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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위대한 시조·조상을 왜 신화로 격하시켰을까
한민족을 대국(大國)·군자국(君子國)으로 찬양한 중국
하늘의 자손 천민(天民)을 자처하며 사해(四海)에 위용을 떨치던 우리나라가 조선조에 중국을 섬기는 자원반식민지(自願半植民地)로 변했다. 조선조 말기에는 조선(祖先)이 살던 강토마저 일본에 강제병합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처럼 조선이 일본에 예속되는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은 인간을 사랑하던 군자국(君子國)이 역사와 전통의 사상을 잃고 민족적 자존심과 주체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당쟁에 영일(寧日)이 없어 소인국(小人國)으로 타락해 타민족에 예속되는 소국(小國), 망국(亡國)으로 전락했다. 이후 우리의 역사는 일제에 의해 뒤집혀 진 나라가 됐다.
중국정사(正史)와 중국경전(經傳)에 ‘한민족(韓民族)의 특징은 인(仁)하여 인간을 사랑한다. 한민족이 최초에 인간을 사랑하는 인(仁)을 발견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중국문화의 개척자 순(舜)군과 중국문화의 대종사(大宗師) 공자(孔子)가 한민족(韓民族)이라는 것도 분명히 기록하며 한국을 군자국(君子國)이라고 찬양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예맥이 2천 년 간 중국을 정벌한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중국병가(中國兵家)의 대종사(大宗師) 강태공(大宗師姜太公)이 그 민족을 한민족(韓民族)이라고 썼다. 강태공은 한국을 대국(大國) 구국(舊國)이라고 찬양하며 ‘한국에서 활과 화살만을 수입할 것이 아니라 문화까지 수입해야 한다’는 결론까지 덧붙였다. 이것은 우리가 중국을 앞서 있었고 우리역사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진리의 기록인 것이다.
역사를 보면 타민족 찬양에 인색한 중국이다. 나아가 중국은 자민족만이 사람이요 타민족은 짐승이라고 하시(下視)하는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에 물들어 그것을 선전해 왔다. 그런 그들이 정사(正史), 경전(經傳)을 통해 우리를 군자국과 대국이라고 명기(明記)하고 찬양하면서 위대한 민족으로 결론까지 내린 사실을 위조라고 말할 수 없다. 이를 보면 우리 민족이 인류 최초의 문화를 만들고 번영시킨 사실과 고대부터 강대국으로 발전한 사실은 숨길 수 없는 진리다. 우리는 이 같은 위대하고 찬란한 우리 역사와 전통을 다시 살려서 식민사관에 취해 졸고 있는 현실을 개조하고 위대한 한국사상을 재발견해 민족적 자주성이 회복되도록 해야 한다. 자랑스러운 민족적 주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절대과업이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다.
우리의 사고(思考)는 분명히 바뀌어져야 한다. 지금 한국 국민의 사고(思考)는 일제에 의해 망가질 대로 망가져 구제불능의 상태가 돼 버렸다. 애국심과 민족애는 찾아볼 수 없다. 기초적인 질서의식 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으니 국민의식 개혁이 필요하다. 가치관이나 위계질서도 엉망인데다 법질서마저 지키지 않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없는 것은 위대한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다. 우리의 의식이나 사고의 변화 없이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 이기적인 사고는 남을 배려하는 사고로 바뀌어져야 하고 애국애족의 사고전환이 시급하다. 윌리암 제임스는 “사고(思考)가 바뀌면 행동이 변하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변하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변한다. 결국 인간의 생애(운명)는 그 사람의 사고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했다. 지금 우리는 자기이익만을 내세운 채 그런 사고와 의식에 함몰 돼 있다. 이런 상황은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이번 칼럼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및 그 수법의 치졸성과 이를 입증할 상고시대의 위대한 인물 등에 대하여 살펴보자 한다. 특히 중국이 자신들의 위대한 시조·조상을 일개 신화로 격하시키는 이해못할 행동을 하고 있는데 대한 속사정을 엿보고자 한다.
중·일의 역사변조, 대원칙 정해 조직적으로 벌였다
중국의 한족(漢族)은 우리 한민족이 두려워 고대부터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그들의 역사에 흉악한 노예(匈奴)라고 나쁘게 기록했다. 더불어 그들은 한(漢)나라가 대단히 강한 나라로 포장했으나 그 허구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가관이다. 중국 역사의 자존심이라고 하는 한나라는 우리를 지배하거나 전쟁에서 우위에 선 적이 없는 나라다. 이 한(漢)나라는 우리와의 전쟁에서 패배가 일상이었다.
이에 북방민족을 흉악한 노예(匈奴)라고 나쁘게 기록하고 있는 한(漢)나라는 이런 흉노에 조공과 조공여(朝貢女)를 바쳤다. 그렇게 국가를 유지한 한나라가 우리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중국은 역사를 뒤 바꾸어 쓰고 있다. 공자(孔子)가 그 사상을 펴려고 천하를 주유하다가 뜻을 이르지 못하자 역사를 바로 써서 치란(治亂)의 원리를 후세에 알게 그 사상을 당세에 펴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해 만년(晩年)에 중국정사인 ‘춘추(春秋)’를 저술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저술의 수법에서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의 수법을 창안했다. 즉, 중국이 타민족에게 패배한 사실을 삭제하고 도리어 승리로 위조했다. 후대 중국사는 공자의 수법을 본받아 위조를 기본으로 중국인 중심의 역사기술을 정립했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기법은 휘치필법(諱恥筆法)이다. 다시말해 ①한족과 중원 나라의 수치스러운 역사는 숨긴다(爲漢中國諱恥) ②한족과 중원의 나라는 높이고 외국은 깎아내린다(矜炒而陋夷狄) ③한족에 관한 국내사는 과대하게 하고 남의 역사는 작게 쓴다(祥內略外) 등을 원칙하에 두고 우리역사를 철저하게 깎아내렸다. 중국은 나아가 엄연히 있는 역사를 아예 뭉개거나 축소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역사를 자기들 것으로 도둑질까지 하는 대담한 행위를 해 왔다. 중국역사의 주역들은 거의 한민족이지만 중국 한족(漢族)은 그것을 자기들 조상으로 바꿨다. 예컨대 중국 한나라 시대의 뛰어난 지략가 장량(張良)과 한신(韓信)도 우리 한민족이다.
일본 역시 역사가 짧고 빈약하기 그지없는 나라이기에 일본역사를 기술하는 방법도 도둑질과 변조행위를 일삼는 것이었다. 일본 역사기술 원칙을 보면 ①승리는 과장(誇張)하고 ② 패배는 고쳐서 개서(改書)하고 ③망명(亡命)은 서술(敍述)하지 않는다는 것 등이었다. 일본은 이 같은 수법을 역사기술 기본원칙으로 삼아 허장성세를 벌여 왔다. 예컨대, 일본의 시조 진무덴노(神武天皇)는 4세기 서기 390년에 태어났는데 그들은 서기전 660~585년으로 조작하고 있다. 일본역사는 1600년밖에 안되는데 1천년 이상 늘려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양심 있는 학자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의 水野祐 교수는 978년이 조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천황1대 진무덴노(神武天皇)가 서기전 660년~585년에 일본을 건국했다고 하는데 당시 일본에는 국가 형태의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서기전 1세기에 조선무녀(朝鮮巫女) 여왕2대가 통치했다는 이도국(伊都國(邪馬臺國)이 구주에 있었으나 국가라기보다는 한 부족의 집단에 불과 한 것이었다. 일본은 우리 가야(伽倻)의 기마민족이 세운 왜(倭)가 처음이고 그 1대왕 오우진(應神)이 일본천황 제1대라 할 수 있다. 일본 궁내성에 있는 상기(上記)는 단군의 손(孫)이 일본에 건너가 그 73대손이 진무덴노(神武天皇)가 됐다고 언급하고 있다. 일본왕조는 일본열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한국에서 건너간 것임이 명백하다는 반증이다. 일본인들은 평생 한번은 자기조상에게 참배한다며 미에겡(三重縣)에 있는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참배한다. 역대제왕들을 모시는 종묘제례(宗廟祭禮)도 우리의 중요한 조상공경행사다. 그런데 이세신궁(伊勢神宮) 천조대신(天照大神) 36좌(座)의 일본조상신 가운데 신위 3개 중 첫 번째 신위(神位)가 바로 가야신(伽倻神)인 원신(園神)이고 나머지 2개가 한신(韓神)인 백제신(神) 2좌(座)이다. 그 밑에 33위 합36신위가 모셔졌는데 모두 우리 한민족 유민의 신위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을 모두 숨긴다.
일본은 태평양전쟁도 패배로 패전했으나 일본의 교과서에 패전(敗戰)이라는 단어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들은 이 패전을 종전(終戰)이라고 하고 일본의 국민이 80% 이상이 우리나라에서 유민으로 간 사실도 철저히 숨기며 역사를 조작한다. 일본은 스스로 자신들의 조상을 부정하는 야만적 행동을 자랑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고대부터 당(唐)의 지시에 따르고 신라에 아부했음에도 상가야(上伽倻) 역사를 말소하고 허구의 일본사 작성을 아직도 해오고 있다. 역사가 없거나 빈약한 민족은 역사를 위조하는 습성이 있는데, 중국과 일본은 그 거짓과 조작이 가히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할만 하다.
“중국의 시조·선조들은 타임머신 타고 시·공간 초월했나”
중국은 역사를 왜곡시키기 위해 지명과 지도조차 다 바꿔 놓았기 때문에 중국의 기록을 잘못 인용하면 전체가 다 틀리기 쉽다. 위조의 역사를 증명하는 것은 사람의 출신과 연대가 들쭉 날쭉 제각각이라는데서 찾을 수 있다. 동일한 사람과 지명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다니듯 자유자재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역사를 기술했다. 중국과 대만의 일부 교과서는 황제 헌원(黃帝 軒轅-서기전 2707~2598년)이 중국인으로 중화민국의 시조라고 하나 이 시조라고 하는 황제헌원(軒轅)은 분명히 동이족이면서 시대를 무려 530년을 앞선 실재했던 인물이다. 교과서에 시조라고 기술된 헌원은 염제신농(炎帝神農, 중국인들이 성인으로 모시는 선조) 당시의 헌원이 아니다. 이 헌원은 염제신농씨의 나라 마지막 8대 임금인 염제유망이 다스리던 나라의 일개 제후에 불과했다. 당시 치우천황(蚩尤天黃)이 염제유망을 정벌하자 제후였던 헌원이 군사를 일으켜 대항해 오게 된다. 헌원은 이처럼 배달국시대 치우천황(蚩尤天黃)과 73회의 많은 전투를 한데서 우리도 그 이름을 익숙하게 아는 인물이다.
배달국 제8대 안부련천황(安夫連天皇-서기전 3240년)과 황제헌원(黃帝軒轅)의 생존연대가 중국 역사기술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헌원(軒轅)은 염제신농(炎帝神農) 당시 서기전 3240년경인데, 사기(史記)는 서기전 2902년으로 나와 있기도 하다. 이 헌원(軒轅)이 어떻게 해서 왕이 됐는지 모르나 서토(섬서성 남부 황허 상 중류지역으로 추정)에 가서 토착민의 괴수가 됐다고 환단고기에 나와 있다. 헌원(軒轅)의 선조가 쫒겨 갔다는 헌구(軒丘) 지역은(상동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헌원(軒轅)이 누런 황토지역(황허상류)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황제(黃帝)라고 불렀다 한다. 하지만 안부련천황(安夫連天皇) 당시 헌원은 유웅국(有雄國)의 왕이었다고 환단고기에 나와 있다. 다시말해 염제신농은 그의 아버지 소전에게 유웅국을 물려받은 뒤 이복동생인 헌원에게 이를 물려주고 별도의 염제신농국을 세웠는데, 이 나라가 염제유망까지 8대에 걸려 530여년을 잇는다. 중국의 한족이 시조로 교과서에 기술한 헌원은 염제신농 당시의 헌원이 아닌 약 530년 뒤 염제유망 때의 제후국에 불과했던 헌원이라는 것이 정설로 전해지고 있다. 동이족 치우천황에게 사로잡혀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이 헌원조차 동이족이다.
결국 중국은 염제신농 당시의 황제헌원(黃帝軒轅)에 대해서는 실재한 인물임에도 신화로 포장하고 있다. 그의 성(姓)은 공손(公孫)이다. 신화는 성스럽고 위대한 이미지를 후세에 전하고 업적을 위대하게 묘사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다. 하지만 자신들의 시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맞지 않으니 신화를 통해 진실을 숨길 수 있다. 위대한 선조라고 하면서도 신화라고 격하하고 있으니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헌원과 관련된 중국의 역사 연대 모순은 계속 이어진다. 전욱 고양씨(高陽氏(서기전 2531~2436 추정)도 하남성 기현 서남쪽이 고향이고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한명이다. 제곡 고신(高辛)은 고양(高陽)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분명치 않으나 치우천황(蚩尤天黃)시대(서기전 2706~2598)에 살던 인물로 중국기록과 연대가 맞지 않으나 태어나서부터 신동이었고 각종 악기와 음악을 만들었다. 훗날 은(殷)나라의 시조인 설과 주(周)나라의 시조인 후직을 배출한 가계라고 하나 확실히 장담할 수는 없다. 고신(高辛)은 치우(蚩尤)의 후손으로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의 조상이기도하다. 환단고기 신시본기에 ‘치우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만든 다음 오장군을 파견하여 서쪽의 고신(高辛)을 공격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라는 기록과 같이 제곡 고신(高辛)은 치우천황시대에 활동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제곡 고신(高辛)의 연대가 황제 헌원(黃帝軒轅)보다 170년 늦게 기록한 문헌도 나오고 있다. 이는 의도적 왜곡이며 잘못된 것이다.
고신(高辛)은 분명히 치우나 헌원과 같은 시대에 산 산동성의 일부지역의 군장(왕)이었다. 고양(高陽)의 뒤를 이은 왕이 아니었다. 105세를 살고 70년간 재위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 제곡의 아들이 요임금(堯)으로 되어 있다. 요임금도 고조선의 제후(諸侯)였다. 중국에서는 요임금 이전의 인물들을 실제 역사보다 신화 전설로 기록한 것이 많다. 그것은 인물과 역사를 신화화 하여 성스럽고 위대한 이미지를 후세에 전하고 싶은 의도였다고 하지만 그 속사정은 다른데 있다고 보여진다. 이들 인물들의 계보를 알고 보면 거의 모두가 동방 배달족(구려족=구이족=동이족)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재한 선조들이 중국에서는 이처럼 중국인의 시조이고 조상으로 추앙받으면서 동시 신화로 격하돼 탈바꿈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이처럼 실재와 역사를 희석시키고, 축소시켜 혼란을 주려고 신화화 한 것이기에 중국의 기록만을 인용하다가는 큰 낭패를 보게 된다.
환국·배달국시대 우리 선조들, 중국 조상 신화의 주인공 됐다
환국(서기전 7199~3898)과 배달국(서기전 3898~2333)은 엄연히 실재했고 인류 최초의 강대국이었다. 이들 우리의 선조들이 세계 5대문명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이 시대의 인물들을 다 다루는 것은 무리이지만 몇 인물을 든다면 우선 반고(盤固·서기전 3898~)가 있다. 바는 삼위산(三危山=감숙성甘肅省에 있는 산)의 납림(拉林)동굴에 이르러 임금이 되니 제견(諸畎)이라고 불렀고 이를 반고가한(盤固可汗)이라고 했다. 즉, 그 지역민을 통솔하고 지역 군장이 됐다. 가한(可汗)이라는 명칭은 북방 고대민족을 포함한 한민족(韓民族), 고대사회의 추장이나 부족장, 왕을 일컫는 용어로 반고(盤固)가 배달민족이었음이 확실시 된다. 이 반고(盤固)는 환단고기에는 서기전 3898년경이지만 중국문헌은 서기전 4257년으로 올려서 기록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일부 중국 측 역사교과서에서는 반고(盤固)가 중국민족의 시조로 인물과 일행이 여러 가지 형태의 신화로 전해지고 있으나 환단고기의 기록은 실재한 고대 인물로 분명히 기록돼 있다. 중국 측 사서에서는 ‘천지만물의 시조이자 천지를 개벽한 성인으로서 혼돈씨(渾沌氏)’라고 칭했다. 반고씨(盤固氏) 다음이 호영씨(昊英氏), 다음이 유소씨(有巢氏)로 나온다. 반고(盤固)는 배달국의 관직을 갖고 있었던 실재인물이다. 반고를 따랐던 공공(共工), 유소(有巢), 유묘(有苗), 유수(有燧) 등의 인물이 있다. 중국은 이들조차 고대문헌에서 역사신화로 나타내 부각시키고 있다. 이 반고(盤固)의 최초 거점은 삼위산(三危山)이 아니라 지금 월남의 북쪽에 있었다고 한 중국책에는 표시돼 있다.
안호상 박사는 이 삼위산(三危山)이 감숙성(甘肅省)뿐만 아니라 사천성( 四川省) 등지에도 있다고 했다. 중국은 역사 은폐를 하기 위해 지명과 산위치를 다시 바꿔서 같은 지명과 산이 여러 곳에 유령처럼 존재하게 했다. 삼위산(三危山)은 보통 지금의 감숙성에 있는 산을 말한다. 반고(盤固)는 환국의 관리였다는 것이 상고사 연구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도무지 중국의 역사왜곡이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종잡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반고(盤固)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봐도 신화의 인물이 아니라 실재한 인물인 것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신라 말, 원중돈 편찬)기록은 ‘서자부에 환웅이 있는데 용맹함과 더불어 어질고 지혜가 있으며 일찍이 홍익인간으로 세상을 바꿀 뜻을 가졌으니 그를 태백산으로 보내어 다스리게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이때 반고(盤固)라는 자가 있었는데 괴상한 술법을 즐기며 길을 나누어 가기를 청함으로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물과 보물을 모우고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에 밝은 장수들을 이끌고 공공(共工), 유소(有巢), 유묘(有苗), 유수(有燧)를 거느리고 삼위산(三危山)에 이르러 임금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반고는 배달국 제후국의 수령격인 지역 군장(임금)이 됐다. 중국은 이 반고(盤固)를 자기들의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반고(盤固)는 우리 한민족이다. 이외에도 중국역사에 나오는 삼황오제의 인물은 물론 그 귀족들은 모두 우리 한민족이다. 천황씨(天皇氏), 지황씨(地皇氏), 인황씨(人皇氏), 유소씨(有巢氏), 수인씨(燧人氏), 고시씨(高矢氏), 치우씨(蚩尤氏), 신지씨(神誌氏), 복희씨(伏羲氏)며, 여왜=여와(女㛂), 소전(少典), 신농(神農), 유망(楡罔), 소호(小昊) 등 이들은 중국에 도둑질당한 우리 선조들이다. 그리고 참담히 불행하게도 신화로 추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