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나무들 돈나무와 남천

[정가네]

[천리포 나무들] 겨울 햇살 속 찬 바람 들자 서서히 제 빛깔 드러내는 식물들

   [2009. 12. 14]

   종강 하고 나니, 조여들었던 마음이 한껏 풀어졌습니다. 여느 해에 비해 바짝 조여놓고 보낸 학기였던 까닭입니다. 다른 학기에 비해 한 강좌 더 많기도 했고, 계획에 없던 대중강좌도 여러 차례 있었으며, 일간신문의 연재 칼럼(식물 이야기)도 맡게 됐지요. 와중에 지난 달에는 장모님을 저 세상으로 보내드리는 일까지 있었어요. 정신 없이 보낸 가을이었습니다.

   종강을 하자 무작정 길게 자고 싶었습니다. 생각대로 잠을 길게 잔 것은 아니지만, 며칠 동안 뒹굴거렸습니다. 겨우 마감에 걸린 원고만 챙기는 정도였지요. 그리고 어제 일요일에는 가까운 친구의 배려로,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의 피아노 연주회를 다녀왔습니다. ‘늑대 보호’로도 널리 알려졌지만, 오로지 음악으로만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이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의 행복한 연주회였습니다.

   해마다 이 즈음 종강을 하고 나면, 저는 불가의 스님들처럼, 혹은 숲속의 식물들처럼 ‘동안거(冬安居)’를 준비합니다. 한해 내내 길 위를 떠돌며 만나보았던 나무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올 겨울도 이제 대학의 기말 최종 평가를 마치고 나서, 여느 때처럼 동안거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올에는 지난 한햇동안 귀 기울였던 천리포수목원 식물들의 이야기를 어떤 형식으로든 정리할 예정입니다.

   지난 해 겨울에 시작한 ‘천리포 나무들’ 이야기가 꼭 한 해 됐습니다. 다시 겨울 채비에 들어간 수목원 식물들의 분위기가 사뭇 음전합니다. 겨울 되어도 잎 떨어뜨리지 않는 상록성 나무들의 분위기는 이 겨울에 유난히 돋보입니다. 푸르른 잎새 사이로 노랗거나 빨갛게 맺힌 열매들이 눈에 들어오는 때이지요. 사진은 돈나무(Pittosporum tobira)의 열매입니다.

   돈나무는 우리나라 남쪽의 해안이나 섬 지방에서 잘 자라는 나무입니다. 돈나무라는 이름의 유래는 조금 독특합니다. 돈나무에 열매가 늦가을 되면서부터 맺히는데, 이때에 열매에 모여드는 곤충은 다름 아닌 파리들이지요. 벌이나 나비는 이미 사라진 다음이고, 파리들은 돈나무의 열매에서 나오는 점액질에서 양분을 취하는 거지요. 파리가 많이 꾀자 제주도에서는 이 나무를 ‘똥낭’이라고 불렀습니다.

   ‘똥나무’라는 거지요. 그리고 이 나무에 그다지 특별한 신경을 쏟지 않았습니다. 조경수나 관상수에 신경을 쓰기 어려울 만큼 사는 게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이었지요. 정작 이 나무의 가치를 알아본 것은 제주도에 여행 왔던 일본인이었습니다. 사철 푸르게 달려있는 나뭇잎의 조형미라든가, 봄에 피는 꽃의 향기, 가을에 맺히는 열매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겁니다.

   일본인들은 이 나무를 자기 나라로 가져갔습니다. 그때 제주도 사람들에게 이 나무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모양입니다. 제주도 분들은 평소 부르던 대로 ‘똥낭’이라고 했을 테고, 일본인들은 ‘낭’이 ‘나무’의 제주도식 표현이라는 걸 알았겠지요. 일본인들은 일본에서 이 나무를 조경수로 잘 키워냈고, 그렇게 키워낸 이 나무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환영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원래 이름이었던 ‘똥나무’를 그들 방식대로 불렀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제주도에서 알아간 발음을 그대로 적었겠지만, 일본어 발음에 쌍디귿과 이응 받침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잖아요. 결국 일본인들의 발음을 다시 우리 말로 적으니, ‘돈’이 되고 만 겁니다. 그러니 돈나무의 ‘돈’은 부자들에게 많은 돈이 아니라, 똥의 일본식 표기인 거죠. 원래 우리 말 이름이 그리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리 나무를 일본식으로 바뀐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마음도 그리 편치는 않습니다.

   우리 수목원에는 돈나무가 여러 그루 있습니다. 게스트하우스인 초가집 옆에도 있고, 무늬 식물을 모아둔 무늬원의 작은 연못 가장자리에도 있습니다. 이 돈나무들이 지금 한창 노랗게 열매를 맺어 올렸습니다. 짙푸른 잎사귀 사이로 노랗게 돋아난 열매들이어서 한층 돋보입니다. 1센티미터 크기의 이 열매들은 조금 지나면 갈라지면서 안쪽의 붉은 씨앗을 드러낼 겁니다.

   저 열매를 맺기 위해 지난 봄에 피었던 작고 하얀 꽃에서는 향기가 납니다. 이 향기를 떠올리면, 이 나무를 ‘똥나무’라 불렀던 옛 사람들의 무심함이 원망스러울 정도이지요. 돈나무 꽃에서 나는 향기는 참 좋아요. ‘천리향’이라고도 부를 정도이니까요. 꽃은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돈나무는 사시사철 보기 좋은 나무입니다. 단정하게 돋아난 잎사귀의 싱그러움이 특별히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나무이지요.

   봄부터 내내 그러했다지만, 특별히 요즘 우리 수목원 숲에 사는 새들에게는 하루하루가 배부른 잔칫날의 연속일 겁니다. 실제로 새들의 지저귐이 한층 높아졌어요. 숲을 산책하다 보면, 새 소리에 넋을 놓칠 정도입니다. 먹이가 많아진 탓입니다. 온갖 나무들이 열매를 맺고 새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새들에게는 그야말로 푸짐한 잔칫상이 아닐 수 없는 거죠.

   지난 주에 겨울 정원(Winter Garden)의 뿔남천 종류(Mahonia x media 'Round Wood')에서 피어난 꽃을 보여드렸습니다. 바로 그 뿔남천이 서있는 앞쪽으로는 남천(Nandina domestica 'Umpqua Chief') 의 품종이 새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습니다. 바로 위의 사진입니다. 남천이 뿔남천과 가까운 친척관계에 있다는 말씀은 이미 전해드렸습니다.

   노란 색의 뿔남천 꽃을 뒤로 하고 붉게 맺힌 남천의 열매가 햇살을 받아 유난스레 돋보입니다. 이 즈음에 도드라지는 열매들 가운데 남천의 열매처럼 빨간 색으로 맺히는 게 많기는 합니다만, 1센티미터도 채 안 되는 작은 열매가 주렁주렁 모여 달린 남천은 보기에 참 좋습니다. 잘 자라야 3미터가 채 안 되는 낮은키나무인 까닭에 다른 나무들의 그늘에 묻혀들지만, 그 사이로 새어든 겨울 햇살을 받은 남천의 붉은 열매는 더 없이 화려합니다.

   남천은 중국에서 들어온 상록성 나무인데, 우리나라 남부 지방에서 관상용으로 많이 심어 키웁니다. 키가 크지 않으면서도 특히 겨울에 맺히는 새빨간 열매가 예뻐서 정원에 심어 키우기에는 알맞춤한 나무이지요. 꽃은 흰 색으로 6월 쯤에 피어나는데, 열매를 보고 짐작할 수 있듯이, 가지 끝에 조그마한 꽃송이들이 조롱조롱 맺혀서 피어나지요.

   잎을 매단 채로 겨울을 나는 상록성 나무인데, 겨울에는 잎사귀의 색깔이 붉게 바뀐다고 합니다. 저도 우리 수목원 겨울 정원의 이 식물이 겨울을 나는 모습을 기억할 수 없네요. 잎이 붉게 바뀐 남천의 겨울나기 모습이 궁금하네요. 이번 겨울에는 남천의 붉은 잎도 잘 관찰해야겠습니다. 단풍나무를 비롯해 잎의 색깔이 붉어지는 건 진딧물과 같은 곤충을 피하기 위한 나무들의 전략이라고 하는데, 그 점에 대해서도 좀더 알아보아야겠고요.

   겨울 정원을 나와 큰 연못 옆을 걷자니, 볼에 부딪는 겨울 바람이 사뭇 차갑습니다. 마치 연못 지킴이처럼 연못 가장자리에 우뚝 서있는 낙우송도 푸르른 잎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바람 더 불어오면 낙우송은 저 잎들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이 겨울을 나겠지요. 그렇게 우리 수목원의 나무들은 찬 바람 맞으며 차츰 더 아름다운 제 빛깔을 뽐내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식물들이, 지난 가을까지의 생명활동을 한풀 접고 가만가만 겨울잠에 들 채비에 한창입니다. 한햇동안 책상 위에서 이런 저런 일들로 새까맣게 적힌 탁상 달력도 이제 여백을 죄다 채웠네요. 나무 따라, 식물 따라 이 겨울을 더 알차게 보낼 채비에 마음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린네아]

거제도에 있을 때 많이 봤던 돈나무입니다.
사람들은 부를 불러주는 나무인냥 많이 심었던 기억도~

[정가네]

식물의 이름이 붙여지는 걸 보면 참 재밌는 게 많아요. 똥나무가 돈나무로 변했다는 게 그리 믿기지 않지만 사실 돈이 되는 나무도 아니니 믿을 수밖에요. 부산에도 제주도에도 많았습니다.

[아델]

유달산 낙조대 앞에 돈나무 한그루 초여름에 향기가 참 근사했는데 열매를 보러 다시 갔더니 열매는 하나도 없었어요. 얘도 암수딴그루인가봐요.

[정가네]

예, 돈나무는 암수딴그루라고 합니다.

[보라빛도라지꽃]

제주도에 여행갔을때 ,여행가이드가 돈나무를 소개시켜주더라구요........그때 열매가 참 예뻤던 기억이나요......돈나무와 천리향이 같다라는것을 이글을 읽고 알았습니다

[정가네]

돈나무를 천리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지만 일반적으로 천리향이라 부르는 건 팥꽃나무과의 '서향(瑞香)'을 말합니다. 천리향만큼 돈나무도 향이 좋다는 뜻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