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C 예능 프로그램 ‘뜨거운 형제들’의 인기 코너였던 ‘아바타 소개팅’
“애드립 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해!”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말하고 움직이는 연기자가 아바타처럼 소개팅에 나서고, 역할극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신선한
재미를 안겨준 MBC 오락프로그램 ‘뜨거운 형제들’의 ‘아바타 소개팅’의 한 장면.최근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보며
이 오락 프로그램이 떠올랐습니다. 연애를 ‘조작’해서 사랑을 이뤄준다는 가상의 회사 ‘시라노 에이전시’의 설정과 비슷해
자연스럽게 연상이 된 것이지요. 헌데 ‘조작’이라는 설정만 같을 뿐 그 목적은 전혀 다릅니다. ‘아바타 소개팅’이 오로지
‘웃음 유발’을 목적으로 한다면, ‘시라노 에이전시’는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사랑을 이뤄지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철저하게 계산된 연기와 대사를 통해 거짓 인연을 만들려는 ‘시라노 에이전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시대가 지나도 풀리지 않을 이 문제를 ‘시라노 에이전시’은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연애를 조작한다는 ‘판타지’,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날 좋아하게 된다는 ‘환상’을 실제 가능한 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발생되는 ‘과연 어떻게?’라는 궁금증이
이 영화의 흥미요소인데요, 먼저 영화 속 ‘라이터와 담배’ 에피소드를 보면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부터 짚고 넘어가보겠습니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희중(이민정 분)은 남주인공 병훈(엄태웅 분)에게 남에게 빌려준 라이터가 돌고 돌아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 것
과 같은 특별한 인연을 얘기하는데요, 이어지는 병훈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대뜸 “너 담배 폈었니?”라고 물어보는 것이죠.
이에 희중은 “아주 복잡할 때”만 담배를 피운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두 가지가 드러나는데요, 한때 연인 사이였지만
여자 주인공이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도 몰랐던 남자 주인공의 무신경함과 남자 몰래 담배를 찾았던 여자의 복잡한 심경이 그것이
지요. 여기서 ‘담배’는 둘 사이의 벌어진 간극을 보여주는 동시에 남자는 모르는 여자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여자는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남자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 담배를 피운다’는 말처럼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담배 에피소드는 남자와 여자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남성과 여성의 간극을 시라노 에이전시는 상대 이성과 우연을 가장한 ‘인연’을 통해 극복하려 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데이트 신청을 하고 또 사랑을 얻기 위해 뜸을 들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고백을 하는 일련의 과정이 상대 이성으로 하여금 마치 ‘우연’처럼 느껴지게 꾸민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조작된 인연에는 중요한 단서가 붙습니다. 바로 있지도 않은 감정을 거짓으로 ‘위장’하는 것이 아닌,
진심을 잘 전달할 수 있게 ‘포장’ 한다는 점이지요.
그리고 그 ‘포장’을 위해 어김없이 ‘작업의 기술’이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사랑’을 위해서는 ‘기술’이란 게 꼭 필요한 걸까?라는 의문 말이죠.
'여자의 최측근을 활용하라. 선물과 편지를 자주 보내라. 작업 걸 시점을 잘 선택하라. 술자리를 이용하라. 아낌없이 칭찬하라.
무조건 약속하라. 때로는 거짓말도 필요하다. 거짓 눈물을 흘려라. 작전상 후퇴도 필요하다. 최대한 불쌍하게 보여라.
친구를 조심하라. 변신의 귀재가 되어라.'
↑ 자크 루이 다비드의 '헬레네와 파리스'.
홍조 띤 두 남녀의 볼이 좋아하는 마음을 읽게 해준다.
위에 열거한 ‘작업의 기술’은 놀랍게도 2000년 전 로마시인 오비디우스의 연애 지침서에 소개된 내용이라고 합니다.
기술이 발달하고 삶의 환경이 급변했어도 남녀의 사랑과 심리를 지배하는 원칙은 큰 차이가 없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론적인 법칙을 꿰고 있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면 세상 어디에도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은 없을 테죠.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 역시 사랑의 가장 중요한 성립요소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칙이나 기술이 아닌 사람의
‘진심’과 그 밑에 전제된 ‘신뢰’라고 얘기합니다.
↑ 시키는 대로 읊는 대사가 아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 상용(최다니엘)은 희중(이민정)의 마음을 얻는다.
사적이고 사람의 감정을 얻어내야 하는 연애를 ‘거짓’과 ‘조작’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설정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그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필수불가결 요소인 ‘진심’과 ‘신뢰’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죠.
“믿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서 믿는거라구요” 라는 영화 속 대사는 이 영화의 주제나 다름없는데요,
남의 연애는 이뤄주지만 정작 자신의 연애는 실패한 경험이 있는 주인공을 통해 작업의 기술 보다 더 중요한 건
‘진심’이라는 순애보적인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뻔히 보이는 작업의 겉치레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믿습니다. 사랑 앞에 ‘진심’이라는 진리는 언제나 통하게 마련인 것이죠.
그럼에도 사랑의 본질은 어떠한 기술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어려운 텍스트인 까닭에 사랑에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정답은 남이 대신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풀어가야 하는 숙제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