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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월30일(월)맑음
해가 떠서 눈 세상을 비추니 白光天地 一色이다. 東方滿月世界 琉璃光宮殿에 들어선 듯. 울력 목탁 울리고 대중이 빗자루를 들고 나와 눈을 쓸어 길을 낸다. 신천지에 처음 길을 낼 때도 이러했을까? 길을 낸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처녀지에 길이 닦이면 사람과 자동차의 왕래가 생기고, 처음엔 교역통상과 문화교류, 나중엔 약탈과 지배, 갈등과 투쟁이 일어난다. 길을 내지 않고 내버려두거나, 길을 막아버리면 어떨까? 고립과 자생, 정체와 소외일 것이다. 길을 내도 문제, 길을 내지 않아도 문제이다. 세상사가 하느냐, 마느냐의 양단간의 선택에 기로에서 헤매게 만든다. 이에 하나의 禪話가 떠오른다. 암두스님이 덕산선사의 방문턱에 들어설 때 한발은 방안에 들여놓고 한발은 밖에 두고 묻기를 ‘제가 들어가는 것이 옳습니까(聖人입니까), 들어가지 않는 것이 옳습니까(凡夫입니까)?’라고 하니, 덕산선사가 전광석화같이 ‘할!’을 했다. 이에 암두스님은 말없이 큰절을 하고 물러나왔다는 선문답. 이 이야기를 눈 쓰는 일에 비유한다면 산중 암자스님의 역설에 해당한다. 산 속 깊은 암자에 눈이 와서 천지가 雪白一色이다. 아침이 되자 스님이 빗자루를 들고 생각한다. 스님이 눈을 쓸어 길을 내는 것이 옳으냐, 눈을 쓸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옳으냐? 눈을 쓸어 길을 내면 찾아오는 신도들이 ‘에이, 스님께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두시지, 괜히 부산을 떨어 자연미를 손상시키셨어.’라는 허물을 잡을 테고, 눈을 쓸지 않고 그대로 두면 ‘에이, 스님이 게을러서 눈을 치우지 않으셨군.’이라는 허물을 잡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양쪽에 허물을 만들지 않고 경우에 맞게 처신할 수 있을까? 덕산선사처럼 큰소리를 지를까? 그러는 것도 생뚱맞은 짓. 빗자루를 문밖에 기대어 두고 방으로 들어갈까?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쓸고 싶으면 쓸고 들어오든지, 그냥 두고 싶으면 눈을 밟고 오든지 하겠지. 그것도 어줍짢다. 정신이 양쪽으로 갈라져 해답을 찾으려고 하면 답이 없다.
눈 울력을 끝내고 다각실에 모여서 차를 나눈 뒤 각방으로 돌아간다. 해가 떠올라 따뜻해지면, 눈이 녹아 옛 길이 온통 드러날 것이다.
2017년2월2일(목)맑음
영천에서 진성이네가 왔다. 거의 네 시간을 달려서 온 장거리 여행이다. 명고스님과 일행과 함께 점심을 먹다. 명고스님 방에서 차를 마시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조카 진성은 초등학교 5학년인데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말이 없다. 도원과 연수, 진성과 눈 쌓인 산을 한 바퀴 돌다. 템플스테이 방에서 쉬게 하다.
밤 정진 끝나고 하늘을 보니 초승달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금성과 화성과 달이 일직선으로 直列직렬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뉴스가 있었기에 하늘을 유심히 쳐다보게 된다. 초승달은 양끝이 날카롭게 벼려진 이슬람 전사의 칼날 같다. 빛나는 칼날을 번뜩임에 눈을 씻는다.
2017년2월4일(토)맑음
민족사 편집기자 최윤영이 절에 왔다. 얼마 전에 결혼한 새댁이 되었는데도 예전의 그 모습그대로이다. 차를 나누고 산길을 함께 포행하다. 서울엔 눈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여기서 설경을 마음껏 누린다고 즐거워한다. 오후에 마을버스 타고 돌아가다.
2017년2월5일(일)맑음
아침 눈발이 날린다. 느릿느릿 솔솔 내리는 눈꽃을 손바닥으로 받아보니 아름다운 육각형, 팔각형 결정이다. 수정으로 만들어진 꽃. 하늘 꽃. 天花. Sky flower.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순결한 축복이다. 純福은 順服하는 사람에게 내려지는 선물. 이윽고 날이 따뜻해지니 비로 변한다. 雪雨라고 해야 할까? 11시에 지월거사 새해 인사 와서 명고스님과 함께 점심 먹다. 차 마시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 가족이야기와 읽었던 책 이야기를 듣다. 산길을 함께 산책하고 헤어지다.
방선하고 밤하늘을 바라보니 반달이 명랑하다.
2017년2월6일(월)맑음
신성한 가르침을 배우는 이여Holy learner, 이름과 기호는name과 sign은 모두 세간의 관습적인 용례로 사용되어질 뿐, 내재적 실체intrinsic reality가 갖추어진 실질substance이 아니다. 단지 세상에서 그렇게 통용될 뿐 실체가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체가 날조된 환상이며 니힐적인nihilistic건 아니다. 性(paramattha sacca)으로선 무자성이지만 相(sammutti sacca)으로는 緣起연기한다. 그러기에 水月의 집에서 空花를 먹고 산다. 木人이 화내고 石女가 웃는다. 왜 水月, 空花, 木人, 石女라는 표현을 쓰느냐? 그건 무아, 무실체성을 담지한 채 緣起緣滅연기연멸하는 것을 생생히 보이기 위해서 조금 생경한 造語를 하는 것이다. 禪이나 中觀에서 이런 조어를 더러 쓴다. 이런 방식으로 말을 하는 선지식의 의도는 청법자에게 중도의 가르침을 드러내 직관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애초의 의도를 망각하고 이런 상투적인 禪句선구를 자주 사용한다면 그야말로 말장난이 되어, 부처님의 설법정신을 거스르게 된다. 부처님에겐 주먹을 꼭 쥐고 숨겨놓은 비밀한 진리가 따로 있지 않다. 敎外別傳교외별전은 있을 수 없다. 이른바 교외별전이란 것이 있다한들 벌써 문자화되고 말로 發話발화되기때문에 모두 敎內로 들어가고 만다. 사정이 이러하니 敎外니 敎內니 하는 것은 모두 사람에게 달린 일이다. 자고로 불법을 소문으로 전해 듣고 저 혼자 깜냥을 굴리며 수행한다고 여기는 일이 많다. 그 결과 바른 길에서 벗어나 곧 알은 채를 하며 남 비판하기를 즐긴다. 自是他非다.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 來說是非者 便是是非人. 내게 와 시비를 논하는 그 사람이 바로 시비하는 사람이다.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다니듯, 늘 초심자인 듯 살아야할 것을 명심한다. 出家如初 成佛有餘. 출가한 처음 마음으로 살면 성불하고도 남는다는 고인의 말이 다가오고, 보름을 향하여 달은 끊임없이 차오르나니.
빤야와로 진용스님의 법문을 경청해볼만 하다. 증광현문(增廣賢文)을 한 번 훑어 볼만하다.
2017년2월7일(화)흐림
해제할 준비를 하다. 아침 정진 끝나고 각 방의 이불빨래와 개인 빨래하다. 겨울 한철이 일순간에 흘러갔다. 돌이켜보면 더 보태진 것도 없고 덜어진 것도 없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게 문제다. 그런데 눈을 씻고 다시 보면 흘러간 것은 남아있지 않고, 다가올 것이라곤 별다른 것이 없다. 게다가 ‘현재 여기’라 할 것도 없다. 도대체 송곳을 세울 곳조차 없기도 하지만 송곳을 세울 의도도 애초에 없으니 칼날위에 앉아 순간의 휴식을 누리는 잠자리 신세다. 잠자리는 잠시 쉬었다가 이내 어디론가 날아간다. 날아간 뒤엔 아무 자취도 없다. 아예 남길 마음이 없다. 그래서 잠자리일 수 있는 것이다. 잠시 쉬었던 한철 살림을 정리한다. 잠자리가 날개를 털며 다음 비행을 준비한다.
2017년2월8일(수)흐림
새벽 정진 끝나자 입승스님께서 ‘오늘로 한 철 공부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모두 정진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고 대중에 고하면서 죽비를 놓는다. 우리는 자기가 깔고 앉았던 좌복의 외피를 벗긴다. 자크를 열며 좌복의 속통인 솜과 외피를 분리하자 불꽃이 파바밧 일어난다. 스님들이 놀라서 서로 돌아보며 눈을 마주치니 한 스님이 좌복 솜과 외피가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것이라 정전기가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해준다. 어떤 스님은 겨울 한철 정진한 내공이 氣로 化하여 發光한 게 아니냐며 너스레를 뜬다. 벗겨낸 좌복피를 모아서 빨래를 한다.
아침 먹고 佑振우진스님이 차를 운전하여 大見대견스님과 동승하여 용주사를 방문한다. 예전 같았으면 하루 걸이의 행차였겠지만 자가용으로 달리니 시간 반에 도착한다. 선덕이신 愚曇우담스님께서는 미리 절문 앞에 나와 기다리고 계신다. 스님이 거처하시는 구참선방으로 자리를 옮겨 세배를 드리다. 스님이 주시는 차와 점심을 대접받고 돌아오다. 대견스님의 거처인 법주도서관에 들러다. 법주도서관은 대견스님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공부방이다. 스님은 불교공부의 기초에서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3년의 공부과정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을 통해 지도하고 있다. 초기불교에서 시작하여 유식, 반야중관, 불교일반을 총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간경과 사경, 작문과 숙제, 개인 면담을 통해 지도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스님의 모델은 대만불교이다. 진주선원에서 도입하면 유익할만한 점이 있겠다.
이렇게 하루가 갔다.
눈길을 걸어가는 아이가 눈 위에 발자국을 콕콕 찍는다. 마치 바스라지는 순간을 박제하여 영구히 보존하려는 듯이.
불멸의 흔적을 남기려는 욕망에 들뜬 영웅과 위인들이여,
역사에 발자국을 찍어 누군가에게 불멸의 기억으로 길이 기억되고자 하느냐?
눈에 찍힌 발자국은 햇볕이 들자마자 흔적도 없이 스러지는 걸.
無常무상의 파도는 너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래성처럼 쓸어버린다.
도대체 어디에다가 네 허접한 흔적을 남기려느냐? 흔적이란 때垢이며, 떼이다. 사라져야할 때時를 놓친 것들이 지나간 때를 붙잡고 늘어지며 떼를 쓰는 것이다. 그건 이치를 거슬리는 것이기에 괴로움을 일으키는 때垢이다. 그러니 있을 동안 충실히 있되 있을 때가 다하면 재빨리 시원하게 사라져라. 일어남과 사라짐, 오고감, 올라가고 내려감, 잘되고 못됨의 양단에 걸리지 말고 때를 알아 유연하게 흘러가라. 낮아질 때가 오면 엎드리고, 물러갈 때가 되면 사라져라. 아, 귀하다. 때를 알라는 말이여. 時中之道시중지도. 때와 상황에 맞게 사는 것이 길이다. 그러려면 때時의 중심中에 서서 펼쳐지는 緣起연기를 보아야 한다. 時中은 覺察각찰에서 나온다.
2017년2월10일(금)맑음
짐을 싸다. 예전 같으면 짐을 싸서 걸망에 넣어 방문 앞에다 두었다가 해제하는 날 어깨에 메고 표연히 산문을 나서겠지만 요즘은 택배박스에 넣고 테이프로 봉인하여 툇마루에 갖다 둔다. 그러면 택배기사가 가져다 우체국으로 실어 나른다. 그만큼 편리해진 게다. 결제하러 올 때는 두 박스였는데 결제가 끝나니 한 박스로 줄었다. 짐이 줄었다는 건 좋은 현상이니, 그만큼 가벼워진 거다. 날아가는 새에겐 가방이 없다. 날개로 가방을 들 수는 없으니까. 새는 가벼울수록 자유롭게 난다. 수행자는 새와 같다. 이 산 이 나무에서 지내다가 저 산 저 나무로 옮겨가는 것이 바람이 가지를 스치는 것과 같다. 바람을 어찌 묶어놓을 수 있으랴. 세상이 어이 자유인을 얽맬 수 있으랴. 출가한 까닭이 세상의 얽매임에 벗어나 대 자유를 누리기 위함이었지 않았느냐? 그러나 일방적으로 떠나고 버리기만 하는 것을 능사로 삼을 수는 없다. 새가 날아다닐 수 있는 것은 하늘이란 넓은 품과 나무와 대지의 은혜덕택이다. 출가인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어머니 중생의 수고로움과 대 자연의 공덕이다. 그러니 버리고 떠나기만 하면 인연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것이 되며 은혜에 보답하는 행이 아니다.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무엇을 위한 출가인가? 날아가는 새는 허공에 머물 수만은 없으니 결국 나무에 내려 숲에 깃들어야 한다. 그처럼 출가자도 無執着무집착의 지혜를 견지한 채 세상으로 돌아와 중생에게 報恩行보은행을 하는 것이다. 그게 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세간 가운데서의 공부이다. 이제 해제하지만 세상으로 들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자. 누구에게로 돌아가는가? 불교공부모임의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로. 무엇을 주려고? 사랑과 지혜를 나누려고. 결국은 무엇을 하려고? 부모였던 모든 중생 안락하게 되고, 모든 악취 영원히 텅 비어, 보살들 어디에 계시던 그들 모두의 발원 이루어지게 되소서. 라는 回向願을 성취하기 위함이라.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중생세간이 정토로 화하여, 중생은 불가사의해탈 경계를 노닐 게 된다.
玉馬飮乾明月泉, 옥마음건명월천
泥牛耕破瑠璃地; 니우경파유리지
靜邀山月歸禪室, 정요산월귀선실
閑剪江雲袍納衣. 한전강운포납의
옥 말은 밝은 달빛 샘 다 마셔버렸고
진흙 소는 유리의 땅을 모두 갈아엎었다,
산 달빛 조용히 맞으며 선방에 들어앉아
강위의 구름 잘라 누비옷에 솜을 덧대노라.
저녁예불 끝나고 자자회를 하다. 보름달이 하늘 가운데 휘영청 밝다.
2017년2월11일(토)맑음
아침 먹고 대중방에 모이다. 서기스님이 안거증과 기념사진을 나눠 준다. 입승스님이 한 철 수고했다고 치하하면서 다음에 다른 회상에서 건강하게 웃는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며 작별인사를 한다. 이로써 동안거가 완전히 마무리 되었으니, 한 가지에 모였던 철새들이 때가 되어 각처로 흩어지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아무도 모른다. 구름이 바람 따라 가듯, 시내가 흐름을 따라 가듯 다만 흘러갈 뿐이다. 뒷산에 걸렸던 밝은 달이 진다. 아침이 밝는다. 새벽을 밟고 가는 자여, 이르는 곳마다 빛을 발하여 어둠을 감싸라.
우진스님 차타고 경부고속버스 터미널까지 오다. 버스타고 진주 오다.
저녁에 첫 만남의 시간을 갖다. 오래간만의 해후. 웃음꽃들의 잔치. 삼보에 대한 신심과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지난 삼 개월 살아온 이야기 나누다. 초록보살이 저녁을 대중공양한다. 애프터 모임으로 <춤추는 염소>에서 차를 마시다. 호연거사, 아미화, 운암거사, 청량심, 원정, 보정, 해성, 명성, 심원, 문인, 연경, 문정, 향산거사, 향원, 초록이 참석하다. 도반들의 정이 흘러 白蓮이 피고 天花가 날리는 듯. 그 사이 금성보살에게서 전화가 오기를 事君不見下渝州하리란다. ‘보고픈 그대를 보려했건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못 보고 배를 따라 그냥 유주로 내려가’노라(이태백의 峨眉山月歌)는 금성의 심경. 모임을 파하여 돌아오니 보름달빛이 남강에 가득 쏟아진다.
春雪未消寒未殘, 춘설미소한미잔
晉州弟子茶情寬; 진주제자다정관
知君此夜不須睡, 지군차야미수수
月上梅花共作歡. 월상매화공작환
봄눈 녹지 않고 추위 가시지 않았는데
진주 제자들 다정함은 찻잔에 넘치네,
그대는 이 밤 잠들지 마라,
매화를 품은 달과 함께 즐김이 어떠하리.
-朴竹西(1817~1859, 조선시대 여류시인)의 上元佳節會詩에서 承句만 바꿈.
첫댓글 첫 모임
첫모임-카페^춤추는 염소^에서
행복해 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