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 항아리
+ 찬미 예수님!
이 글은 빈첸시오 회원들이 안양교도소에 있던 한 재소자를 사랑하여 사회로 복귀 시키는 과정을 쓴 글입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진정 하느님의 자식으로서 죄수를 사랑하면 돌처럼 굳은 마음을 가?재소자들이 변한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들은 일반적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교정사목을 오래 담당하셨던 허정현(요한) 신부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랑 항아리’가 다 차지 않아서 그래요. 더욱 사랑해 주어서 항아리가 가득 차면 그 때서야 넘쳐 흘러 나오는 것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잘못했습니다.’등 사람다운 말을 할 수 있지요.”
우리 성당 빈첸시오회에서는 5년 전부터 매월 자매팀을 이루어 안양교도소를 방문합니다. 철문을 여러개 지나 들어가면 천주교인 10여명의 죄수들이 작은 회의실에 모여 우리를 기다립니다. 우리들은 재소자들과 반모임을 하고, 한달 동안 생활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준비해 간 약간의 음식을 나누어 먹고 헤어집니다. 처음에는 흉악한 죄수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막 무섭더군요. 혹시 저 사람들이 출소하여 찾아 오면 어쩌나, 우리 집에 와서 못된 짓이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많이 망서렸습니다. 그래도 “너희는 내가 감옥 갇혔을 때 찾아 와 주었고....” 예수님 말씀이 생각나더군요. 용기를 내어 간 곳에서 우리는 그들 얼굴에서 울고 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대화를 하면서 그들 가슴에 응어리진 눈물을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는 한 ?셜岵? 보았습니다. 그들은 대개 어머니의 사랑이 결핍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평균 학력은 중학교 중퇴입니다. 고등학교까지만 배웠어도 교도소에 올 일은 적다는 뜻입니다. 죄수이지만 그들은 모두 우리 가족이었습니다. 형제였습니다. 사랑해 주어야할 우리의 아이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세상 모든 곳을 돌볼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바로 그렇더군요.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이 절실하게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들을 주님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해외 출장을 가면 반모임에 나오는 죄수들 모두에게 그림엽서를 보내 주었습니다. 난생 처음 외국 엽서를 받아 보았다고 기뻐하는 그들은 그래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변화는 아주 조금씩만 그들 가슴 속에 자리 잡아 갑니다. 세상을 다 구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우선 눈에 들어오는 사람을 하나 씩 선도해 보기로 합니다.
그렇게 여러 달이 지나면서 반모임에 나오는 재소자들과 조금씩 정이 들더군요.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의 ‘사랑 항아리’가 조금씩 차 오르는 모습을 보던 어느날 한 청년이 유난히도 눈에 들어오더군요. 반모임이 끝나고 헤어지면서 그 청년을 말 없이 껴안아 주었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그에게 진심으로 다가 갔습니다. 명심보감을 사 주고 한문을 쓰라고 했습니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지킨다면 더 바랄 것이 없고, 최소한 그 책에 나오는 한문만 읽을 수 있어도 앞으로 사회 생활이 좀 수월해 질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조금씩 깨달음이 생기는지 자기가 살아 온 이야기를 길게 써서 보내왔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가 가출했고, 창피한 아버지가 가족들을 데리고 시골로 이사한 이야기, 사춘기 때에 무작정 가출하여 청량리 역 앞에서 떠돌다가 소매치기에게 붙잡혀 가서 기술자가 된 이야기, 소년원을 시작하여 안양교도소까지 오면서 이마에 별의 숫자가 늘어 간 이야기를 담담하게 ?㎢超봇?. 마지막에는 용서할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한스러움까지 말입니다.
그러면서 2년이 지났습니다. 철이 들어가는 모습이 조금씩 보이더군요. 아침이면 일어나 묵주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고도 했습니다. 성모님 사랑이 좋은지 알 것같다고도 하더군요. 출소할 날이 불과 서너달 남았다고 말할 때에는 출소해서 갈 곳이 없다는 것과 한 번도 월급을 타 본 일이 없는데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지 막막하다는 고민을 털어 놓더군요. 실제로 많은 재소자들이 만기 출소하면 갈 곳이 없어 헤메다가 다시 범죄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고 아무런 기술도 배운 일이 없는 그들에게 교도소에서 배우는 구식 기술 교육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청년도 마찮가지 입니다.
우리 빈첸시오 회원들은 사방에 수소문하여 서울 이영우(베드로)신부님께서 운영하시는 ‘빛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출소자의 쉼터를 주선해 줍니다. 필자는 ‘중장비기술학원’을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제 출소하면 기거할 집과 평생 벌어 먹고 살 기술을 배울 방안을 찾아 주었으니 안심하고 기도 열심히 하라는 말로 격려합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는 날, 새벽 0시에 교도소 문을 나오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우리들 뿐 아니라 다른 남자들도 그를 기다리더군요. 소매치기 일당이었습니다. 그들과 어색한 대화를 하면서 현실의 벽을 보았습니다.
문을 나오는 그를 급히 우리 차에 태웠습니다. 물론 그 일당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지요. 그는 거리에 달리는 자동차 물결을 보면서 어지럽다고 하고, 한 여름인데도 너무 춥다고 하더군요. 5년 만에 맞은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에 적응이 잘 되지 않았겠지요. 출소하여 쉼터에 있는 한 달 동안 무단 외출하여 돌아 오지 않는 규정 위반을 두번이나 했답니다. 공교롭게도 필자는 그 기간 중에 보름간 해외 출장을 가서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하였습니다. 다녀 와 보니 쉼터 지킴이 자매님이 그가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과 이제는 함께 지낼 수 없다는 야박한 이야기였습니다. 절망이었습니다. 7년간의 교도소 사목 활동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 교도소에 갈 날이 다가오더군요. 가기 싫었습니다. 다시는 교정 사목을 못할 것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마지막 인사나 해야겠다는 기분으로 문을 나서는데 전데레사 자매님으로부터 전화가 오더군요. “그가 쉼터로 돌아 왔다네요.” 그 소리는 절망이 다시 희망으로 바뀌는 하늘의 외침이었습니다. 교도소 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습니다. 그 날 오후 그와 통화하여 안양에 있는 중장비학원에 등록 시킬 계획으로 이튿날 우리 성당으로 오게 했습니다. 아침 일찍 온 그와 성당에 올라가 성체 조배를 하고 신부님께 안수를 받게 하였는데 무릎꿇고 안수 받는 모습에서 돌아 온 탕자를 아버지가 맞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 신부님 손이 워낙 뜨거우셔서 그의 머리에는 화상 자국이 생기더군요.
안양에 있는 중장비학원에 가니 고용지원쎈터에 가서 밟아야 하는 절차가 많더군요. 더구나 정부 지원으로 교육을 받는 자리는 이미 다 찼으니 11월에나 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이미 여러가지를 인터넷으로 찾아 보았는지 ‘생활보호대상자’등록을 하고, 구청에서 교육을 받으면 한달에 40만원 쯤 지원을 받으면서 학원을 다닐 수 있으니 그 과정부터 밟겠다고 하더군요. 스스로 일어서려는 노력이 예뻐서 그렇게 하라고 했지요.
왜 쉼터에서 가출을 했으며 왜 다시 돌아 왔는지 물었습니다. 김포에 있는 아는 사람 일을 도와주러 나갔다가 그 날 술 한잔하고 나니 늦어져 쉼터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미안해서 가지 못했답니다. 차일 피일 미루다가 갈 곳이 없어 성남에 있는 소매치기 아지트를 찾아 갔고 열흘을 함께 지냈는데 아무래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으로 자기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성모님께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서울에 볼 일이 있어 가야겠다고 하고 나와서 무거운 발걸음을 쉽터로 돌렸답니다. 그런데도 쉽터에서는 반갑게 맞아 주었고, 마침 데레사 자매님이 전화를 해 주신 것이라고 하더군요. 소매치기들에게 전화를 해서 나도 이제부터는 살길 찾아 가겠노라고, 다시는 그들에게 가지 않겠노라고 선언을 했답니다.
술 때문에 생긴 문제이니 앞으로는 자신을 자제할 능력이 생길 때까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부님들을 보면 술을 많이 드시지만 한번도 흩으러진 모습을 본 일이 있느냐고 물으며 그렇게 자기를 통제할 능력이 없으면 차라리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니 잘 알아 듣고 그 후로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운전 면허는 있느냐고 물으니 없다고 하더군요. 운전 면허 학원비를 주겠으니 등록하라고 했습니다. 운전 면허가 있으면 최소한 택시 운전이라도 해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학과 시험은 혼자 책 사서 보고 실기 연습만 좀 하면 될 것이라며 걱정 말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열흘 쯤 후에 전화하니 밤 새워 공부한 덕분에 학과 시험에 합격했다는 밝은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희망의 싹을 보고 기쁜 마음에 기도했습니다. 이튿날 만나 당당한 표정으로 필기 시험 합격증을 보이는데 참 보기 좋더군요. 28만원을 주고 실기 연습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헤어지면서 쉼터 근처에 있는 성당에 매일 새벽 미사를 가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일찍 일어나지면 가겠다고 희미한 약속을 하더니 요즈음은 재미를 붙여서 매일 새벽 미사를 간다고 합니다. 돈암동 성당의 새벽 미사에는 신도들로 성당이 꽉 차는데, 근처 수녀원에서 수도자들 20여명도 나온다고 합니다. 수도자들의 깊은 영성이 충만한 성당에서 아침 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은 분명 그를 변모시킬 것입니다. 이제 중장비학원을 다녀서 면허를 따면 분명 새벽 미사에 나오시는 어느 형제가 너를 눈여겨 보다가 취직 시켜 줄 것이라고 예비하시는 하느님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며칠 후 다시 만났을 때 요즈음도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소매치기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 충동은 느끼지 않는데 가끔 가방을 멘 자세를 보면 가서 고쳐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쳐다보지도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니 그래서 책만 열심히 읽는답니다. 그는 지난 과거가 평생 지고 가야할 것 같은 자기만의 십자가라고 말하더군요.
나는 손을 씻는 요령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많은 질병이 손을 매개로 온다는 것과 손은 자주 씻되 이왕이면 비누로 깨끗이 씻어라. 그 때마다 ‘나는 손 씻은 사람’이라는 자기 최면을 걸라고 이야기 해 주니 그는 깨달음으로 안색이 변하더군요. 요즈음은 그와 매일 통화를 합니다.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는지 성체를 받아 모실 때 마다 자신도 기적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제 절반 쯤 성공한 느낌입니다.
사목위원 여러분, 그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의 인생에서 다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주십사하고 기도 해 주십시오. 지금 그를 바르게 이끌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우리 옆에 설 것이고, 어려움을 참지 못해 다시 범죄의 나락으로 빠지면 칼 들고 골목 길에 서거나 우리 딸들의 핸드백을 ??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불우한 가정에 늘 도움을 주십시오. 그런 집의 아이들이 버려지면 사랑 항아리가 메말라 사랑을 갈구하면서 못된 짓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소년원으로, 교도소로 떠돌게 될 것입니다.
주위 형제들에게도 보험드는 기분으로라도 빈첸시오 회비도 많이 내고, 늘 주위에 있는 불우 가정을 한 번 더 돌아 보라고 권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불우 가정과 청소년에게 사랑을 부어주면 그들의 인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사회에 범죄도 예방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 항아리는 지금도 우리들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10월 18일 북경에서 이순형(광헌) 올립니다.
첫댓글 찬미하라!!!주님의 사랑을~~~ 이형제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이 한 영혼을 주님 앞에 이끄시는 모습이 눈 앞에 선 합니다... 과천 빈첸시오 협의회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러한 경험담들이 여러 회원들께도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누고 사랑하는 큰 강물이 바다에 이르러 평화를 찾았군요. 과천성당 빈첸시오회 협의회 사랑의 힘이 전 세계로 퍼져감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