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10 용지30회 옛친구 사창산 와룡산 답사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용지30동창생 5인이 고향산천을 탐방했노라.
청춘을 감쪽같이 흘러 세월을 붙잡을수 없어 석양의 시간에 영수친구가 호남선 와룡을 지나며 사창산과 와룡산이 눈에 들어와 고향의 향수가 그리워 평고 용지식당에서 모임을 주선, 기꺼이 동창생 다섯명이 만나게 되었네.
명당리 석권 평고 영수 사산리 정노 수화리 희순 하링이 동화
고향 벗 3년 객지 벗 10년이란 말이 있는데 장유유서의 유교적 사회질서가 뿌리깊은 우리나라에서 2, 3살 차이가 나면 친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고향 벗이라 하면 대개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이여.
사실 희순이는 47년생으로 세 살이나 더 먹은거야.
동창생이란 인연 때문에 희순이 친구한테 형님대접 못해주어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이여.
사창산!
소풍을 자주갔던 사창산에 올라 기억을 떠 올려 보았제.
어린시절 사창산은 석산과 대나무가 많았는데 대나무가 더 번식하여 있었으며, 둘레길로 잘 조성해 놓아 곳곳에 헬스기구도 설치하여 주민들이 산책하기 좋게 단장해 놓았으며 벗꽃이 만발하였네.
영수친구가 와룡산에도 올라보자하여 와룡 서낭댕이로 이동 와룡산에 오르는 길을 찾아 올라보았는데 중턱의 최면장 묘역까지만 길이 있어 정상은 가 보지 못하였다.
와룡산은 내가 어릴적 수도 없이 올라 새도 잡고 삐비도 뽑아먹고 바위에 올라 친구들과 소리쳐 놀던 기억이 있는 곳이여.
사창산과 와룡산을 답사후 그리운 추억의 고향산천 김제 용지를 뒤로 하고, 5월의 만남을 약속하고 정노는 군산으로 석권 영수 동화 희순은 익산으로 귀로 하였다.
정노 영수 석권 희순 다음 만나는 날을 기약하며,
황혼의 계절에 열심히 활동하여 건강관리 잘 하시고 집안에 행운의 여신이 깃들기를 소망하나이다.
감사합니다.
영수가 지어보낸 고향의 시를 느껴보세.
전라도 김제땅 얕은
구릉을 끼고있는
사창산 아래가
나 태어난 고향이라네
전쟁이 끝난후 그어렵던
유소년부터
익산으로 진학할때 까지
난 와룡산을 지붕삼아
유년시절,소년시절을 보냈다네
소꿉친구들과 들판을 뛰놀고
남의밭 무서리,콩서리하여
구어먹다 산불을 내고
놀라 도망치던일
그렇게 뛰놀던 고향을 등지고
살아온 세월이 몇해던가
이제 늙어 아무도
반겨주는곳 없는데
나 이제 고향을 가보니
고향은 변함없이
어머니품 같이
나를 안아주네
내 할아버지가,내아버지가
뭍히신 곳
나 또한 묻혀야 할 그곳
이제 늙어 선산을 돌아보니
살아 아버지를 뵙는 반가움과 슬픔과 회한이 범벅되어
내마음 스쳐가네
아, 고향은 이런곳이다!
언제나 찾아오면 변함없이
말없이 안아주는곳
이제 늙어서 처음 알았네
처음으로 철 들어가네
<와룡산 중턱에 자리한 최일운의 묘역을 답사하였다.
일본제국주의 시절 면장을 엮임하였던 최승현의 장남 최일운의 묘역인데 잘 단장해 놓았다.
최일운은 최승현의 장남으로 우석대총장을 역임했으며 철학박사학위
1915.3.13.-1995.1.6. 80세 사망
일본 조도전대학 철학 전공
전북대학원장 우석대총장역임하였다.>
<와룡산은 최씨집안의 선산으로 최씨집안이 유수한 집안이라 비석과 상석이 많았는데, 특히 최승현 부친묘가 비석과 상석이 있고 최승현면장이 묘역을 단장할때는 잘 해 놓았겠지만 전혀 관리가 않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현대사회가 어찌나 바쁘고 봉분관리에 관심이 없는 것은 우리나라 공통된 대부분 현상인 것 같이 느껴졌다.
최일운의 묘역 부근에 최일운의 부친 최승현과 최일운 조부의
묘역이 있는곳인데 묘역을 방치하여 풀이 무성하다.
최일운의 아버지 최승현의 일생
생몰 : 1892.8.2-1979.3.2. 87세 사망
최승현은 용지면 와룡리에서 태어나 용지국민학교를 설립했으며 와룡역을 유치 했고,
해방전 1935년 용지면장(영세기념비에 세기여 있음),
해방후 용지면장(1946.4.8.-1947.10.2.)을 역임했다.
부인은 김영김씨 부용(1889.-1957)으로 일찍 사별했다.
신문학을 일찍 터득하여 자녀교육에 진력 노력하여 성공시겼다.
자녀는 6남2녀를 두었는데, 일운 영명 영범 영의 영정 영종 딸2이다.>
☛사창산
사창산 성지는 현 용지면 구암리 면소재지 뒷산 사창산에 있습니다. 사창산은 호남선 와룡역과 부용역 중간지대에 위치한 해발 63m의 낮은 언덕배기에 불과하나 이 산이 지닌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사창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 인근 지방 즉, 개토, 모촌, 금굴, 공동, 회포, 연산, 백석 등 7개 면의 국가 상환 곡을 수납창고 형태로 관리하였다는데서 유래하였습니다. 이 사창산은「수동산」이라고도 부르는데, 백제시대에는 수동산현이 있었던 곳이며, 통일신라시대에는 평고현이 위치하기도 한 고적지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용지면 서부일대가 잡초지로서 관개시설이 발달되지 않아 만경강 하구가 개수되기 이전 서해의 바닷물이 수동산 아래까지 넘쳐 사창산에 보관한 정부 양곡 및 군량미를 용암천 하구에서 배에 싣고 부용천을 따라 만경강으로 나가 군산 앞바다로 해서 서울로 보냈다는 곳입니다. 통일신라때에는 정부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쌀과 군량미를 조선시대에는 구휼미를 보관하였다가 흉년이 들거나 천재지변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울 때 보관했던 쌀을 풀어 어려운 백성을 구했던 곳입니다. 지금도 사창산 등성이에는 썩은 쌀알이 발견되곤 하여 앞서 말한 설명을 뒷받침하고 있는데, 사적지로 보존되지 못하고 등성이의 파헤쳐진 밭에서 아무렇게나 곡물이 자라고 있으며, 양쪽(남,북) 등성이에 석산이 개발되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 크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자료참고 : 용지면사무소 홈페이지
사는일
사는 일이 너무 바빠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네
청춘도 이와 같아
꽃만 꽃이 아니고
나 또한 꽃이었음을
젊음이 지난 후에야 젊음인 줄 알았네
인생이 길다 한들
천년만년 살 것이며
인생이 짧다 한들
가는 세월 어찌 막으리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칠월과 같은 사람들아
피고 지는 이치가
어디 꽃 뿐이라 할까...
인생의 의미
우리는 흔히 왜 사느냐고
인생의 의미를 묻습니다.
그러나 삶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인생은 의미를 갖고 사는게 아니라
그냥 사는 겁니다.
삶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마세요
그러면 또 하나의 굴레만 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길가에 피어 있는
한 포기 풀꽃입니다.
길가에 풀꽃처럼 그냥 살면 됩니다.
"나는 특별한 존재다. 나는 특별해야 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자신의 하루 하루 삶에 만족 못하고
늘 초조하고 불안하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알면
특별한 존재가 되고,
특별한 존재라고 잘못 알고 있으면
어리석은 중생이 되는 겁니다.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길가에 피어 있는 한 포기 풀꽃같은
존재라는 것을 자각한다면
인생이 그대로 자유롭습니다.
내가 남보다 잘 나고 싶고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인생이 피곤한 겁니다.
진정으로 자유를 원하고
행복을 바란다면
마음을 가볍게 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스스로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삶이 별게 아닌 줄 알면
도리어 삶이 위대해 집니다.
- 출처 : 벨루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