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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16.자 천리포수목원, 해양유물전시관,꽃지튤립축제장,보령해저터널,대천해수욕장 관광이야기 1부.
(태안군 소원면 천리포 수목원까지의 여행경로)
2022.04.16.일 이른 새벽 05시25분에 우리는 도봉동 아파트를 출발했다. 차량 내비에는 천리포수목원 주소지를 입력했다. 천리포주소는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황리 978-2번지”였다. 조수석에는 집사람을 태웠다. 조식 및 점심용 도시락과 물병 기타 필수품을 같이 싣고 출발했다.
동부간선도로-청담대교-헌능ic-서울용인고속도로-수원영통-안녕ic-서오산ic-평택화성고속도로-평택제천고속도로-서해안고속도로-행담도 휴게소에 도착하니 시간은 07시18분이었다. 서울에서 행담도휴게소까지의 주행거리는 100km였다. 우선 행담도 화장실과 편의점에 들렸다. 운전중 간식용 캔커피 맛동산 꿀꽈배기 1개씩을 샀다. 그리고 행담도 주차장 차속에서 집사람과 같이 도시락으로 조식을 때웠다. 행담도 주차장에서 천리포 수목원을 향해서 다시 출발한 시간은 08시05분이었다.
행담도주차장-당진 톨게이트-당진-서산-태안-천리포 수목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시간은 09시34분이었다. 서울에서 천리포수목원까지의 주행거리는 194km였다.
(충남태안군.소원면.의황리 978-2번지 소재 천리포수목원)
우선 천리포수목원 매표소에서 수목원 입장권 2장을 샀다. 경로우대 할인혜택을 받아서 1인당 6천원씩 2인분 1만2천을 지불했다.
(천리포 수목원 호수 주변 풍경)
천리포 수목원은 호수가 있다. 그 호수 주변의 산언덕과 천리포 포구 바다 사이를 거미줄처럼 연결한 산책로가 조성된 휴식공간이다. 산책로변에는 수많은 꽃과 나무가 가득차 있다. 호수 북쪽에는 초가집 지붕의 카페 하우스가 숲속에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호수입구에 곱다랗게 만개한 벚꽃 나무 한그루가 특이한 벚꽃으로 보였다. 그 벗꽃나무 가지들이 마치 곱게 빗어내린 머릿결 같은 수양버들처럼 길다랗게 땅바닥으로 흘러내린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표지판에는 처진잉키사 벚꽃이라 써 있다. 이렇게 수양버들처럼 늘어진 벚꽃나무 가지에 벚꽃들이 만개한 모습은 처음보는 벚꽃이다.
(천리포수목원내 호수 북쪽에 초가지붕으로 보이는 것이 수목원내의 카페 하우스로 보임)
(수목원 호수 입구에 피어있는 처진잉키사 벗꽃 모습. 좀 특이한 처음보는 벗꽃임)
(천리포수목원 호수가 산책로 핀 적목련 모습)
(천리포수목원 호수가 산책로변에 핀 백목련 모습 )
(천리포수목원 호수가 산책로변에 핀 벗꽃 모습 )
(천리포수목원 호수가 산책로변에 핀 벗꽃 모습)
(천리포 수목원 해송 숲길)
호수 주변의 산언덕에는 10미터 이상의 해송들이 가득차 있다. 이러한 해송들 사이사이로 산책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천리포수목원 산언덕의 해송숲 사이로 뻗은 산책로 모습1 )
(천리포수목원 산책로변에 있는 해송숲 모습)
(천리포 해수욕장 전경)
바닷가 쪽으로는 데크 산책로가 뻗어있다. 이 데크 산책로를 걸으면서 바라보는 천리포해안의 모래사장과 출렁이는 바닷물이 한없이 아름답다. 데크산책로에서 바로 건너다 보이는 서해바다에는 낭새섬이 있다. 낭새라는 새가 많이 살아서 낭새섬이란다. 이 낭새섬을 현지 사람들은 닭섬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이 낭새섬을 기준으로 좌측과 우측으로 천리포 해수욕장 모래톱이 쭉 뻗어있다. 이 모래톱으로 밀려와서 하얗게 부서지는 바닷물이 한없이 아름답다. 우측 모래톱 끝에 보이는 천리포항의 포구 방파제도 멋있어 보인다. 이렇게 천리포 해수욕장은 너무 크지 않고 적당한 크기의 해수욕장이라서 더욱 인기가 있어 보인다. 만리포 해수욕장은 너무 커서 아담한 맛이 없지만 천리포 해수욕장은 그 크기가 아담해서 더 좋은 것 같다.
(천리포수목원 바닷가 데크산책로상에서 바라본 낭새섬과 천리포 해수욕장 모래톱모습)
(천리포수목원 바닷가 데크산책로상에서 바라본 낭새섬과 천리포항의 방파제모습 즉 낭새섬을 기준해 천리포해수욕장의 우측 백사장 모습임)
(천리포수목원 바닷가 데크산책로상에서 바라본 낭새섬과 천리포해수욕장의 좌측백사장모습 )
(천리포 수목원 설립자 이야기)
이곳 천리포 수목원은 미국인 민병갈 박사가(1921-2002) 설립했다. 민병갈 박사의 미국 이름은 칼 페리스 밀러라고 했다. 안내문은 아래와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임상 민병갈 박사는 1921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태어났다. 1945년에 미군정보장교로 한국에 부임해 와서 한국문화와 자연에 심취했다. 그는 군복무를 마친 뒤 한국은행에서 고문으로 일했으며 주식투자를 병행해서 막대한 돈을 벌었다. 그 돈을 모조리 천리포 수목원 건설에 투자했다. 1962년부터 천리포 지역의 황폐한 땅에 식물을 심고 키우며 정성을 쏟은 끝에 천리포 수목원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키워냈다. 1979년에는 한국인으로 귀화했으며 2002년에 81세로 별세한 분이다.
이렇게 민병갈씨가 보여준 식물사랑의 공로를 인정하여 한서대학교는 명예 이학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산림청에서는 2005년 숲의 명예전당에 헌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리포수목원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 출구는 화분꽃을 잔뜩 전시한 실내공간을 지나서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화분꽃에 관심있는 관광객들은 화분꽃도 구매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천리포 수목원이란 휴식공간을 만들어준 귀화인 민병갈 박사님에게 우리는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천리포수목원 설립자이신 민병갈박사님의 조각상 모습)
(천리포 수목원의 목련정원과 목련산 이야기)
일반인에게 연중 개방된 천리포 수목원을 구경을 마치고 (4.16일) 귀경한 뒤 4.22일자 모 일간지에는 천리포수목원 관광안내 상보가 보도되었다.
그 내용을 보니 4.24일까지는 천리포 수목원 목련축제기간인데 이 축제기간까지는 지금까지 일반인에게 미개방되었던 목련정원과 목련산을 개방한다는 내용이었다.
구경하는 요령은 천리포수목원 홈페이지에 오픈되어 있다고 했다. 이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프로그램을 예약한 자에게만 목련정원과 목련산 출입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이 목련정원에서는 설립자 민병갈 박사가 살았던 후박나무집도 구경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입장료가 별도로 있는데 목련정원 입장료는 4만원이고 목련산 입장료는 3만원이라고 했다.
우리가 일반인에게 개방된 천리포 수목원을 방문했던 날은 (4.16일) 이러한 목련정원과 목련산 개방내용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일반인에게 연중 개방되는 천리포 수목원만 구경하는데 그쳤다.
(만리포 해수욕장 구경)
천리포 수목원을 구경한 뒤 우리는 10시31분에 만리포해수욕장을 향해서 출발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잠깐 들려 천혜의 만리포 해수욕장을 한번 둘러보고 싶어서 찾아 왔다.
만리포 해수욕장의 “만리포 사랑 노래비” 앞에 서서 바라보는 만리포 해수욕장은 만리포라는 말에 어울리게 대형 해수욕장이다. 노래비 우측 백사장 끝은 너무 길어서 그 끝이 아련하게 보인다. 또 좌측 백사장 끝도 그 끝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렇게 만리포해수욕장은 대형 해수욕장이다.
(만리포 해수욕장 노래비 내용/반야월작사.김교성작곡.박경원 노래)
만리포 해수욕장 입구 첫 들머리에는 만리포사랑노래비와 중앙전망대가 있다. “만리포사랑노래비”라는 큰 비석이 수직으로 서 있다. 그 비석에는 “만리포사랑노래비”라는 글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비석 하단받침대에는 만리포사랑의 노래 가사 1,2,3절이 새겨져 있다. 이 노래가사는 작은 글씨로 횡으로 새겨져 있다.
그 내용 중 가사 1절에 “ 그립고 안타까워 울던 밤아 안녕히 ”이라는 대목이 있다. 그립고 안타까워서 울었던 밤이 있었지만 그렇게 울었던 밤이어 이제는 안녕히 빠이 빠이다”라는 내용의 의미로 해석된다. 그런데 그 후미에는 “희망에 꽃구름도 둥실둥실 춤춘다.” 라고 연결된다. 이것은 곧 그런 실연의 아품은 이제는 희망의 꽃구름이 춤추는 순간으로 바뀌었다는 재생의 희망을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인가
가사 1. 똑딱선 기적 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 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 사랑. 그립고 안타까워 울던밤아 안녕히. 희망에 꽃구름도 둥싱둥실 춤춘다.
가사2. 점찍은 작은 섬을 굽이굽이 돌아서 구십리 뱃길 위에 은비늘이 곱구나. 그대와 마주 앉아 불러보는 샹송.노젓는 뱃사공도 벙실벙실 웃는다.
가사3. 수박빛 썬글라스 박쥐양산 그늘에 초록빛 비단물결 은모래를 만지네. 청춘에 젊은 꿈이 해안선을 달리면 산호빛 노을속에 천리포도 곱구나.
실연의 경험이 있는 젊은 청춘이 실연을 아픔을 털어내고 이곳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뱃사공의 배를 빌려타고 만리포 해수욕장 바다위를 유람하는 한쌍의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는 아름다운 모습이 그려지는 만리포 사랑 노래는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인가.
(만리포해수욕장 중심부 입구에 세워진 만리포사랑노래비와 중앙전망대 및 해수욕장전경)
(만리포해수욕장 중앙전망대에서 우측 백사장을 바라본 모습)
(만리포해수욕장 중앙전망대에서 바라본 만리포해수욕장의 좌축백사장과 만리포항 방파제 모습)
만리포 해수욕장을 둘러본 뒤 우리는 다시 10시46분경에 태안군 해양유물전시관을 향해서 출발했다. 해양유물전시관 주소인 “충남태안군 근흥면 신진도리 456번지”를 차량 내비에 입력시키고 만리포해수욕장을 출발했다.
(태안군 근흥면 해양유물전시관 관광)
만리포 해수욕장을 출발해서 태안군 근흥면 해양 유물전시관에 도착하니 시간은 11시22분이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의 주행거리는 221km였다.
해양유물전시관이 위치한 신진도리는 섬이다. 이 신진도 섬 바로 옆에는 마도라는 섬이 붙어있다. 신진도와 마도 섬 부근에서 지금까지 4척의 고대 침몰선이 발견되었고 여기서 수습한 유물들을 이곳 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태안군 근흥면 육지에서 신진도 섬까지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육지처럼 자동차로 출입이 가능한 지역이 되었다.
(태안군 근흥면 육지에서 신진도리 섬으로 연결된 다리 모습. 본 풍경은 해양유물전시관 건물앞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모습임)
태안 해양유물전시관 건물은 3-4층 규모로 보였다. 검은색 건물벽에는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이란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부터 구경하고 다시 계단을 타고 내려가서 1층 전시물을 둘러봤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와야 밖으로 나가는 출구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이 해양유물전시관은 무료로 개방된 공간이었다.
(해양유물전시관 건물앞에서 전시관 건물을 올려다 본 해양유물전시관의 전면 모습)
해양유물전시관 내부로 들어가니 제일 먼저 눈에 띤 것이 이곳 유물전시관 안내문이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 (우리나라 수중고고학과 서해.)
바다 강 호수 등 물에 잠긴 인간의 흔적을 찾고
이를 연구하는 분야를 수중고고학이라 한다.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은 1976년 한척의 배와
23000여점의 유물을 건져올린 신안선 발견으로
싹텄다.
이를 계기로 1981년 목포에 목포보존처리장이
문을 열었다. 지금은 현재의 국립해양문화재연
구소로 성장하며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수중문
화재 조사 연구 활용을 전담하고 있다. 신안선
발견이후 40여년간 수중 발굴은 서해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이는 중요한 뱃길이 서해에 위치한
사실을 말해준다. 서해는 복잡한 해저지형과 연
중 안개가 끼는 기후의 영향으로 늘 침몰의 위험
이 도사리는 곳이다. 실제 수많은 배가 바다속에
가라 앉았다. 하지만 서해에 발달한 갯뻘이 배와
유물을 덮어주어 침몰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
되면서 서해는 수중고고학의 보물창고로 재탄생되
고 있다.”
(해양유물전시관 내부의 첫들머리에 서 있는 수중고고학과 서해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전시관 안내문 모습)
(서해 바다길과 해양 교류의 역사 안내문 요지내용)
“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바다를 이용해 안팎을 연결하
고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고려시대부터는 바다위에
전국적인 유통망을 형성하고 멀리 아라비아 상인까
지 드나드는 국제적인 무역항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바다가 주요 교류의 통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국토
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의 특징과 해운의 이
점 때문이었다. 많은 화물을 단번에 멀리 빠르게 이
동시킬 수 있는 바다길을 국가운영과 경제활동에 적
극적으로 이용했다.지금까지 서남해에서 발굴된 난파
선과 유물들은 당시 생산 소비되던 물자와 그것이 오
갔던 과거 바다길의 모습까지 잘 간직하고 있어 해양
교류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
(해양유물전시관 내부로 조금 더 들어가면 나타내는 서해바다길과 해양교류의 역사를 소개하는 안내판 모습)
(여행기 내용 1부의 파일(1)은 여기서 끝냅니다. 파일 1개에는 사진 20장 이상을 수록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득이 파일(2)를 만들어 별도로 여행기 내용2부를 작성했습니다.)
(전시관 전시물 사진들은 2부에서 계속 볼 수 있습니다.)
(2부에서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