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와 박약회 초청으로 도산서원 춘계향사를 모시고
학봉선생 종택을 방문한 공자 맹자 종손과 연봉화상
左孟(中尹)右孔
공맹종손이 함께 방문한것은 도산서원(1574년 선조7년 창건)세워진 이후로 처음 있는일.
공자 79세 봉사종손 공수장(孔垂長)
듕귁 바럼으로 쿵췌이창 (대만 대통령 국책고문)
당초 도산서원 춘계향사에 초헌관으로 선임되어 방문했으나 중국 본토 곡부에
있는 공자묘에 아직 알현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며 세계적인 성인 공자의 종손
으로서 가문의 법도에 따라 초헌관을 사양하고 퇴계선생 위패에 기냥 머리만 숙여
알묘하고 오자마자 안동대학에서 공자사상등에 대한 특강을 실시하는등 아무나
만나주지도 않고 사진 찍히는걸 몹시도 싫어하며 항상 뒷짐 진체로 걸으며(부칸
어버이 수령동지 걸음걸이)자긍심이 하늘위로 찌러는 인간을 정상차림도 아닌
등산복 차림의 삼한 갑족인 연봉화상이 어께를 콱 눌러 한판 박음!!!
(입이 칫켜 올라간것이 화상의 기에 눌려 박기는 박았으되 영 흡족한 모양이... )
찍고 난 직후에 같이온 수행원이 난리 춤을 추면서 사진 찍으면 안된다고 하길래
화상 왈 ~~~날 보고 절이라도 하라 캔나 머씨라캐싼노!~~~
뒤에 수행해온 타이페이 민정국장에게 들은 바로 한국에 온 이래 개인하고는
처음 찍은 사진이래나 머래나~~ 더우기 화상이 한판 찍어 달라고 부탁해서
찍어준 사람이 바로 공종손 마누라라서 공가 입꼬리가 더욱더 올라간 모냥 ㅋ
(갸들은 사진을 찍어면 영혼이 어쩌고 저쩌고해서 잘 안 박는다카네...믿거나말거나...)
맹자 76대 종손 맹령계 (孟令繼) 본토 바럼으로 멍링지
맹령계는 대만과 한국의 의례절차가 약간 달랐지만 대만에서도 유학사상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만큼 앞으로 퇴계선생 학통을 이은 가문과 더 활발한 교류가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할 만큼 IT 전문가 다운 현실적 사고를 가진 느낌의 순수한 인간이었다.
화상이 한판 박자고 하니 이래 멋진 분은 평쌩 첨이라고 카고 순순히 박아 주길래
어께를 토닥거려여 주긴 줫는데...
(기실은 강압적인 내 행동이 겁나서 안박으면 뚜들겨 맞을것 같은 느낌 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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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의 氣에 눌려 孔선수가 좀 부더러워 진 듯
孔선수는 항상 부칸 아바이동무 초롬 뒷짐 진채로 ...
서원 향사에 초헌관을 거부(좋은 말로는 사양)한다 카민서
똥폼과 어께 기부스 이빠이한 공종손
孟 선수는 내가 박짜고 카마 항상 황송한 표정
맹종손과 나에게 사진 박아준 공종손 부인 (춘씨미, 유워리,시워리?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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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서후면 금계동 학봉선생 종택
촌사람 기 지기기 안성맞춤인 종택대문(5칸 솟을대문)
정문
학봉선생이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보고 느낀바 있어 지은 사랑채
사랑채 현판 (忠孝古家)
사랑채 현판 (박약진전)
별채 (풍부헌)
정원수와 수석들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으며 잘 정돈되어 있다
선생의 유물 보관장소인 운장각
원본 고산구곡가(雲章閣 안에는 이외도 국가 지정보물이 503점이 잘보관 되어있다)
退溪先生 屛銘
학봉선생 29세때 퇴계 선생으로부터 堯舜이래 周子까지 聖賢이 전한 心法을 차례로
적은 80字 손수 쓴 병명을 받았다.
(이 병명을 이댁 현 宗婦가 50년전 갓 시집와서 5년동안 수를 놓아 병풍을 만들어
큰 제사때만 사용한다고 한다)
운장각안에 각처에서 보내온 문집류들
(嶺南 南人 門中에 내노라는 家門에서 文集을 만들면 이宅으로 보내 인가를 받아야만
세상에 내어 놓을수가 있었다. / 寒州선생 문집은 퇴자를 맞았다나...)
학봉선생 기념관
학봉선생 15대 종손 金種吉씨 가 공맹 종손과 일행들에게 유물을 설명하는중
공종손은 역시나 뒷짐지고 맹손은 공수
퇴계선생의 衣鉢을 전수하는 뜻의 친필을 종손이 자랑스러이 설명
박약양지 연원정맥(堯임금부터 마지막 周子를 칭송하는 병명의 끝구절)
(박문약례 두 가지를 모두 지극히 하였으니 도통의 바른맥을 이었도다)
이屛銘에 對하여 葛庵 李玄逸先生은 퇴계선생의 衣鉢을 학봉선생에게 전수한것이라고
하며 大山 李象靖선생은 학봉선생은 마침내 연원수수의 취지와 혼자 만에 전하는
은밀한 부탁의 뜻을 받게 된 것 이라고말했다
이로써 退溪學脈은 학봉을 동방유학 祖宗의 嫡傳제자 첫 脈으로 하여 조선성리학의
正脈으로 면면히 전승되고 한말 의병 독립운동에 까지 이른다.
선생께서 사용하셨던 홀기,옥문진,벼루,산가지,패도等
선생께서 사용하신 울나라 최초 안경
선생 문집
나의 11대조 遁窩府君의 師夫(갈암 이현일)와
밑줄 왼쪽에서 네번째 心齋 조긍섭(화상 조모님의 오라버님)이 보인다
안채 정당 현판 (문충고가 : 선생의 諡號)
(道德博聞曰 文 危身奉上曰 忠)
화상의 문숙공할배의 시호이신 道德博聞曰 文 範圍天地曰 肅 보다는
좀 약해보이는듯 ㅎㅎ
眉首선생 글씨의 안채 현판 (光風齊月)
안채에 걸려 있는 집사분정기
(종헌관이 두 사람)
종택 우측 맨위에 자리한 사당
사당내 위패 봉안소
文忠公 鶴峰先生 位牌
위패엔 有明朝鮮 ....벼슬명이 자그만치 84字를 한줄로 쓰여져 잘 보이지도 않고
엽줄에 15대 종손 종길만 보였다.
공수장은 여기서도 절은 하지않고 알묘만....
이댁 종부 진성이씨 부인(퇴께선생 대종손 근필翁 女弟)
이전까지 기업체 회장 사모님이란 분위기보다 그저 낙향 불천위 종부로서
봉제사 접빈객 일에만 힘쓰고 살아가는 긍지에 찬 모습이었으나 내가
종손은 죄인이라고 말하자 아무말 없이 고개를 떨구며 그저 죄송한 마음인듯...
(불청객인 나에게 극진히 대접해주어 미안할 따름)
이댁 종부의 솜씨 (귀한 분 온다고 정성이 많이 들어 보였다)
송이다식은 연곡과 같고 약과는 연곡보다 작았으나 맛은 같았으며
대추강정이며 들깨강정과 흑깨강정과 호두속 곶감은 많이 본 음식이었으나
장미 떡은 참말로 오랜만에 본 음식이었다
약밥과 화전
참꽃 화전은 정말로 오랜만에 먹어봤다.
강밥은 나이롱 이었으나 내가 좋아하는 유과는 예전에 먹어본 바로 그맛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때 먼저 가서 몇개 맛 본후 찰칵 ㅋ)
잣 띠운 단술은 연곡 단술과 똑 같은 맛 이어서 옆자리에 놓인것까지 먹어 치우고 왔다.ㅎㅎ
이댁 사랑 주인의 지팡이 인듯 보이는 명아주 작지
공 맹 학 종손
공종손 부부.맹종손부부와 학봉 종손의 茶談
공맹종손을 수행해온 시다바리들
종택에서 기자회견하는 황려금여(黃呂錦茹·63·여)
(타이베이 민정국장 겸 공묘관리위원회 주임위원인 .이번 방문 수행대장)
종택앞을 오른쪽에서 왼짝으로 휘감아 도는 金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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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으 11代祖 遁窩府君께서 鶴峰 선생의 再傳 제자이신 葛庵 선생 門人이시라
그전 부터 通交하고 지낸 내앞 淸溪公 통뼈有司 愼堂 金元復 할부지가 초청해서
간것인데 전날 새벽 3시까지 혼자서 퍼 마시다가 씻지도 않고 잠바 차림의
불청객이 안동 不遷位 宗孫 스물 두분을 만나 안 쫄리고 대접받고 온건
三韓 갑족중에 首甲族이며 蓮峯山 정기 타고난 和尙의 배짱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