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안녕하세요. 여러분은 1독서가 서론이고, 복음이 본론이고, 2독서가 결론이라는 말을 수십 번 들어왔습니다.그러기에 오늘 2독서의 말씀을 듣자니까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인가? 결혼하지 말라는 뜻인가? 성직자, 지도자가 되라는 뜻인가? 결코 그런 뜻은 아닙니다.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풀이를 좀 해드리는 것이 옳다 생각해서 말씀을 드리는데, 관계성을 생각하라는 뜻으로 저는 해석했습니다.부부가 함께 있으면 남편 된 입장에서 아내는 분명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고운 짝이라는 것입니다.우리가 하늘을 보며 하느님을 믿고 따릅니다. 이것은 영성적 하느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내 사랑하는 아내는 성사적 하느님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보이는 하느님으로 구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아내 된 입장에서 볼 때에는 물론 하느님의 영성적 하느님은 동일하지만 내 남편이성사적 하느님이라고 바라볼 수 있어야 될 겁니다.그때 우리는 이것이 관계가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관계가 끊어지면 불륜이라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렸고, 관계가 연결되면 주님의 섭리에 따라 우리는 살아간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또한 마찬가지로 사제가 신앙의 언어로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데, 이것을 인간의 언어로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답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었는데 결국 마귀들은 그것을 신앙의 말로 듣지 않고 인간의 말로 알아들었기에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결국 관계를 끊어주십시오. 이미 끊어진 상태를 말하니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표현했냐면 썩 나가라.어쩌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종류가 있습니다.베드로가 결국 주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당하면 안 됩니다 했더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표현했냐면 사탄아 물러가라 했습니다.근데 똑같이 마귀가 주님께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사탄아, 물러가라 했습니다.똑같은 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귀가 한 이 모습은 썩 꺼져 추방입니다.그러나 베드로에게 한 말은 추방이 아니라 추종입니다.앞을 가로막지 말고 뒤로 오너라.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그 말씀을 하고 바로 뒤에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은, 첫 번째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영성적 하느님을 만나고, 두 번째 십자가를 짐으로써 성서적 하느님을 만나라 했습니다.거기서 내 뒤를 따라오려면 바로 베드로도 추종입니다.그래서 가지고 베드로가 앞을 막고 있던 것을 뒤로 물러나면서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해석을 해보겠습니다.
사도의 입장에서 신자들을 바라봤을 때 바로 하느님께 늘 묵상하며 경배를 드리고 있지만 이 신자들이 모두 성서적 하느님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신자들을 함부로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주님도 분명히 말씀드리기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가장 미숙한 형제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그는 가장 미숙한 형제만 주님이고, 가장 미숙한 형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주님이 아니신가. 모두 다 주님이지만 그러나 절대적으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내가 먼저 가야 된다는 뜻을 강조해서 말씀드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결국은 알파에서 오메가로 연결되는 삶을 살 때 유달리 권위가 있다고 그러고 이것이 연결되지 않은 삶을 살 때 권위적이다 이런 말을 쓰기도 합니다.어쩌면 오늘의 말씀을 다음 주에 복음의 말씀과 독서의 말씀을 들으면 거의 정확하게 답을 떨어집니다.언제든지 여러분들이 오늘의 이 말씀이 좀 이해하기가 힘들 때에는 다음 주의 말씀을 보신다면 분명 오늘의 말씀을 다음 주에 풀이해 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의 말씀은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바로 치유시키는 장면이랍니다.시몬 장모가 열이 가십니다. 그때 시몬 장모가 어떤 행동을 취했습니까? 즉시 시중을 들었다 보십시오. 받았습니까? 즉시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유달리 권위가 있었다고 합니다.또 예수님께서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질병 있는 사람들 모두 고쳐주셨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동분서주하면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바로 주님께서는 항상 움직이며 이동했다 이렇게 봅니다.
세 번째로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 곳으로 가서 밤새 기도하셨다.새벽 아직 깜깜할 때 새벽에 나를 가졌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네 번째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나는 이 일을 하러 떠나온 것이다.당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정확하게 얘기해 줍니다.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다섯 번째 온 갈릴리아를 다니시면서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근데 그 다음 주에 독서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내가 주님께 받은 것을 이제 내놓지 않는다면 나는 화가 미칠 것입니다.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직무라는 단어를 씁니다.직업과 직무는 다릅니다. 직업은 내가 택한 것이지만 직무는 하느님이 택한 것입니다.그래서 내 뜻대로 마시고, 하느님의 뜻대로 라는 말을 합니다.그리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결국은 내가 이 복음을, 정말 이 보물 같은 보물을 정말 돈을 주고 사야 되는데 무상으로 받아 가지고 무상으로 전하고 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그러면서 나는 자유인입니다. 이 자유인이 된 것은 내가 상대 앞에 종이 되었기 때문에 자유인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는 무슨 일이나 항상 동참하겠습니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겠습니다.모든 이는 상대입니다. 상대는 인격적 단어를 썼고, 바로 본인은 모든 것이 여기서 도구적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그래서 그래 그리고 교황님께서는 나는 종중에 종입니다.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앞에 있는 종은 하느님의 종, 뒤에 있는 종은 형제들의 종입니다.하느님의 종일 때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고, 형제들의 종일 때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앞에 있는 종은 영성적 하느님이었고, 뒤에 있는 종은 성사적 하느님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권위는 한낮 입으로만 하느님의 뜻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친히 우리 인간의 비극을 함께 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비극의 현장을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미 가 있었습니다.그러나 몸으로 곳에 가기를 굉장히 꺼려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본인의 비극의 현장에 도착하는 사람만이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예수님은 결국 안식일 날에 이러한 행위를 한다면 결국 율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러나 형제의 그 아픈 부분을 달래주기 위해서 움직여서 결국은 그 길을 갔습니다. 그래서 율법 위반자로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는 권위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대개 권위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그러나 성경에서 나온 권위는 좋은 의미로 사용했다고 생각합니다.예수님께 권위가 있었다는 표현이 곧잘 나오는데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권위는 좋은 것이나 권위적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예수님께는 권위가 있었지만 그분께는 권위적이지 않으셨습니다.오히려 그분께서는 겸손하셨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철부지 어린이처럼 기도하시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언행일치의 삶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제자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오늘날 권위적인 사람이 많아서 문제이기도 하지만, 가지고 있는 권위가 실추되어서도 문제가 생기고 있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권위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아버지의 권위, 어머니의 권위, 교사의 권위, 어른의 권위, 신앙인의 권위, 사제의 권위, 수도자의 권위 등등이 있을 것입니다.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학자의 권위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논리적이면서 근거 있는 지식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건축가의 권위는 어디에서 옵니까? 풍부한 경험과 능력 있는 기술에서 나온다고 봅니다.그렇다면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왔을까?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거룩한 순종에서 나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순종은 영성적 하느님을 만들고, 순교는 성서적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순종은 성탄을 만나게 되고, 순교는 부활을 만나게 됩니다.그래서 우리는 험준한 곳에 우리가 갈 수 있느냐 마느냐는 바로 내가 얼마만큼 주님과 함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우리가 받은 권위가 제대로 살아나려면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권위를 존중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데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지금도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서울 중심부에 있는 한 대형 서점에 보면 계절마다 좋은 시의 부분을 거대한 현수막에 옮겨 적은 것으로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언젠가 거기에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의 앞부분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 시의 표현대로 한 사람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것처럼우리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 자체도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그 사랑이 남다르게 진하고 거룩한 사랑의 향기를 지녔던 이라면 더욱 더 그렇습니다.그래서 우리는 이심전심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염화시중에 미소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쓰는가 싶습니다.오늘은 많은 사람이 심금을 울렸던 영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님이 떠오릅니다.벌써 세상을 떠난 지 14년이 흘렀지만 그 일 자체는 여전히 많은 일을 감동시키며 인생의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그의 삶과 인격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의 아름다운 삶의 귀감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우리는 그에게 깊이 감사하고 같은 신앙인으로서 자긍심을 갖습니다.그 역시 부서지기도,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오히려 그렇게 몸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했을 것이리라.
한 번도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지만, 더 그리워하며 그를 사로잡은 주님의 사랑을 조금 더 깊이 느끼고 싶습니다.예수님의 권위와 참으로 닮았습니다. 나도 담고 싶습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증거 할 진정한 예언자가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입으로만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악령에 시달린 형제들의 비극을 사랑으로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그리고 형제들의 비극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오늘 말씀과 같이 자신과 가족이라는 높은 장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그때 모든 형제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나는 사제입니다. 이래서 나는 이것을 해서는 안 됩니다.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그런 소리 하면 안 됩니다.이러한 장벽을 허물지 않으면 그와 나는 동일한 상태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도 내일도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선물로 주신 영성, 성사적 하느님이라는 걸 깊이 깨닫고 나는 그에게 바로 제물이 되어 우리는 함께 영성적 하느님과의 만남을 잘 이룰 수 있도록 각별히 노력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결국은 우리는 이렇게 앞에 순종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성탄을 만끽하고, 순교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을 얻게 되는데, 바로 부활을 얻게 되기 위해서 죽음의 강을 반드시 건너야 됩니다.죽음의 강을 건너기 때문에 죽음의 강은 바로 비극의 현장입니다.이것을 피하고자 하면 우리는 결국 부활을 얻어낼 수 없던 것입니다.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장사하는 상인으로서 굉장히 바쁘게 움직였고, 나귀를 타고 다녔을 터인데, 결국 사제는 그냥 율법에 따라서 지나가 버리고 레위 사람도 지나버렸습니다.그러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그 쓰러져 있는 그 형제가 바로 성사적 하느님이라는 것을 그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 발견한 근원적 동기는 이미 그는 영성적 하느님과 늘 함께 했기 때문에 성서적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나는 저들과 무슨 상관이 있어 하면서 쳐다보고 반대편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마귀가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온 것처럼 우리도 그 상관관계를 잘 맺으면서 어느 누구도 놓치지 말고 모두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귀한 선물임을 잘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특별히 부부관계가 그렇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 아내는 하느님의 선물이고 내 남편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사제인 나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선물이니 어느 사람도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한다면, 우리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로 권위 있는 모습을 계속 지니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