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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빛과 나눔" 원문보기 글쓴이: 설ㄲㅏㅊㅣ
히브리서 11:3-6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는 '믿음'>
히브리서 11:8~16 <믿음의 선진은 약속한 땅 가나안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였다.>
히브리서 11:17~22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11장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믿음의 실화들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말하였다면,
12장은 지금을 사는 믿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성장되고 확장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11:39,40]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 하나님에 의해 믿음을 인정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구약의 선진들도 여러 사건과 예표를 통해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구속의 때를 바라고 기다렸으나 육신의 생명이 다한 까닭이다.
믿음 안에 사랑과 소망이 있다. 내가 하나님을 믿음은 사랑이 근본이 되어 자연적으로 소망하게 된 믿음이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만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해질 수 있었다면 메시아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넘어 그 이상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나타나야 했던 것이다. 선진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오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들의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 사람을 위하여 예비하신 가장 좋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사랑’이다. 그 사랑이 되어 오신 사람 예수 그리스도이다. 인류의 역사가 구약으로 종결되었다면(지금의 우리가 없다면) 예수 이전의 그들도 온전함을 입지 못할 것이다. 죄와 사망 때문에..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전과 후 모두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어야 완전한 구속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에 따른 순종으로 인한 우리의 공로가 아닌, 적극적인 사랑이신 하나님의 생각과 행동이 우리에게 나타나심으로 죄와 사망을 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살게 되는 하나의 인류를 원하신 것이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그들이 현재 보고 있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곁에서 돕고 있는 믿음의 증인들이 있다. 이들이 나와 함께 달리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무겁게 하는 것들이 있다. 세상의 지식, 명예, 혈연, 두려움, 고집, 자존심, 분주함 따위... 이것들이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구속하고 더디도록 얽어매는 습관이 되어 경주에 집중하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곤 한다. ‘경주(아곤)’는 투쟁이고 싸움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겁고 얽매는 것들을 벗어버리란다. 겉옷을 벗듯이 옛 사람을 벗으면 된다는 것이다. 옛 사람이 싫어지고 다시는 안하고자 하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다시 불러오는 습관을 바꾸는 인내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무조건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만이 인내는 아닐 것이다. 현재의 소중함을 아는 자가 인내하는 자이다. 바로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내 영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자가 인내하는 자이다. 내일과 모레, 10년 후를 사는 것이 아니라 당장 닥친 지금 믿어 내 힘을 빼고 잠잠히 자리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인내는 반드시 주님 앞에 서는 결과로 나타나야 한다. 인내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 경주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선진들은 그들의 경주를 이미 오래전 끝마쳤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한다. 곧 오신다는 기별을 듣는 우리가 인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한 절에 믿음·사랑·소망이 다 들어가 있다. 우리 여정의 시작부터 과정과 결과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아르케고스)’는 우리가 말하는 ‘주님’의 ‘주(퀴리오스)’가 아닌 ‘창시자, 통치자’를 말한다. 이는 ‘우두머리’, ‘인도하다’, ‘가져오다’, ‘운반하다’, ‘생기게 하다’의 본래적 의미에서 나왔다.
또한 ‘온전하게(텔레이오테스)’는 ‘완성하다’, ‘완전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절대자를 알고 모든 선한 일을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의 시작과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을 시작하시고 믿음을 다루시며, 자신의 믿음으로 자신 안에 있는 자들의 믿음을 온전케 하여 앞장서 하나님께로 데려가는 일을 완성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이 믿음은 존재의 근원을 아는 데서 생기는 믿음이다. 믿음이란 대상과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아버지께서 최선을 이루실 것을 믿은 대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고, 아버지의 사랑을 이루신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바라보자(아포론테스)’의 본래 의미는 ‘주의 깊게 생각하다’이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에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그분께 집중해야 한다. 예수를 통해서만 우리의 믿음이 지속되어 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단지 내 죄를 대속하신 나의 구원자이시며, 나를 잘 되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태초 이전 하나님과 함께 계실 때부터 이곳에서 사시기까지, 그리고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중보하심까지, 그분의 모든 존재와 영역이 나의 깊은 묵상이 되어야 하고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하겠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은 자신의 희생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하나하나의 영혼들이었다.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중에서]
“너희의 이름들! 그 이름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내 정맥에 힘과 기능을 다시 주기 위하여 주입된 약 한 방울이었고, 이름 하나하나가 돌아오는 생명, 다시 오는 빛, 돌아오는 힘이었다. 인정 없는 고문을 당하면서 나는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부르짖지 않고, 하나님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당신께 바치는 희생에 대하여 너무 엄하시고 불공평하시다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하여 너희 이름들을 자꾸 불렀고, 너희들을 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너희들에게 축복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너희들을 마음속에 지녔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세상에 태어나는 시간이 왔을 때, 나는 하늘에서 몸을 숙여 너희들이 오는 것을 동반하였고, 세상에 새로운 사랑의 꽃 한 송이가 태어났고 그 꽃이 나를 위하여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몹시 기뻐하였다.
오! 나의 축복받은 자들! 죽어가는 그리스도의 위안! 내 어머니, 사랑하는 제자, 독실한 여인들이 내 죽음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너희들도 거기에 있었다. 죽어가는 내 눈은 내 어머니의 가슴이 찢어지듯이 슬퍼하시는 얼굴과 동시에 너희들의 다정한 얼굴도 보았고, 너희들을 구원하였기 때문에 기쁘게 눈을 감았다. 하나님의 희생에 값어치가 있는 너희들 말이다.”
그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던 것은 세상과 자신의 유익을 따르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속하는 영원을 바라보신 믿음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 사업의 완수를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았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개의치 아니하다(카파프로네오)’는 ‘불리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위해 맞닥뜨리는 수치와 망신도 결코 불리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십자가와 수치가 곧 아버지께 영광이 될 것을 아셨고 그로 인해 구원될 많은 자들을 얻는 유익을 보셨기 때문이다.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한다. 땅에서의 부끄러움에 개의치 않으시더니…하늘 가장 높은 곳에 오르신 것이다. 사이 과정이 생략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생략된 과정이 우리에게는 1절의 인내의 경주이다. 나의 의지가 하나님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초월하면 그 순간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고통과 수치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하나님 때문에 기쁨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자가 어느새 하나님 곁에 있게 되는 것이다.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우리가 받는 고난과 핍박이 아무리 중하더라도 예수께서 당하신 것보다 더하겠는가. 세상 어느 누구도 예수께서 겪으신 것과 똑같은 고통을 참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죄악 된 세상에 아기로 나실 때부터 공생애를 지나 지금까지 당신을 거절하고 불순종하는 일을 참으신(인내하신) 예수, 그를 통해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가장 잘 이해하시고 고려하실 수 있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 이것이 눈에 보이는 환경과 나 자신을 초월하여 남은 경주를 끝까지 뛰는 힘이 될 것이며 되어야만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14]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형제들과 함께 하지 않고 혼자서 믿음과 인내의 여정을 가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때론 지치고 피곤하여 낙심될 때에 격려해 주고 붙들어 주는 동료들이 있기에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나 혼자선 할 수 없는 일이 각자가 예수를 닮은 사랑의 공동체이기에 가능하다.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것은 전투에 이긴 자가 되려면 적극적으로 임하라는 뜻이다. 사역과 훈련에서 나를 들이밀어 두들겨 맞고 만신창이가 될지언정 죽도록 내버려두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실제 피를 흘리지 않아도 죄와 상관없어지려는 몸부림과 노력을 주님이 피흘림으로 인정하신다.
나의 죄와 우리의 죄를 청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흘리기까지 아버지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를 생각하라. 죄와 싸우되 제대로 싸우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죄와 상관없이 살아지게 될 것이다.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잠언 3:11,12]
11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 주신 권면의 말씀을 우리가 잊었으니 여기서 다시 반복하신다.
주의 징계하심은 질서를 가지고 지혜로이 행하신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꾸짖지 않으신다. 먼저 말씀과 가르침으로 권면하신다. 그것도 잊으면 5절처럼 반복하여 말씀해 주신다. 그럼에도 자녀가 부모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면 꾸짖으신다. ‘꾸지람(엘렝코)’은 ‘드러내다, 빛으로 가져오다’에서 ‘견책하다’, 그리고 ‘처벌하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꾸지람에도 의지적으로 반항하며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바른 길로 접어들도록 채찍질이 가해지는 것이다.
[잠언 13:24]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우리의 마음속 미련한 것이 있으므로 그걸 쫓아내시려 채찍질하신다. 내가 나의 이유를 들이대는 영적으로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과 이유를 알지 못하는 미련함을 꾸짖고 쫓아내심은 나를 사랑하심의 또 다른 표현이니 참소와 부정으로 방향을 틀지 말라. 주의 책망은 죄를 이기는 법을 훈련하고 생명을 전수하는 것이니 겸허히 인정하라. 환경과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마음과 모든 감각을 기울여 듣고 나를 돌아보고 점검해 보라.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징계를 징계로만 받아들이는 자에겐 징계로만 남는다. 나에게 빠져있어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는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나에게 있는 원인과 이유 때문에 두신 징계는 하나님의 공의를 담고 있다.
7절의 ‘참음(휘포메노)’은 ‘~아래(휘포)’와 ‘상황 또는 기대 속에서 머물다(메노)’가 합쳐진 말로 하나님의 뜻 아래 머물러야 함을 말하고 있다. 머무름은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하심을 바로 알아듣고 그대로 순종하기 위한 훈련인 것이다. 그리고 ‘대우하시나니(프로스페로)’의 본래 의미는 ‘~의 곁에’, ‘데려 가다’, ‘끌고 가다’이다. 아버지의 뜻을 찾고 구하는 믿음의 장성한 자를 곁에 두려 데려 가시겠다는 의지이다. 어떻게든 그분 가까이 끌어다 놓으시려는 그분의 뜻에 나를 복종시켜야 마땅하지 않은가.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로 삼으시려 함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왕권을 허락하시려는 뜻이다.
사생자는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다. 누가 남의 아이를 선뜻 훈계하겠나. 자기 자식이기에 사랑하기 때문에 훈계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면 친자 됨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나라의 법에 저촉되는 자가 된다면 어떨지 생각해 보라.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만지심을 거절한다면 하늘과 땅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육신의 아비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인생을 강요하려, 세상에서의 잘됨을 위하여 자녀를 교육시키는 경우가 많으나 영의 아버지께서는 당신과 영원을 함께 할 수 있는 영적인 성숙과 거룩함이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 내게 있는 연단이 하나님 입장에서 얼마나 강도를 낮추시고 배려하시는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느낄 수 있다. 내가 얼마나 빨리 깨닫고 돌이키느냐에 따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만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0절의 ‘잠시’에 주목하자. 이곳에서의 연단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참여하고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하늘의 영원무궁한 시간에 비하면 땅의 연단은 잠시 잠깐인 것이다.
‘징계가…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징계를 받을 때는 말 그대로 ‘슬퍼 보일’ 뿐이다. 슬픈 게 아니라 슬퍼 보이는 것일 뿐, 훈련과 연단을 통해 내 안에 자리 잡으려는 낙심과 절망 따위의 감정은 허상임을 알고 얼른 그것과 상관없어져야 한다.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연단 받은(귐노스) 자’의 본래 의미는 ‘벌거벗은’, ‘겉옷을 입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연단 받은 자들이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의와 평강으로 채우신단다. 새 옷,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자가 풍성하길 원하신다.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더욱 힘써 알자.
[이사야 35: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소진된 상태이다. 손과 무릎이란 지체는 자기 스스로 힘을 낼 수 없으므로 머리로부터 지시를 받아야 한다. 지체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곧은 길이 있어야 그것을 보고 걷고자 하는 의지를 낼 수 있다. 너희 발이 걷기 위한 곧은 길을 너희가 만들란다. 이 ‘만들다(포이에오)’는 ‘행하다, 실천하다’란 뜻을 갖는다. 곧은 길은 하나님께 가는 가장 빠른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예수의 삶을 행하고 살 것은 너희라는 것이다. 그런 너희를 통해 너희가 그랬던 것처럼 저는 다리를 가진 다른 이들로 하여금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라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