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쇄박물관 앞에서의 많은 회원님들과 사진 촬영을 하면서 왜 그리 반갑고 즐거웠던지 손을 잡으며 닉네임을 대던 모습들이 생생하게 영상으로 스쳐지나갑니다. 청주에서 활동 하시는 원교님을 비롯하여 무각님 그리고 해설자이신 연아님 청주에서 활동 하시던 회원님들을 열거 할 수가 없어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경향 각지에서 오신 회원님들께서 송정 이라면 알아보아 주시는 그 마음이 행복도 하였지요.
서예세상 운영자 23명과 111명의 회원님과의 만남이 있었고 인사로서 사이버 세상에서 오프라인 세상에 교분이 두터움을 서로가 확인 하였고 이곳 고인쇄 박물관 지하 영상실에 시원한 교육장에서 연아 이희우 운영자님께서 고인쇄 박물관에 대한 역사와 배경에 자세하게 인쇄박물관이 세워지기까지의 역사를 세세히 공영물을 관람을 하면서 청주의 문화관광해설사 로서의 위상을 높혔으며 그곳에서의 고은 이미지를 남겼음은 주지의 사실이였습니다.
이곳은 흥덕사에서 출토된 여러 남은 자료의 현장을 복원한 곳입니다.
고인쇄박물관의 사진 자료를 전시하여 역사의 자료를 상세히 관람을 할 수 있었고 버턴을 누르면 모형인이 자세히 설명을 하여 주어 어린이나 어른 그리고 학생이 몸소 체험을 통할 수 있었고 탁본까지 할 수 있는 시설을 완비한 고인쇄박물관의 위상을 높혀준 교육의 산실이였습니다.
이 책은 백운화상심체초록불조직지심체요결의 영인본을 전시한 사진입니다. 아직도 정본은 이곳에는 없음이 애석한 일이였습니다.
금속활자를 재연한 모형인의 모습은 보턴을 누름으로서 모형인이 인쇄술에 관한 자료를 자세히 설명을 하여 주는 장면입니다.
목판본은 한번 쓰면은 다시 새겨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으나 책 한권이 아닌 많은 같은책은 인쇄를 하였던 기술이였던 것입니다. 목판본에서 철판인쇄로 발전한 단계였으면 목판복의 역사를 거치지 않았다면 철판인쇄술은 이루어 지기 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박병선박사님이 프랑스에서 백운화상불조직지심체요결의 책을 발견을 하지 않았다면 인쇄숧에 전세계의 문화 유산은 요원한 미궁에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인쇄술은 밝혀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 분을 기리기 위하여 사진으로 전시가 되여있는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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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구곡에서 단체 사진을 촬영을 하면서 정겹고 아름다운 선남선녀들의 모습이 빠질세라 함께 하시려는 그 모습은 참으로 사이버세상에서 오프라인 만남의 광장이 이 보다 더 반가울 손가??? 되 물어 보기도 합니다. 화벽님의 촬영기법에 대한 설명 하며 멋지고 아름다운 화양구곡의 풍광이 작품으로 화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함께 하여 주신 회원님들의 정겹고 아름다운 추억의 역사가 멋을 더하는듯 하였습니다.
한번 촬영을 하고 두번을 촬영한 모습은 팔을 든 회원님이 멋진 포즈일 겁니다. ㅎㅎ아하 아래 사진에는 화벽님이 보이질 않는 군요. 정 많고 배려십이 많으신 회원님들과 만나서 정겨운 대화는 나눌 수 없었어도 마음만은 한 마음으로 정을 통하는 그런 하루였을 것입니다.
화양서원에서의
문신·학자 [1607]) [宋時烈]
1607(선조 40)~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개요
송시열의 글씨 /송시열의 글씨,
<명가필보〉에서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본관은 은진.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화양동주(華陽洞主).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갑조(甲祚)이고,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이다.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거 정계에 진출해 산당(山黨)이라는 세력을 형성했던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과 함께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부자에게서 배웠다. 26세 때까지 외가인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에서 살다가 회덕(懷德)으로 옮겼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면서 관직생활에 발을 내디뎠다. 1635년 봉림대군
(鳳林大君 : 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효종이 급서한 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은 기년복(朞年服 : 만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하면서 3년복(만 2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던 남인의 윤휴(尹鑴)와 대립했다. 예송
은 〈대명률 大明律〉·〈경국대전〉의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결국 1년복으로 결정되었지만 이 일은 예론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이 정권을 둘러싼 당쟁으로 파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제2차 예송이 일어났을 때 대공설(大功說 : 9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을 내세운 남인에게 패배, 실각당했다. 이듬해 앞서의 1차 예송 때 예를 그르쳤다 하여 덕원으로 유배되었고, 이어 웅천·장기·거제·청풍 등지로 옮겨다니며 귀양살이를 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재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다시 등용되었다.
그뒤 서인 내부에서 남인의 숙청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이 생겼을 때, 강경하게 남인을 제거할 것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을 지지했다. 이로써 서인은 1683년 윤증(尹拯)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장파의 노론
으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1689년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해 6월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송시열은 젊은 시절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했는데 그의 학문은 바로 이러한 기호학파의 학맥을 근간으로 형성되었다. 이기론(理氣論)에서 그는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는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다. 또한 정통 성리학
자로서 그는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다. 〈주자대전 朱子大全〉·〈주자어류 朱子語類〉의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 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긴 것은 이같은 그의 학문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학풍은 기본적으로 양란 후의 사회적·정치적 동요를 수습해서 양반지배체제를 재건하고 나아가서는 조선과 명(明)의 '원수'인 청을 물리치고 중화적 세계질서를 회복하고자 한 현실인식의 반영이었다. 곧 주자학의 명분론인 삼강오륜을 사회운영의 원리로 파악하여, 청에 대한 복수의 근거를 명에 대한 강상(綱常)·군신(君臣)의 관계에서 찾았다.
이같은 북벌론은 당연히 조선왕조의 부국강병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정치적·사회적인 측면에서 송시열이 강조했던 것은 '세도정치론
'(世道政治論)이었다. 이는 강상윤리를 기초로 하는 사회기강의 확립과 주자학적인 의리(義理)·도학(道學)의 실현에 목표를 두는 것이었으며, 또 이의 실현주체로서 성학(聖學)의 수양을 쌓은 성인(聖人)으로서의 군주를 상정하는 것이었지만 그러한 군주가 없을 경우에는 현인(賢人) 재상(宰相)이 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현실적으로는 세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군자당(君子黨)은 노론뿐이라는 당파적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여 명에 대한 존주대의와 병자호란에 대한 복수설치가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것은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유교적 명분론의 표현임과 동시에 양란 이후 국가재조(國家再造)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국가기강의 확립과 민생의 안정을 위한 강력한 통치이념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국가재조의 방향에 있어서 그는 봉건국가의 틀을 유지·강화하는 가운데 그 운영을 개선하여 양란 이후의 사회적 모순에 대처해나가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송시열은 이 시기 정전론
(井田論)·기전론(箕田論)으로 집약되던 토지개혁론에 대해 반대했다. 곧 그는 주자의 정전제난행설(井田制難行說)에 따라 정전제는 토지가 적고 인구가 많은 시기에는 실현할 수 없으며 병란을 거치고 인구가 감소한 뒤가 아니면 시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가 양란 후의 사회경제 재건을 위해 내놓은 대책은 부세제도(賦稅制度)와 재정제도를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이었다. 즉 부세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문란해진 농민수취 질서를 재정비하여 농민부담을 경감시키는 한편 국가재정을 강화한다는 것이 그 주요내용이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신원되어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해에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에는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때부터 화양동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약 70여 개 소에 이르는 서원이 세워졌다. 1716년(숙종 42)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을 통해 그의 학문적·정치적 권위가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영조·정조 이후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사상적 지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구축하게 되었다.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지문 문제로 노론·소론으로 분당되어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趙誠乙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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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렁 더우렁 이 글과 사진들이 내가 촬영을 한것은 없을 지라도 우리라는 공동체 서예세상에서는 존재할 수가 있고 즐거웠던 한 페이지와 우리가 느껴야 했던 선인들의 모습이며 그들이 우리에게준 시사하는 바가 많았음을 우리는 이번 답사를 통하여 알았을 것입니다.
非禮不動비례부동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라는 글 하며 大明天地대명천지 崇禎日越숭정일월 참으로 이 글을 보면은 불의를 멀리 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따르자는 그런 글들이 후학들에게 참다운 교훈을 남겨 놓은 새김의 극치 일것입니다.
우리가 지나간 흔적은 사진속에 역사를 만들고 그 지나간 세월 속에 溫古之新온고지신이라는 옛것을 온화하게 받아들여 새것을 만드는 우리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이번 답사를 통하여 고인쇄박물관에 대한 자료를 보아서 알게되였고 화양서원을 답사를 하면서 문화해설사 김영운님의 자세한 해설은 우리가 기억해야할 우리의 문화 유산인 것입니다.
고인쇄박물관을 답사를 하면서 서양보다 발전했던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운 문화 유산은 우리의 寶庫보고이며 길이 후손에 물려 줄 겨레의 자긍심인 것입니다. 어우렁 더우렁 화루를 보내던 하루가 우리 서예인들의 직접 체험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은 좋은 계기가 되였으리라 주지 하는 바입니다.
이번 회원님들과 운영진 23명은 혼연일체가 되여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였고 함께하지 못한 회원님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인하여 더욱 새로워진 찬조라는 신조어처럼 많은 성원을 하여 주었던 것만은 사실일 것입니다. 하나의 나눔은 배가되는 미쁨을 자아네게 하여 추첨이라는 함박 웃음과 빅 이벤트를 만들어 낸 계기가 되였습니다,
서로가 배려하는 마음 솔선수범하는 마음 서로가 희생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이번 답사는 운영자님들과 회원님들 간에 뉴대를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답사를 계기로 다움 사이트에서 추천 카페로 거듭나게 되였음은 우리 서예세상이 서로가 합심한 근원의 저력임을 서로가 자부를 하여야 할것입니다.서예세상 정기 답사 에 거듭 낳게됩과 추천 카페로 거듭 나게 됨을 축하하고 환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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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렇게 긴 글로 답사후기를 올려 주신 열정적인 송정님께 감사드립니다. 사진은 누가 찍었던간에 송정님도 분명 눈사진을 이렇게 찍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모든 분들이 옮겨 드린 것이지요! ㅋㅋㅋ 상세한 소개말씀이 다시 한번 답사일을 기억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
동하님:안녕 하세요? 선두로 댓글을 달아 주시고 송정이 사진을 촬영도 하지 못하고 회원님들의 사진을 편집 한 것을 눈팅으로 이해를 하여 주시니 우선 고맙고 감사합니다.ㅎㅎㅎ 동하님께서 빅 이벤트에 추첨권 사회를 유능하게 잘 사회를 보아 주시고 틈틈이 셧터를 누르시여 많은 역사속의 포토의 아름다운 산진을 올려 주셔서 즐겁웠습니다. 늘 행복 하시구요. 건필 하세요. 건강 하시고 늘 행운이 충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다시 보고 또 봐도 아름다운 모습들 ... 영원히 기억되리라 믿어 집니다 . 긴긴글 올려주신 송정님 고맙습니다 ...다시 보여 주심에 깊은 감사 드리고 오늘도 환하고 맑게 활짝 웃는 날 이시기를요.....^^**^^
당인님:안녕 하세요? 서울에서 회원님들을 인솔하여 오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송정이 다인님의 자리를 염치도 없이 앉아 와 가시방석이였습니다. ㅎㅎㅎ 배려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무지몽매한 글로 올려 보았는데 좋은 평가를 하여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언제나 행복 하시구요. 건필 하세요.*^^*
이 글을 읽어가노라면 답사때의 상황이 다시 되살아납니다. 늘 앞에서 봉사해 오신 송정선생님의 수고로운 덕분에 다시한번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지기님:안녕 하세요? 글을 조리있게 쓰지도 못하면서 장황한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그날의 답사가 즐거웠고 아름다운 추억의 역사를 만들어 놓은 서예세상의 좋은 답사였슴을 자부합니다. 지기님의 희생정신으로 이 답사가 원만히 치루어졋음을 자인합니다. 지기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늘 행복 하시구요. 건필 하세요. 건강 하시고 늘 행운이 충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송정선생님의 자세한 답사 후기 잘 읽었습니다. 늘 저희들이 배워야 할 일머리를 알려 주시는 송정님이 게셔서 행복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서향님:안녕 하세요? 서향님의 간단명료한 글 보다는 긴 지루함이였을 것인데도 이렇게 끝까지 읽어 주심에 고맙고 감사합니다. 선인들이 밟고간 그 길을 더듬어 보면서 우리가 지켜야할 마음의 자세를 짚어보았을 뿐입니다. 늘 행복 하시구요. 건필 하세요. 건강 하시고 늘 행운이 충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이른아침에 송정선생님 답사후기를 따라서 다시한번 답사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송정선생님이계신 서예세상은 늘 서광의빛이 함께하리라 믿습니다 더워지는 날씨에 건강에 유념하소서...
지향님:안녕 하세요? 이른 아침에 오셔서 송정의 글을 읽으셨다는 그 말씀이 무지몽매한 사람의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심에 고맙고 감사합니다. 서예세상에서 서로가 배려와 희생 솔선수범 하시는 그마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그 마음이 서예세상을 이끌어 가는 힘일겁니다. 늘 행복 하시구요. 건필 하세요. 건강 하시고 늘 행운이 충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후기를 너무 자세하게 해 주셔서 다시 한 번 답사합니다. 더운 날씨에 늘 건강하세요.
서예박사님:안녕 하세요? 만나서 반가웠고 호두과자를 사오셔서 잘 먹기도 하였습니다.사오신 보람도 없을 뻔 하여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이렇게 오셔서 댓글을 달아 주심에 고맙고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시리라 믿습니다.언제나 횅복 하시구요. 건필 하세요. 건강 하시고 늘 행운이 충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지나간 추억의 자리에 다시 머물러 봅니다 고맙습니다. 무더워지는 여름 건강하게 보내시고 칠월도 변함없이 멋진 나날 되세요.
연당님:안녕 하세요? 이렇게 오셔서 고은 댓글로 힘을 북돋아 주심에 고맙고 감사합니다. 언제나 댓글로 이번 답사에 일익을 담당 하셨고 빅 이벤트의 추첨권 때에 인사 소개에 시로 멋진 은구슬 굴리던 목소리로 태ㅔ마 시를 낭송 하시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늘 행복 하시구요. 건필 하세요. 건강 하시고 늘 행운이 충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송정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고맙습니다..^^
동구님:안녕 하세요? 무지몽매한 사람이 글을 올렸는데 이렇게 띄워 주시니 고맙고 감사합니다.교훈을 준다고 말씀 하시니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을 뿐입니다 언제나 행복 하시구요. 건필 하세요. 건강 하시고 늘 행운이 충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사람은 세월속에잊혀지지만 남은자들마음과 기억속에 자리할수있게끔 이렇게또한추억이반영되니 이얼마나 아름다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