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밥 짓듯 천천히 평화를 익혀갈 상징으로서의 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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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6]
어린 시절, 어른들의 말씀에 재빠르게 대거리를 하려 들면, 어른들께서는 "얘가 어디서 빨갱이 물을 먹었나, 왜 이리 말이 많아?" 하셨습니다. 자유라는 단어에서 설렘을 느낄 만큼 자랐을 즈음, 부모님의 말씀에 "그건 제 자유 아닙니까?"라 하면, 또 어른들은 "빨갱이들처럼 웬 '자유'를 찾고 그러니?"라 하셨지요. 특히 전쟁 통에 이북에서 내려오신 제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빨갱이'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연거푸 계속되는 회의를 성가셔 하던 어떤 선배는 "빨갱이들처럼 맨날 회의야?"라고 했지요. '빨갱이'는 어쨌든 다루기 어려운 사람들, 사회 부적응자, 혹은 불순한 사람들을 상징하는 대명사였습니다. '빨갱이'가 왜 그리 나쁜 것인지는 알 겨를도, 필요도 없었지요. '빨갱이'는 무조건 나쁜 것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화합할 수 없는, 혹은 화합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다는 오래 된 생각의 발로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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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마도 저 혼자만의 경험은 아니겠지요. 한 조상의 후손으로 태어나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비극의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이 겪을 수밖에 없는, 그러나 반드시 지워야 할 아픈 상처입니다. 심지어 전쟁 통에 하나의 마을을 남과 북의 군인들이 번갈아 점령하면서, 서로를 마구잡이로 학살했던 참극의 경험까지 우리에게는 남아있을 정도이니, 오죽하겠습니까.
한국전쟁 발발일이 들어있는 지난 달 유월은 그런 옛 기억을 돌아보게 하는 달이었습니다. 아픈 기억의 흔적은 산산히 흩어져 남은 게 없어도, 그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남은 상처만큼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갈수록 더 깊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결코 한 자리에서 만나려 하지 않고, 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제도 좌와 우가 따로 나누어 치르는 곳이 있습니다.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상처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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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중구 중촌동이 그런 마을입니다. 한국전쟁 중에 이 마을을 먼저 점령했던 이북의 군인들은 당시 이 마을에 위치한 대전감옥에 수감돼 있던 좌익 인사를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무고한 양민까지 함께 학살한 이른바 '산내골 학살사건'이 그 사건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참혹한 일이건만, 점령군이 바뀐 며칠 뒤에는 반대편인 우익 인사를 같은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학살 처형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한 자리에서 수천의 목숨이 무너졌습니다. 오로지 서로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극의 중심 자리는 대전감옥이었지요. 그러나 대전감옥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번듯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식민지 시대 때 일본인들이 처음 지은 대전 감옥의 흔적으로 남은 것은 네 곳에 세웠던 망루 가운데 하나와, 유일한 식수원이었던 우물터 뿐입니다. 아픈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옛 건물의 흔적을 없애야 하는지, 아니면 오래 남겨두고 바라보면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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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참혹한 현장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습니다.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도 아니고, 보호수도 아닌, 아무데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저그런 왕버들입니다. 나무 앞에는 그래서 문화재청이나 산림청에서 세운 안내판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느 안내판보다 더 예쁜 안내판이 있습니다. 안내판에는 나무 이름을 '평화의 나무'라고 했고, 안내판을 세운 사람들은 '그루터기' 라는 이름의 마을 역사 탐험대라고 돼 있습니다.
안내판을 세운 사람들은 나무의 나이를 60살 정도로 짐작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나무는 백 살은 넘긴 듯합니다. 왕버들이 워낙 쑥쑥 잘 자라는 나무라 해도 60살은 훨씬 넘어 보입니다. 나무의 키는 10미터 가까이 됩니다. 키보다 더 장해 보이는 건 가지펼침 폭입니다. 나뭇가지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발맘발맘 걸어보니, 그 폭이 무려 14미터나 됩니다. 이 정도면 다른 왕버들에 비교해 보아, 1백 살은 넘어 보인다는 생각입니다. 줄기가 비스듬히 자랐고, 줄기 안쪽이 조금 썩어들긴 했지만, 아직 청년기의 건장함을 유지한 나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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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말 걸기'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마을 행사에 참가한 대전 시민들이 평화의 나무를 둘러싸고 평화 이루기를 다짐했다. |
마을 사람들이 '평화의 나무'라 이름한 이 왕버들은 일본인들이 이 자리에 '대전감옥'을 세우던 1910년대에 뿌리를 내린 나무입니다. 감옥 곁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무는 바로 그 연못 가장자리에서 자라던 여러 그루 가운데 한 그루입니다. 건축과 조경에서 오래 전부터 세심하게 신경을 썼던 일본 사람들이 감옥 곁의 연못 주위에 나무를 심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그때 심어 키우던 많은 나무들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생명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지은 대전감옥은 여러 변화를 거치면서 한국전쟁에까지 이릅니다. 그때 드디어 앞에서 이야기했던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무차별하게 목숨을 앗아야 했던 참극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의 사정을 돌이켜 볼 수 있는 흔적은 모두 사라졌지만, 당시의 참극을 똑똑히 바라보았을 생명체로서 한 그루의 왕버들이 유일하게 남았습니다. 그리고 비극의 상처를 이겨내서 평화를 이루자는 마을 사람들은 나무에 '평화의 나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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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이라 이야기하는 지난 유월 들면서 '평화의 나무'를 만나고, 그가 속 깊은 곳에 감추어두었던 참혹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려 마음 먹었습니다. 몇 가지 일정에 밀려 나무를 찾아간 것은 유월 말 되어서였습니다. 때마침 나무를 돌아보는 '마을에 말 걸기'라는 제목의 마을 행사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대전문화연대와 마을의 어린이도서관 '짜장'을 운영하는 마을 사람들이 진행한 행사였습니다.
행사를 이끈 풀뿌리여성 마을숲 공동대표 민양운(49)씨는 나무 앞에 서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비극을 고스란히 바라보았을 나무가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옛일을 잊으려고만 했지 묻지는 않아요. 이제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게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길이에요." 그리고 그이는 "평화는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밥을 짓듯이 우리 스스로가 조금씩 익혀 가는 것"이라고도 덧붙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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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사람 이야기 (84) - 대전 중촌동 평화의나무] 신문 칼럼 원문 보기
위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대전 중촌동 평화의 나무를 주제로 쓴 신문 칼럼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일부러 잊으려고만 한다고 해서 전쟁의 상흔이 사라지는 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참극의 흔적을 똑똑히 바라보는 것이 이 땅에 이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다짐이지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 그루의 나무에 지극 정성을 들이는 마을 아낙네들의 안간힘은 더없이 훌륭하게 다가옵니다.
나무를 만나고 돌아온 이틀 뒤에 다시 나무를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요즘 진행하는 KBS-1TV의 '6시 내 고향' 프로그램 중의 짧은 코너 '나무가 있는 풍경'의 촬영을 위해서였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를 통해 지나온 비극을 기억하고, 바로 이 자리에서 밥 짓듯 평화를 이루어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리고 싶었던 겁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방송 프로그램을 다시보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6시 내고향 - 나무가 있는 풍경 - 대전 중촌동 평화의나무] 다시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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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나무 굵은 줄기에서 여린 잎이 마치 마을 사람들이 이루어가는 평화의 싹처럼 돋아났다. |
평화의 나무를 더 많은 사람들이 바라본다고 해서 갑자기 전쟁의 상처가 아무는 건 아닐 겁니다. 또 제가 칼럼에 쓴 것처럼 '호국보훈의 달'을 '평화의 달'로 바꾸어 부르는 일도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나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고스란히 바라보았던 한 그루의 나무를 기억하는 것은 밥을 짓듯이 아주 천천히 우리 땅에 평화를 익혀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내려놓지 않으렵니다.
장맛비 이어지는 눅눅한 날씨입니다. 건강에 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