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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6세기 초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新敎(프로테스탄트)가 急 성장함으로서 부패한
카토릭 1000년 세도의 암흑기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문예부흥이 일어난후 神의 자리는 점차 인간과 이성이 자리
하기 시작함으로서 絶權의 기독교는 방황하기 시작했다.이른바 舊敎(천주교)가 자리했던 유럽 상당지역을 新敎
가 차지 함으로서 카토릭은 포교(선교) 시장을 상실하거나 한계에 봉착했다.이어진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유럽
에서의 카토릭 포교는 벽에 부딪쳤고,그러자 천주교(카토릭)는 유럽을 떠나 해외로의 진출을 모색하며 돌파구를
찾게 된다.여기에는 이슬람의 오랜 지배에서 벗어나 늦게 기독교 세계에 입문한 포루투갈과 스페인이 있었고,콜
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해외 포교시장 개척에 다른 나라들 보다 열성적 이었다.또한 여기에 그동안 이탈리아
도시국가와 아라비아 상인들 사이의 독점으로 이루워졌던 고가의 수익 물품인 향료시장의 분산정책도 한몫했다.
일단 종교도 교리를 상품으로 파는 하나의 정신사업이자 장사니까,시장의 확대와 팽창을 잃어 버리면 정체와 침
체로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이성이 발달한 지금의 유럽과 미국 동부의 종교(기독교)시장처럼 썰렁하게 된다.
1492년 신대륙 발견이후 이미 중남미를 석권한 카토릭(이하 천주교)은 부정과 부패로 자체 내에서 조차 개혁이
요구 되었고,이제 신교에 밀려 유럽에서의 선교시장(정신적 영토)도 잃어 버렸다.바로 이때 고수익의 향료와 비단
사업과 연계시켜 천주교는 로마 교황청 지원으로 동방으로의 진출을 모색했다.열성적으로 탐험대를 꾸린 나라는
늦게 기독교에 입문하여 교황청에 잘보이고 싶었던 이베리아 반도의 두나라 포르투칼과 스페인 이었다.이들이 동
방으로 진출한 한참 뒤에 유럽의 제국들도 향료와 비단,기타 무역을 핑게로 동방으로 진출해 많은 불평등 무역과
도둑질,약탈을 했다.근거는 영국의 대영제국 박물관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장물애비와 도굴꾼들의 고향이란
유럽 유물 유적의 고고학자들의 말이 대변해 준다.
2, 상인을 필두로 시작한 이들의 동방 진출은 곧이어 고객 확보를 위한 종교의 영업사원들인 선교사들을 파견했다.
그 다음은 상인들인 자국민 들이자 거류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했다.이것은 서양의 해외 식민지
개척과 점령및 약탈의 전형적인 공식이다.이들이 신속히 군대를 파견했다는 것은 훔쳐갈 먹거리가 많고 수익을 창
출한 여지가 많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즉각 폭력을 휘두르겠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처음에는 상인들이
자체적 조직의 군대였으나 상거래가 커지고 점차 유럽의 왕실들과 자본가들이 개입하여 국가의 군인 성격으로 발
전되어 갔다.이들의 횡포는 아프리카,중남미,북미,중동과 아시아에서 익히 알려진 것 처럼 한치의 어긋남 없이 같았
다.그런후에 그들은 '발견했다,발전시켰다' 등의 아전인수 식 표현을 한다.그들은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
을 지나고 인도의 중간기착지(코친과 고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후,이어 동남아 말라카 해협을 경유하고 현 중국의
최남단인 廣東에 도착했다.이런 선교사들 중에 이탈리아 출신으로 제수이트(예수회 수사) 소속의 마테오 리치도 있
었다.이들은 현재의 타이완을 아름다운 섬이란 뜻인 '포르모사(Formosa)' 로 불렀듯이 광동(廣州와 東莞의 축약)지
역도 막연히 고을(邑)이란 뜻인 'canton(캔턴)' 으로 불렀다.
포르투칼인 들이 긴 항해를 한후 동방의 처음 기착지는 광동의 남단 마카오(澳門) 였다.이어 이들이 광동의 지방정
부로 부터 마카오 거주를 획득한 때는 대략 1557년(명종 12년,명나라 가정제 36년) 경으로 추정된다.그러나 포르투
갈이 마카오에서 배타적 관할권을 주장한 시기는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패한후 약체의 청을 확인한 1849년(도광
제 29년) 쯤이 된다.이어 1887년(광서제 13년)에 '리스본의정서' 에 의해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영유권이 인정 되었다.
이즈음 홍콩도 영국에 넘어갔다.포르투갈의 동방 진출에 이어 '스페인,네델란드,영국,프랑스' 등 여러 유럽제국가들
이 동방으로 진출해 상거래(무역)를 하게 되나 그들의 목적은 오직 돈(재물과 이익) 이였지 종교의 전파에는 미온적
이었다.처음 마테오 리치의 목적도 다른 유럽 제국가의 선교사 들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포교의 차이는 있었다.
3, 만력제 29년(1601)에는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선교회 조직인 제수이트(예수회 수사조직)의 선교사 마테오 리
치(이마독:이탈리아 人)가 우여곡절 끝에 북경에 들어왔다.그가 '자명종,프리즘' 등 진귀한 물품들을 바쳐 만력제(신
종)를 만나 기독교의 전도를 허가 받아 작은 교회당(전도소)을 세우기는 했다.그러나 사람의 마음과 지역의 전통이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반응은 상당히 미온적 이었다.시간이 지난후 리치가 동방의 전통과 관습(전례)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선교 활동을 하자 조금씩 명조의 황족,대신,지식층 사이에도 천주교 신자가 생겨 났다고는 전
하나 진실은 확인되지 않는다.마테오 리치의 뒤를 이어 계속해서 제수이트 선교사들이 청나라를 찾아오게 되지만
여전히 공개적 포교는 금지였다.리치 이전에 동방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왔던 교파는 콘스탄티노풀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창시한 앗시리아(그리스와 시리아)의 동방정교회인 '景敎' 와,프랑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탁발수사
빌렘 반 뢰이즈 부르크의 로마 선교단이 있었다.이들은 북방의 초원길과 실크로드를 따라 몽고족을 따라 왔다가 14
세기 중반 몽고(元)가 멸망하면서 동반 철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4, 마테오 리치가 인도의 코친에서 사제서품(1580년 7월 말경)받고 천주교 신부가 되어 동방으로 입성하는 길도 쉽
지는 않았다.그는 예수회 수련수사로서 신학교를 거쳐,1578년 3월 24일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떠났다.1580년 인도
의 고아와 코친에서 신학과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운후 7월 말에 코친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마침내 그는 1582년
4월 26일 인도의 고아를 떠나 6월에 말라카 해협을 지나고 1582년 8월 7일이 되서야 현광동의 마카오에 도착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선교는 만만치 않았다.그는 선교를 하기 위해 1583년 9월 10일 경 마카오에서 운하로 연결되어 있
는 광동성 西江 하류 북안에 자리하고 있는 '肇慶(자오칭)' 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으나,워낙 유교 전통
의 벽이 두터워 전도의 사정은 어려웠다.여기에 1584년 10월에는 리치가 제작했다는 세계지도 해적판까지 肇慶에서
인쇄되어 유통되자,이를 불법으로 여긴 지방 관리가 1589년 8월 3일 마테오 리치를 조경에서 추방하게 되고 이런 마
테오 리치는 다시 광동성 북부의 남령(南嶺)산맥 남쪽 깊숙한 산악지대인 '韶州(韶關市) 始興縣' 으로 자리를 옮겼으
나,이곳도 1592년 7월 사제관이 공격을 당해 다리를 다친다.이때는 임진왜란(전쟁)이 대륙에서 진행되고 있을 때
였다.
5, 바로 韶州(소관시)의 시흥현에 포르투갈 인들이 세운 '萬堂신학교' 에서 1845년 8월 17일 조선인 김대건과 최양업
이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활동을 한다.김대건과 최양업은 이보다 먼저(1841년) 마카오(澳門)에 있는 조선신학
교(동방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한바 있다.리치는 1595년 4월 18일에 韶州를 떠나 南京으로 갔으나 사
정이 여의치 않자 다시 강서성 南昌으로 물러나 거처를 마련하고,북경 입성의 때를 기다렸다.1598년 9월 7일(~11월
5일)에 처음으로 북경에 가지만 거주 허가를 받지 못한체 발길을 돌려 1599년에 南京에 거처를 마련한후 원할치 않은
포교 활동을 하다,1601년 다시 북경에 다시 들어가 5월 28일 경에 북경거주와 전도소 허가를 받는다.이것이 발전하여
그가 북경에서 죽기 8개월 전(1609년 9월 8일) 최초로 성모회까지 결성되는 성과를 거두나 이듬해 그가 죽자(1610년
5월 11일)또 다시 흐지부지 되었다.아무튼 마테오 리치가 천주교 포교를 위해 1582년 광동의 마카오에 들어와 1601
년에 황제로 부터 북경거주와 전도소 허가를 받은 때가 1601년 이라면 거의 20년 세월을 허비한 것이다.
6, 아무튼 17세기 초에 자금성에 들어온 최초의 유럽인은 예수회 선교사(제수이트) 마태오 리치(1552~1610) 였다.
리치는 동방에 도착해 천주교 전도를 목표로 두었지만,이미 역사와 함께한 확고한 전통관습과 종교를 가지고 있고,
유교란 통치질서를 가지고 있는 동방(조선) 에서의 천주교 전파는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그래서 그는 동방에 대해
공부를 했다.우선 중국어를 배우고 고전들을 학습한 이후에 마침내 중국인 학자들과 귀족들에게 받아 들여졌다.리치
는 광동의 조경과 강소성의 蘇州 등지에 교회(전도소)를 설립하는등 포교 활동을 했지만,이것은 어디 까지나 불법이
었고,포교를 할려면 황제의 윤허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는 전진과 후퇴,의견 개진과 설득을 거듭한 결과 1601
년에 가서야 겨우 북경에 거주 허가를 받을수 있었으며 조그마한 전도소도 세울수 있었다.이후의 사정 역시 神主와
제사 문제 때문에 곳곳에서 충돌해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등 파라만장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그러나 현재의 중국이
교조적 공산주의 사회가 되고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을 통해 외세를 배격하는 운동이 크게 벌어 졌을때,수많은 기
독교 흔적들이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이때 공자의 사당과 비석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 유물들,유교,불교,도
교와 관련된 유물 유적들이 불타거나 인정사정 없이 파괴되고 사라졌다.
'곱슬머리,파란눈,鐘같이 낮은 목소리' 의 리치는 은둔 생활을 하는 만력제를 한번도 만나지는 못했지만,황제에게
바친 헌상품의 하나인 '자명종' 이 멈추었을 때 황궁이자 자금성에 불려 들어갔다.그는 황궁에 들어가 3일을 머물면
서 환관들에게 시계의 작동법을 가르쳤다.바로 이때 황제로 부터 유럽의 정세에 대한 질문 공세를 받았다.1608년
엔 마테오 리치가 1584년에 이어 1602년에 새로 제작한 '坤輿萬國全圖' 를 병풍 용으로 모사하라는 어명까지 내렸
다.이처럼 서양에 근거를 둔 리치의 신지식 전수 사업은 이후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살 폰' 과 존 슈레이크'
에게 인계 되었으며,1622년 에는 이들을 통해 망원경까지 들어 왔다.
7, 마테오 리치는 동방인들을 기독교도로 개종 시킬려면 유교와 양립할수 있는 형식(하늘,조상,공자의 제사)으로
천주교를 포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그의 방침에 따라 유력한 明나라 사람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했다.리치의 후임
자들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전도를 한 결과 천주교로 개종한 명나라 사람의 수가 수천명에 이르게 되었다.즉 예수
회의 마테오 리치는 타인이나 타국의 문화와 전통및 관습을 무시하지 않고,어느정도 수용하면서 천주교를 포교하
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그러나 18세기 초에 교황파인 스페인의 도미니쿠스 수도회와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수
도회의 선교사들이 밀입국으로 들어와 제수이트(예수회)의 포교방식을 비판하면서 명나라 전체에 논쟁이 벌어지
게 했다.이러자 1704년 로마 교황 클레멘스 11세(1700~1721)가 마테오 리치식 포교(제수이트) 활동을 하는자를
파문 한다는 교시를 내렸고,이에 청나라의 강희제(1661~1722)가 격노하여 1706년 교황파(도미니크,프란체스코)
의 선교사 모두를 추방시켰다.
결국은 온건파이자 융화파인 예수회 선교사들만 청나라(동방) 남았지만,선교사들의 전횡을 목격했던 옹정제(1723~
1735)가 즉위하자 기독교(천주교)는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선교사들은 추방되었고 신도들은 투옥되는 박해를 받
게 되었다.이후 동방에서의 기독교 선교와 포교는 점차 위축 되었으니 이는 동방으로 진출한 서방의 천주교 세력간
의 주도권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다.따라서 동방의 무지를 나무랄 필요는 없다.
8, 강희제(1661~1722)와 옹정제(1723~1735)의 뒤를 이어 청의 황제가 된 乾隆帝(1736~1795)는 예수회 선교사에게
내린 교시에서 '기독교(천주교)는 유교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다.나라에서 선교사를 받아 들이는 것은 그들이 數學
과 天文學 등에 정통하기 때문이다.이를 명심하라!' 고 했다.강희제는 물론 건륭제도 예수회 선교사들을 궁정으로 불
러 들였다.강희제 즉위 초기에는 楊光先 등이 천주교 배척운동으로 예수회를 탄압했지만,양광선이 실각하자 '베르비
스트(Verbiest)' 등이 중용 되었고 강희제와의 지속적인 우정은 이어졌다.베르비스트는 曆法도 수정하고 大砲를 주조
하는 등 청조정에 기여한 바가 컸다.1692년 강희제가 천주교의 포교를 공인한 결과 1700년 청나라의 천주교 신자가
거의 30만 명에 육박 했고,'澳門,廣州,北京' 에 교회가 설립 되었다.그러나 강희제 말년에 '典禮(일정한의식=조상숭배
와 제사) 가 사회적 문제로 야기되고 충돌하면서 옹정제와 건륭제 시대에는 포교가 금지 되었다.그러나 기술자나 화
가로 궁정에서 근무한 선교사는 신자 수만큼 줄어들지 않았다.이 또한 도시와 지방의 차이는 컷다.1715년 베이징에
들어온 이탈리아 선교사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역시 강희제로 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옹정제의 탄압을 견뎌
냈으며,건륭제의 총애도 받았다.
9, 예수회의 선교사들은 예술및 기술분야에서 전문가의 솜씨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그들은 과거 마테오 리치 처럼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속박이 심한 궁정에서의 생활도 참고 견디었다.1747년 건륭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원명
원에 서양식 분수를 설치하고,중앙에 서양 건축양식으로 별궁이자 이궁을 짓게 했다.이렇게 해서 완성된 원명원은
유럽과 중국 양식을 혼합시킨 매혹적인 건축물이 되었다.베르사유 궁전에서 영감을 받아 지었다는 2층 누각 내부
에는 청나라의 전통적인 단층집 전당이 있었다.이는 건륭제가 공중에서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유럽인들이 공중(2층 높은 집)에서 생활하는 것은 가난하고 토지가 부족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겼다.원명원
에는 실제로 유럽과 똑같은 거리 풍경이 재현되었고 독창적인 분수 시계도 있었다.분수시계의 가장자리에는 '十二
支' 를 나타내는 12마리 동물을 배치했고,해당 동물이 2시간마다 물을 뿜어내게 했다.그러나 이 원명원은 1860년
북경에 진군한 英佛연합군(2차 아편전쟁)의 복수표적이 되어 하루 아침에 잿더미가 되었다.한 프랑스 장교는 다음
과 같이 적었다.'원명원에서 보내는 이틀 밤은 어지럽고 정신이 없어 견디기 힘들었다.모든 부대원들이 우는鳥(새),
自鳴樂,자명종 등을 갖고 있었고 종소리가 도처에서 들렸다'.여러 형태의 자명종들은 프랑스 병사들이 원명원에서
약탈한 것들 이었다.이들의 약탈은 마침내 원명원의 방화로 끝을 맺었다.
흥분한 병사들이 불길을 잡기위해 은실로 짠 벽걸이 융단을 사용했다.그 불씨가 인접한 이화원(청의원)까지 덮쳐서
그곳도 원명원 처럼 몇개의 건물을 남기고 폐허가 되었다.원명원과 이화원(후에 서태후가 해군경비를 도용해 복원,
이러한 퇴행으로 청일전쟁에서 청제국이 신생 일본에 패한다)을 불태우고 진귀한 보물들을 약탈한 수많은 서양 군
인들 모두는 천주교 신자거나 기독교 신자들 이었다.이런 종교의 신자들은 한손엔 바이블을 들고 한손엔 총칼을 들
고 있었다.이들은 겉과 입으로는 신의 사랑과 이웃사랑을 외치고 있으나,실제는 탐욕의 도둑질을 하고 약탈 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즉 겉만 거룩하고 신성한척 한 것이다.역사의 진실이 이런데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현재 부자 나
라가 된 그들의 역사 기저를 보면 대략 '도둑,강도,납치,강간,살인,약탈,방화' 란 그림들이 어른 거린다.
10, 조선의 천주교 역사에는 여러명의 프랑스 이름을 가진 선교사들과 신부들이 등장을 한다.이들은 모두 제수이트
소속의 선교사들이다.조선의 다른 표현은 東方과 같다.조선의 남인으로 천주교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던 정다산
(약용)도 1810년 그가 저술 했다는 '我邦疆域考(아방강역고)' 에서 자신의 나라(我邦)는 반도가 아니라고 쓰고 있다.
즉 반도를 역사 조선(동국=동방)의 전부로 이해해서는 원전의 조선사는 이해되지 않는다.반도는 대조선의 일부였을
뿐이다.프란체스코,도미니크 교황파 선교사들에 의한 천주교 포교는 거의 없었으며,포르투갈,스페인,네델란드 출신
선교사들 역시 조선(반도 포함)의 포교는 없었다고 봐도 된다.서양의 동방진출에 다른 나라들은 오직 무역(장사)에
의한 이득을 취하는데 목적을 두었지만,단지 프랑스 만은 달랐다.그래서 프랑스 신부들이 많이 걸려 들어 죽었다.조
선(동방) 진출이 다른 나라보다 늦었기에 그들은 천주교의 포교를 통한 정신적 영토 확대를 모색했다.프랑스가 동방
의 광동에 진출한 것은 1698년(루이 14세,청제국 강희제 39년) 경이 되지만,광동에 영사를 두기 시작한 1776년 경에
도 對동방무역을 위한 진출은 원할하지 못했다.이들은 오히려 인도에서 영국에 밀려나 동남아 3국지역 진출에 주력
하였다.
그러다 1844년 프랑스 라그르네가 8척의 군함을 마카오로 끌고 들어와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고,1844년 10월 24
일불평등의 '佛淸黃浦條約' 을 대포 앞에서 체결한다.여기서도 프랑스의 라그르네는 천주교의 布敎權을 인정 받으려
끈질기게 요구했다.영국에 비해 경제력이 떨어지는 프랑스는 천주교의 전파를 통한 동방 진출이 유리하다고 생각했
고,국내의 종교 기득권 층들의 입장도 고려 되었다.마침내 청은 1844년 12월 28일 條約港 내에서의 천주교 포교권을
인정했고,미국과의 불평등 조약인 마카오의 망하조약을 통해서는 1845년 12월부터 천주교와 같은 조건으로 개신교
포교권도 인정해 주었다.당시는 대포를 앞세운 서양세력들이 무력을 동반해 맺은 불평등 조약이란 것은 자판기에서
음료수가 나오는 것과 같았다.그들이 요구하면 동방의 제나라들은 뭔지도 모른체 도장만 찍어 주었다.
11, 조선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Cespedes)가 倭軍信徒를
위해 종군한 때 부터라고 하나,이것은 어디까지나 스페인과 일본사의 기준이지 합리와 통합적 근거나 기록은 없다.
물론 후대에 창작한 것은 맞고 또 많이 있다.열도의 倭와 반도의 조선관계에서 이루워진 임진왜란도 아니란 것은 이
미 정사서 원전들이 잘 밝혀주고 있는 이상 반도와 열도 사이의 인진왜란 얘기도 아니다.또한 대륙에서의 천주교 전
파라 할지라도 조선에 속했던 섬지역 거주의 倭호칭 세력들이 대륙의 조선으로 진입하면서 전쟁중에 천주교를 전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풍전등화의 형국에 반도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 왔다고 말하는 것은,대륙 남방에
천주교가 몰래 들어온 시기를 옮겨놓은 것일 뿐이다.즉 일본을 위한 기독교 차원의 아전인수식 해설로 보면된다.스
페인 신부보다 동방(조선=동국)에 먼저 들어온 마테오 라치도 이시기 에는 대륙의 남방이자 광동에서(소주) 헤매고
있었다.또 대륙에서도 병사의 신분겸 천주교 신자가 조선에 올수는 있지만,스페인 신부의 전도와는 연관이 없다.임
진왜란이 역사의 명나라와 왜 사이에 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던 만큼,열도와 반도 사이의 스페인 신부의 천주교
해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16세기 말 천주교(로마 기독교)는 반도나 북방보다 최초에 들어온 대륙의 남방도 설득하
지 못한체 미적 거리고 있었다.
12, 또 스페인 신부에 의해 전도된 천주교 신도가 조선에 왔고 신부가 종군하여 반도나 대륙에 천주교를 전파(포교)했
다는 애기는 역사적 강자들의 해설로 설왕설래 할 뿐이다.전도가 있었어도 대륙의 동남부 지역 일부에서의 왜란과 왜
군,스페인의 신부의 얘기라면 억지라도 대입 시킬수는 있다.이때는 먼저 동방에 들어온 제수이트의 마테오 리치 조차도
만력제의 북경을 가지도 못하고 최 남방인 광동의 韶州에서 숨어지내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란 것을 알아두
면 이해가 쉽다.도미니크 선교회 소속의 스페인 신부들의 원리주의는 대륙이나 반도에서 조차 전례와 싸우느라 전혀
먹히지 않을 때였고,리치 조차도 만력제에게 천주교 포교의 승인도 받지 못하고 여러곳(광주,肇慶,韶州,남창,남경,북경,
蘇州등)으로 도망다니고 있을 때였다.따라서 이때는 그 누구든 동방에서 누가 누구에게 천주교를 포교하고 전파할 상
황에 있지 않았고,당시의 시대상황이 누란의 위기처럼 전쟁으로 아주 어수선 했다.18세기 말에는 蘇州(昆山)의 주문모
가 제수이트 선교 본부의 지시로 조선에 밀입국해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 그 조선도 반도가 아닌 지금의 남경
과 주변(상하이 포함) 일대를 말한는 것이다.물론 그가 사사(포섭)하여 천주교인으로 만들었다는 황사영과 신도들 역시
반도인이 아니다.주문모나 황사영 모두는 대륙 조선인 이었다.
밀입국과 비밀형태의 신앙 체게를 유지하던 이들은 1801년(순조 1년)엔 이승훈,주문모를 비롯한 많은 천주교인 들이
국법을 위반 했다는 이유로 처형,유배되는 辛酉邪獄을 일으켰고,1831년 파리에 있던 外國傳道協會가 천주교 조선(동
방)교구를 창설하기도 했으나,이 역시 반도에서가 아닌 대륙 조선에서의 일이다.1836년 1월(순조31년)에는 프랑스의
모방(Maubant) 신부가 프랑스인 으로는 처음으로 밀입국하여 포교에 종사했고,이를 계기로 많은 선교사들이 밀입국
해 선교 활동을 하기는 했다는 그곳 역시 반도가 아닌 대륙 조선에서의 일이다.
13, 불법선교가 성행하자 1839년 9월(헌종 5년)에는 프랑스 신부들을 포함한 수많은 천주교도를 처형한 '己亥邪獄' 이
일어 났으며 동년 10월에는 헌종이 '斥邪綸音(황제의 말씀)' 을 내려 천주교를 믿지 못하도록 했다.이역시 반도에서의
기해사옥이 아니였다.당시의 헌종은 천자나 황제가 아니기에 '綸音' 을 내릴수가 없었다.그러나 이미 해설된 역사에서
헌종은 청의 '道光' 이란 년호를 받아쓰고 있던 하급의 제후와 번국으로 해설되나 원문의 역사는 헌종이 황제가 내리는
윤음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그렇다면 헌종은 또 다른 황제였다는 증거다.천주교 탄압과 사옥은 이미 청의 옹정제를
비롯한 많은 청나라 황제도 똑같이 한일이고 쇄국의 역사 일본도 했던 일이다.이어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이 발생
하자 선교사의 동방진출 그 자체가 서구세력의 침입을 끌어들이는 통로가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천주교 禁壓정책은
더욱 강화됐다.청나라의 道光帝(1821~1850)도 금압을 했다.조선의 천주교도 들은 단지 자신들의 천주교 포교 활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조정이나 왕의 승인없이 불법으로 서양의 정치적,군사적 지원 받으려 했다는 점도 큰 죄다.
그 근거로 명확했던 것이 바로 황사영의 백서였다.이때문에 처참한 신유사옥(1801)이 벌어졌다.신부이자 蘇州인으로
남경(한성,양주)에서 처형 당한 주문모 신부도 조선(동방)의 천주교 포교를 위해 포르투갈 정부에 '수호사절단(정부와
군대파견)' 파견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여기에 천주교 포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외국군대 주둔및 정벌을 요청하는등
국법을 위반하는 반역의 황사영의 백서가 더해 짐으로서 '천주교 선교사 들과 교도들이 외세 침략의 앞잡이' 라는 실질
적 경계심을 더욱 굳히게 했고 동방의 여러곳에 '斥和碑' 가 퍼지게 된 것이다.
동방진출이 영국보다 늦은 프랑스는 1841년 9월(헌종 7년) 군함 에리곤호를 마카오에 보내 조선인 신부 金大建과 崔良
業을 통역으로 태워 조선으로 항진할 생각을 했으나 아편전쟁이 종결되자 중지했다.김대건과 최양업은 당시 마카오의
조선(동방)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있을 때였다.이들이 마카오에서 조선의 넓고 많은 지역중 가고자 했던 그조선은
양자강 하류의 남경과 양주 일대인 강남의 조선 이었다.이후 김대건은 1845년 이곳으로 밀입국하여 포교 활동을 하였고,
楊州(한성부) 조선의 주교로 임명된 '페레올(Ferreol)과 다브뤼(Daveluy)까지 밀입국 시켰다가 동년 9월에 잡혀 된서리를
맞았다.국왕의 명과 국법을 어기고 밀입국시킨 죄가 컸다.특히 당시 조선정부가 선교사들과 천주교도 들에게 발작적으
로 거부 반응을 보인 이유는 1840년 1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할때 외국의 선교사들과 내국의 천주교도 들이 향도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4, 천주교도 承旨 '南鐘三(1817~1866)과 洪鳳周(~1866)' 는 프랑스 선교사를 숨겨 줬다는 죄로 대원군에게 죽게 된다.
이들은 1864년~1865년 사이에 러시아의 통상 강요와 진출을 걱정하여 대원군에게 '防俄策略書' 라는 의견서를 제출한
다.이들은 서양의 다른 외침세력들을 모두 제외하고 오직 러시아를 방어할수 있는 국가 정책으로 서양인 신부의 힘을
빌어 영국과 프랑스와 3국 동맹을 맺을 것을 건의 했다.결국 외세를 막기 위해 외세에 의존 하자는 얘기였다.그러나 그
들의 '防俄책략' 은 당시의 상황으로 실효성 없는 허황된 얘기였다.즉 원할한 천주교 포교를 위한 속임수 였다.이미 천주
교에 경도된 자들의 서양 의존성 주장들로 이후 1880년 황준헌의 '조선책략' 과 다를 바가 없었다.이는 이들의 머리에서
나온 얘기가 아닌 영불의 본국 정부와 상인들,선교사들을 통해 나온 천주교와 英佛을 위한 속임수였다.그럼에도 이책략
은 입장이 옹색했던 이하응의 허락을 받아 진행되었다.이들은 프랑스의 베르느(Berneux) 신부 등에게 연락 취했으나
이들이 계획적으로 시간을 끌면서 대원군과 조정을 지치게 만들었다.약속 시일보다 훨씬 늦은 1866년 말에서야 겨우
대원군 과의 회견을 주선했다.이에 대원군은 약속 기일을 어겼다는 이유로 회견을 취소하고 뒤이어 '丙寅邪獄(1866년)'
을 일으켜 천주교와 교도들을 탄압했다.이어 프랑스 군에 의한 병인양요도 따라 왔다.
15, 당시의 러시아는 역사의 조선에 대해 무례한 요구나 침략을 한적도 없었고 강제 통상을 요구한 적도 없었다.이후 새
로 통상을 요구한다는 이유 하나로 황준헌의 '조선책략' 과 똑같은 내용으로 러시아를 비토하고 영국과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 러시아를 방어해야 한다는 '防俄策略書' 가 어떻게 나올수 있었는지 궁금할 뿐이다.이건 천주교 포교를 원할히 하기
위한(정권회복)또 다른 매국이었다.이들은 과연 조선정부에서 녹을먹고 영국과 프랑스를 위해 일했던 천주교도가 아니
였을까? 이는 남종삼이나 홍봉주 같은 천주교도들이 英佛선교사 들의 사주를 받고 이익 독점을 위해 사전에 러시아의
조선(동방) 진출을 방해하자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남인인 이들은 평소에 러시아인 들을 상대해 본적이 없다.따라서 조
정은 영국에게 아편전쟁을 이기도록 향도역할을 잘해준 천주교 신부들과 신도들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는 상황이었고,
고의적으로 약속까지 지연시키자 이들의 내심을 파악한 조정이 '邪獄' 을 만들어 천주교와 관련자들을 탄압한 것이다.
당시는 프랑스 신부 10명과 최양업 신부도 조선에 밀입국하여 포교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이때 프랑스 신부 7명과 남종
삼등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처형,추방 되었다(1866년,병인사옥).당시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은 서양인 혐오에도 있었지만,
1,2차 아편전쟁에서 영불군의 전횡과 무자비한 폭력과 약탈을 알고 있었기에 더 가혹하게 진행 되었다.또 이전쟁에서
서양 침탈의 향도 역할을 했던 천주교 선교사 들과 교도들의 말은 더욱 신뢰할수 없었다.실제로 당시의 영국과 프랑스
군들의 행동은 흔히 해적이나 마적들이나 하는 '살인,약탈,강도,강간,도둑,인신매매,방화' 행위가 기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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