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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미국 아칸소 호프에서 출생
아이티와 중동, 발칸 지역에서 일어난
국제적 위기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백악관에서 일하던 젊은 여자 인턴 직원과의 혼외정사 때문에
미국 의회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그 탄핵안은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클린턴은 조지타운대학교를 거쳐
1973년 예일대학교 법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76년까지 아칸소대학교 법과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75년
변호사 힐러리 로댐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클린턴의 정계 진출을 위해 활약했다.
1992년
클린턴과 고어는 부시 대통령과 무소속 후보 로스 페로를 물리치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클린턴이 재임하는 동안
백악관은 추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모든 추문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경제 호황에 힘입어 1996년 재선에 성공했다.
미국의 제42대 대통령(1993~2001)으로서
미국이 가장 오랫동안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시대에 재임했고
아이티와 중동, 그리고 발칸 지역에서 일어난 국제적 위기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백악관에서 일하던 젊은 여자 인턴 직원과의 혼외정사 때문에
미국 역사상 앤드루 존슨에 이어 2번째로 의회의 탄핵을 받은 대통령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그후 어머니가 로저 클린턴과 재혼했는데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기 때문에
이혼했다가 재결합하는 등 굴곡 많은 결혼생활을 했다.
그러나 아들 블라이드는 성(姓)을 의붓아버지의 성인 클린턴으로 바꾸었다.
외할머니가 그의 양육을 맡은 적도 있었다.
클린턴은
어려서부터 정계에 진출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클린턴 자신의 말에 의하면
1963년 7월 J.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하게 되었을 때
정치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그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뜻을 품고
워싱턴 D. C.에 있는 조지타운대학교에 입학했고,
1968년 국제문제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클린턴은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는데,
징집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가
장차 정치가로서 자신의 경력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다.
그는 로즈 장학금을 받아
영국으로 유학을 감으로써 징집을 피할 수 있었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1968~70)
클린턴은 뒷날 자신이 재직하게 된
아칸소대학교 법학과 대학원에 있는 예비장교 훈련단(ROTC) 단장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훈련단장에게 군대에 가지 않게 해주어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전쟁에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이
훗날의 '정치적 생존'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기 때문에 노심초사했다며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후일 클린턴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편지를 그의 권력욕과 권모술수를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했다.
클린턴은 옥스퍼드에 있는 동안
대마초를 피우기도 했는데
나중에 그는 당시 대마초 연기를 들이마시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클린턴은
예일대학교 법과 대학원에 진학해
1973년 졸업한 뒤
1976년까지 아칸소대학교 법과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클린턴은
텍사스 주에서
민주당 후보 조지 맥거번의 대통령 선거운동(1972)과
아칸소 주에서
지미 카터의 대통령 선거운동(1976)을 이끌었고,
1974년에는 하원 후보로 나섰으나 실패했다.
1975년
예일대학교 법과 대학원 동창생인 변호사 힐러리 로댐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처음부터 클린턴의 정계 진출을 위해 활약했다.
다음해 그는 아칸소 주의 검찰총장으로 선출되었고
1978년에는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미국에서는 40년 만에 등장한 최연소 주지사가 되었다.
클린턴은 다사 다난했던 2년의 임기를 마치고
1980년 재선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그해는 외동딸 첼시가 태어난 해이기도 했다.
비현실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던 그는
경험과 식견이 부족한 상태로 공직에 진출했었다.
비판자들은 당시 그가 오만하기 이를데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클린턴은
그때 유권자들의 성향에 관해 중요한 교훈들을 배웠다.
그는 재임 당시의 실정(失政)에 대해 사과하고 이미지를 바꾸는 데 성공하여
1982년 다시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나서 아칸소 주 발전에 이바지하는 실질적인 성과들을 거두어
주지사 선거에서 3차례나 더 승리를 거두었다.
실용주의적 중도파 민주당원으로서
그는 학생들과 교사들의 수행능력 평가를 의무화함으로써
그동안 도외시되었던 교육제도를 개혁했고,
기업체에 부과하는 세금을 낮추어
아칸소 주의 산업 발전을 촉진시켰다.
그는 민주당 지도자회의(Democratic Leadership Council)의 주요 인사가 되었는데,
이 단체는 백인 남성층의 표를 다시 얻기 위해
민주당의 정강을 맥거번과 먼데일의 진보주의에서 중도주의로 바꾸고자 했다.
사회통합에 대한 신념과
설득력 있는 태도,
탁월한 화술 등으로
클린턴은 흑인과 여성층의 지지까지 끌어낼 수 있었다.
클린턴은 아칸소 주지사에 재임하고 있을 때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겠다고 선언했고
199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승리했다.
중도적 접근 방식과 상대방과 감정을 공유하는 태도
('나는 당신의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는 그의 말은
사람들이 곧잘 장난삼아 흉내내는 유명한 어구가 되었다),
그리고 친밀감을 불러일으키는 태도로
그는 혼외정사나 금융 관련 부정행위, 징집 기피 등에 대한 의혹을 비껴갈 수 있었다.
국내 경제의 침체에 대한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외정책을 부각시키려 애쓰는 조지 부시 대통령에 맞서,
러닝메이트로
테네시 주 상원의원인 앨버트 고어를 선택한 클린턴은
정치적 침체와 경제 불황이
12년 동안 집권한 공화당의 실정(失政) 탓이라고 지적했다.
클린턴과 고어는 그해 11월
부시 대통령과 무소속 후보 로스 페로를 물리치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클린턴은 일반 투표에서
43%의 지지를 얻어
각각 38%와 19%를 득표한 부시와 페로를 앞질렀고,
대통령 선거인단의 결선 투표에서는 3
70 대 168로 부시를 이겼다.
클린턴 행정부는
각종 시행착오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시키며 다소 불안하게 출발했다.
동성연애자에 대한 군내(軍內) 차별을 없애겠다는
선거 공약과 관련된 것이 있다.
이 민감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그는 '(동성연애자인지)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타협적인 정책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책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동성연애자와 반대론자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고,
위헌적인 요소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처음 그가 법무장관을 지명했을 때에는
윤리적 문제 때문에 2번이나 거부당했고,
처음 입법을 추진했던 주요 법률안 중 하나는
공화당의 방해 공작으로 폐기되기도 했다.
그는 의회와의 대립을 피하기 위해
재정 개혁에 관한 계획들을 뒤로 제쳐놓았다.
선거 공약이었던
통합 의료보험 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아내인 힐러리에게
특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대통령 부인으로서는 다소 새로운 역할을 맡겼다.
부적절한 인사라는 논란이 일고
힐러리 클린턴의 가차없는 여성해방주의에 대해 반대 여론이 급등하는 가운데
통합 의료보험 제도 계획은 너무 복잡했고
위원회는 제대로 된 법안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결국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지도 못했다.
처음에는 이처럼 실수를 연발했지만
클린턴은 몇 가지 긍정적인 조치들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orth America Free Trade Agreement/NAFTA) 체결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멕시코인들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해왔지만,
의회가 그 법안을 통과시키고
클린턴이 서명함으로써 마침내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를
단일시장으로 하는
자유무역지대가 출현하게 되었다.
또한 클린턴은 여성과 소수 집단 출신 인사들을 정부 요직에 임명함으로써
연방정부의 이미지를 바꾸었다.
그는 재닛 리노를 법무장관에, 도나 샬랄라를
보건후생부 장관에, 조슬린 엘더스를
공중위생국장에,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국무장관에 각각 임명했다.
또한 은퇴한 대법관 바이런 R. 화이트의 후임으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임명했다.
의회는 여성과 가족 관련 법안을 30여 개 정도 처리했는데,
그 중에는 의료휴가법, 권총범죄 규제법 등이 있다.
몇 가지 이유로 1994년에 치른 선거에서
40년 만에 처음으로 공화당이 상하 양원에서 다수당이 되었다.
뉴트 깅리치가 이끄는 공화당원들,
특히 신입 공화당원들은
이 승리를 클린턴의 지도력에 대한 유권자들의 심판이라고 생각했다.
공화당이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정부의 지출 증가를 둔화시키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클린턴은 적극적인 재정적자 감축과
복지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등
공화당이 내세우는 몇몇 정책을 받아들였다.
게다가 의회에서 보여준
공화당 강경파의 완고하고 적대적인 태도가
오히려 역효과를 내어
클린턴의 온건한 접근방식이 상당한 공감을 얻게 되었다.
1994년 9~10월에
클린턴은 1991년 발생한 군부 쿠데타로 축출되었던
아이티 대통령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를 복귀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평화유지 업무를
미국 군대가 맡도록 했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을 영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계속되어온 평화회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클린턴은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반 아라파트를
워싱턴에 초대해
가자 지구와 예리코 지역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협정에
서명하도록 했다.
재선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중동평화회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클린턴이 재임하는 동안
백악관은 추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칸소 주지사 시절부터
클린턴의 친구였던 백악관 법률 고문이 자살을 하고,
클린턴이 과거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금융 부정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떠도는 가운데
클린턴의 과거 동료들은 기소되거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성추문도 되풀이하여 제기되었다.
이 모든 추문에도 불구하고
클린턴은 지속적인 경제 호황에 힘입어 1996년 재선에 성공했다.
클린턴 집권기는
미국 역사상 가장 긴 호황기로 기록될 만큼 경제적 번영이 지속되는 시기였다.
일반 투표에서 클린턴은 49%,
공화당 후보 로버트 돌은 41%,
페로는 8%의 지지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서 클린턴은 379 대 159로 돌을 이겼다.
리노 법무장관은
클린턴의 아칸소 주지사 재임 시절 부정 혐의에 대해 조사하기로 동의했다.
케네스 스타 특별 검사가 화이트워터(Whitewater:이 사건에 관련된
부동산 개발회사 이름)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다.
이 수사는 수천만 달러에 이르는 비용을 들여
수년 간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스타 검사는 범죄를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수사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허용되자,
그는 클린턴이 백악관 인턴 직원 모니카 르윈스키와 불륜을 저질렀음을 밝혀냈다.
클린턴은 계속해서 공개적으로 그 혐의를 부인했다.
결국 증언대에 서게 되자,
그는 말끝을 흐리며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다.
증언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그것은(제가 불륜을 저질렀는지 여부는)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비판자들은 이 답변을 통해
그의 나약함과 인격적인 결함이 드러났다고 여겼다.
르윈스키가 불륜의 증거를 제출하자,
클린턴은 가족과 국민에게 사과했다.
일리노이 주의 공화당원 헨리 하이드가 이끄는 미국 하원은
445쪽에 달하는 스타 검사의 보고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바탕으로
1998년 위증과 사법방해 혐의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1999년 그 탄핵안은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때때로 나토군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같은 국제적인 사건들이
전세계인의 관심을 클린턴의 성추문으로부터 떼어놓기도 했다.
그 공습은
세르비아 공화국 자치주인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인들에게 자행된
'인종 청소'를 끝내기 위한 것이었다.
성추문과 관련된 파문이 잠잠해졌을 무렵,
클린턴 행정부는 이미지에 커다란 타격을 입긴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2001년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민주당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한 의원이 물러난 후
공석으로 남아 있던 뉴욕 주 상원의원에 입후보해서 당선되었다.
1947년 시카고에서 출생
정치인, 전직 영부인
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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