자리에 연경당(演慶堂)을 지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는 선원전을 지었다. 후원은 크게 네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영역은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주합루·영화당(暎花堂)·사정기비각·서향각(書香閣)·희우정·제월광풍관(薺月光風觀) 등의
건물들이 있는 지역이다. 둘째 영역은 기오헌(寄傲軒)·기두각(奇斗閣)·애련지(愛蓮池)·애련정·연경당이 들어
선 지역이다. 셋째 영역은 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승재정·폄우사(砭愚榭)가 있는 지역이다. 넷째
영역은 옥류천을 중심으로 취한정(翠寒亭)·소요정·어정(御井)·청의정·태극정이 들어서 있다. 그밖에도 청심정
·빙옥지·능허정(陵虛亭) 등이 곳곳에 있다. 후원의 구성은 낮은 야산과 골짜기 그리고 앞에 펼쳐진 편평한 땅
등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꼭 필요한 곳에만 인공을 가해 꾸며놓았다. 따라서 우리나라 조원(造苑
)의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예이다.(다음백과)
▲후원 문화해설사 총각 선생으로 조금전 여성 해설사보다 훨~~굿이다.
후원을 아직 못 본을 위해 한 마디~ 별도의 입장권을 구매해야 한다.
그리고 해설사와 함께 이동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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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백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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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래식 다방 부람스에서 커피타임.
사다리타기 5명 그중 여성 한 분이 과감히 참여, 공짜로 당첨. 나머지는 4등분하여 남4가 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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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고궁 탐방할 때에는 한국의재발견 팀(http://www.rekor.or.kr/)에 사전 의뢰할 예정입니다.
대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함께하신 님들께 감사의 박수를 드립니다.
첫댓글 로따님 공지 덕분에 창덕궁후원을 볼수 있어서 정말 감사 했습니다 점심 메뉴도 좋았구요
클래식 레트로 감성이 풍기는 곳에서 커피까지 ~함께한 모든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뜻 깊은 역사문화 나들이에 함께하시어 반가웠습니다.
저도 오랜만의 후원을 찾아 우리님들과 함께해 보람찼답니다.
사진에 역사설명까지 달아주셔서 역사공부를 하게되네요. 추운 날씨에 사진까지 찍으시며 리드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매서운 한파에 후미를 맡아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황토비비님과 함께하여 든든한 역사문화 탐방였습니다.
로따님 리딩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체감온도가 낮아서 많이 추웠지만 잘 구경 했습니다 .
강추위 속에 진행한 도보였지만 울님들의 열의에 추위를 잊었지요.
알고보니 사다리타기에 명수시네요. 옆자리 커피타임도 즐거웠구요.
로따 지기님~
감쏴 ~ ~ ~ 👍
상쾌하고 기분좋은 하루를 만킥하는
즐거운 탐방길 였습니다.
중식에서 차한잔의 여유까지
세심한 배려와 스케즐 ~
이어
고궁탐방 후기의 자상함까지
행운을 누린 탐방길~
흡족했습니다.
추운데
진사님의 흔적까지
남겨주셨네요
건강한 모습으로
뵐
다음길을 응원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창덕궁의 비밀의 정원 산책은 저도 뜻 깊었답니다.
길친구님과 함께한 역사문화탐방 보람 가득했답니다.
로따님 덕분에 오고싶었던 창덕궁후궁을 관람하게 되었네요 항상좋은길 리딩해 주시고 사진과 해설까지 감사합니다
별사탕님~ 어쩌다 푸른00님은 함께 안하시고... ㅎㅎ
고즈넉한 고궁의 향취를 같이 해 보람 가득했습니다.
로따님~
언제나 좋은길 우리길 리딩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궁탐방 후기를 보니 창덕궁에 와있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겨울에도 꼭 오고 싶었는데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고덕님~내년 봄이나 가을에 다시 찾을까 합니다.
소수의 인원으로 차분하게 고궁의 후원을 걷는 맛이 남다르더라구요.
칼바람 가득한 고궁 그리고 후원
해설사를 대동한덕분에 그곳의 설명까지..
로따님 수고하셨습니다
맞아요~ 칼바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컸지요.
오랜만에 드르님과 함께하여 기쁘고 보람찬 하루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