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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Lets go Libera 원문보기 글쓴이: 광복이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 독점적 무역권을 지닌 다국적기업
식민지 시대의 중상주의(重商主義) 경제
교역을 하기위해 인도 항구에 정박한 동인도회사 소속의 무역선.
17세기 초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등이 동양에 대한 독점무역권을 부여받아 동인도에 설립한 여러 회사를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라 한다. 무역독점권을 통한 인도의 식민지화가 추진되면서 동인도회사를 가진 나라들 간에 격렬한 이권투쟁이 벌어졌으며 결국 동인도회사의 무역독점권은 폐지되고 인도는 영국의 직접통치를 받게 되었으나 주권을 상실한 인도인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현재 남아있는 ‘동인도회사’는 1876년에 해산된 영국동인도회사의 문장사용 허가를 얻어 홍차를 판매하는 영국회사다.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의 성립
17세기 상업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1602년 네델란드에 ‘네델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어 세계적 규모의 상업활동을 개시하였다.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는 동인도의 여러 섬을 정복하고 직접지배 혹은 토후(土侯)를 통한 간접지배로써 특산품의 강제 재배와 매입을 행사하고 이 지역의 향신료무역을 독점하였다.
동인도회사들은 정부의 식민지 경영에 참여하며 독점적 무역권한을 누렸다.
17세기 중반이 되자 네델란드가 지배한 지역에 프랑스가 자국상품을 수출하기 위한 프랑스동인도회사, 서인도회사, 노르 회사를 설립하였다. 영국에서도 상업조직인 러시아회사(1553), 스페인회사, 동인도회사가 잇달아 세워졌다.
인도의 식민지화가 본격화 되면서 동인도회사를 가진 여러 나라들 간에 격렬한 이권투쟁이 벌어졌으며 동인도의 특산품인 후추, 커피, 사탕, 쪽, 면포 등의 무역독점권을 둘러싸고 경쟁하였다. 이것은 중상주의를 내세운 유럽 여러 나라의 상업전쟁의 일환을 이루고 있었다. 이 회사들은 처음에서는 상업적 목적에 충실한 듯 했으나, 점점 정치적 군사적 문제에도 개입하게 되었다.
重商主義(Mercantilism) 重商主義(Mercantilism)는 16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유럽 여러 나라에 널리 퍼졌던 경제사상이다. 당시의 화폐는 주로 금과 은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에 화폐인 금 보유량을 늘리는 것과 (화폐의 해외유출을 금지하는 것도 포함) 국가가 무역을 통제하여 수출을 증대하고 수입을 억제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특허 회사를 설립하고 여기에 식민지와 기타 지방과의 무역 독점권을 부여하여 국고 수입의 중대를 도모하였다. 식민지는 금, 은을 비롯한 귀금속의 산출지로서, 국내 산업의 원료 생산지 혹은 유리한 무역품의 생산지로서, 후에는 본국 상품을 위한 시장으로서 역할을 하였고 식민지를 획득하면 본국의 공업이나 상인에게 유리하도록 식민지에 여러 제약을 가하고 통제하였다. 이는 다른 국가의 희생을 대가로 자국의 부와 국력을 증대시키는 식민지 시대의 불평등 조약과 거래를 의미하는 것이며 강대국의 정치적인 절대주의, 전제주의적 경제의 형태였다. 그러나 1652년부터 장기간에 걸친 영국 네델란드 전쟁의 패배 등을 통하여 네덜란드가 영국과의 상업전쟁에서도 지게 되고 또 18세기 이후 향신료 무역이 부진하게 되자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는 식민지경영을 주로 하게 되었으나, 1799년에 회사 소유의 식민지 영토를 본국정부에 이양하고 해산하였다. 한편 쪽과 면포를 중심으로 하는 인도무역에 주력을 쏟아온 영국 동인도회사는 18세기 유럽에서의 영국과 프랑스의 항쟁에 규제되면서, 인도에서 프랑스 동인도회사와 격렬하게 다투게 되었다. 결국 플라시 전투를 계기로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무역을 거의 독점함과 동시에 인도의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1757년 인도에서 영국의 동인도(東印度)회사군과 벵골의 태수(太守) 시라지 웃다울라군이 벌인 싸움이다. 벵골 태수 웃다울라는 영국 동인도회사와 그 직원들의 밀무역이 벵골의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있다고 항의하고, 영국인들을 캘커타 시(市)에서 추방하여 양군은 충돌하게 되었다. 클라이브(Lord Clive, 1725 - 1774)가 이끄는 영국군과 프랑스군과 연합했던 태수군은 6월 캘커타 북서방의 플라시(Plassey)에서 결전을 하였다. 병력은 태수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으나, 부장(部將)들이 영국측에 매수되었기 때문에 참패를 당하고, 태수 자신도 배신한 미르 자파르(Meer Jaffier, Mizaffar)의 아들에게 잡혀 처형당했다. 전후 미르 자파르(Meer Jaffier)가 벵골의 태수가 되었으나 그는 영국의 괴뢰에 지나지 않았고, 이로써 영국은 벵골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인도 전토의 식민지화를 위한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다. 그 후 사적 독점상업회사(私的獨占商業會社)인 동인도회사에 대해 영국 국내에서 비판이 일어나고, 또 경영난에 빠진 동인도회사가 영국정부의 원조를 요청하게 되었으므로 1773년 노스규제법에 따라 본국 정부의 감독 하에 놓이게 되었다. 1833년에는 무역독점권이 폐지되고, 1858년 세포이의 난(亂) 후 인도가 영국 국왕의 직접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어, 동인도회사는 기능이 정지되었다. 결국 동인도회사는 중상주의 시대의 전근대적 독점상업조직으로,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산과 산업자본의 지배가 확립되면서 그 역할은 끝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독점무역에 따른 이윤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의 자본의 본원적축적(本源的蓄積)에 크게 공헌하였다. 네델란드 상인들은 리스본에서 에스파냐의 압력으로 물러나게 되자 그 대책으로 동인도와 직접 무역을 원하였다. 그리하여 1594년 암스테르담에 원국(遠國)회사가 설립되었다. 후트만이 항로를 발견한 이후, 항상 그렇듯 네델란드인들은 개인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힘을 합쳐 여러 가지 금융수단을 총동원했다. 자원을 집중시키고 위험 요소를 줄이기 위해 대부분의 원양항해 선박들은 재단을 구성했다. 그리고 1598~1602년 65척의 선박이 14개 팀으로 나누어 함께 아시아로 떠났다. 아시아로 떠나는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선들. 네델란드는 65척의 선박으로 연합체를 구성하여 동인도회사를 만들었다. 1600년 암스테르담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으며, 연달아 홀란트, 젤란트에 약 10개의 동인도회사가 난립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각 기업간의 불이익이 초래되고, 에스파냐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통합이 필요하게 되었다. 네델란드 상선들의 경쟁을 줄이고 역량을 집중시킴으로서 네덜란드가 향료뿐만 아니라 다른 무역 상품도 독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설립초기의 자본금이 650만 길더에 불과했다. 이에 동인도회사는 더 많은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오늘날의 주식 출자 방식을 도입했고, 이를 통해 사회 각 분야의 자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의회의 요구에 따라 여러 동인도회사는 통합을 하게 된다. 1602년 3월 20일, 대의장 올덴바르네벨트와 마우리츠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네덜란드 선박들은 더욱 큰 연합재단을 설립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다.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의 선박과 회사 문장. (The Dutch East India Company,VOC)
네델란드 정부 역시 동인도회사에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다. 정부가 부여한 권력으로 동인도 회사는 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었고, 토착민과 조약을 체결할 수도 있었으며, 현지에서 충성을 맹세한 문관, 무관을 모집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화폐까지 발행할 수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아시아 상업활동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네델란드 정부의 이러한 의지는 곧 동인도회사의 권력을 의미했다. 17세기 중엽, 네델란드의 상업 패권은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당시에는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이 네덜란드 상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의 북부에서는 발트 해협을 통과하는 네델란드 선박이 영국 선박의 13배에 달했으며, 발트해 국가들의 곡물과 목재 운송의 4분의 3, 스웨덴 철 수출의 절반을 네델란드 선박이 도맡았다. 이 같은 해상운송의 발달로 당시 유럽의 부유한 가정에서는 중국산 도자기에 담긴 인도산 사탕을 손님에게 대접했고, 북아메리카산 담배를 피우며 페루산 은잔에 독일산 포도주를 따라 마실 수 있었다.
동인도회사가 거래하던 중국산 도자기, ‘차 주전자’는 유럽인들이 특히 선호하는 상품이었다. 그들은 인도에서 면직물과 의복을 구매한 뒤 그것을 인도네시아로 가서 팔았고, 그 돈으로 다시 향료를 사서 일본인과 중국인에게 팔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동인도회사는 사실상 아시아 내부의 무역이 발전하는 데 있어 커다란 역할을 했던 셈이다. 이후 아시아 국가들 간의 무역은 오랜 기간 동인도회사에 의해 지배되어 있었다. 이 회사는 60명의 이사(理事) 중에서 선출된 17인회가 회사의 실권을 가지고 있었고, 말레이시아·수마트라·실론·케이프타운까지 그 세력을 미쳤으며 일본과의 무역도 거의 독점하였다. 남방의 향료, 커피, 쪽(藍,람), 설탕을 획득하기 위해 원주민에게 봉건적 공납과 약탈적 매상(賣上;강제급부제)을 하였으며, 가장 중요한 정향(丁香)과 육두구의 생산지를 암보이나섬, 반다제도 등에 한정시켜 노예재배제(奴隸栽培制)를 실시하였다.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에서 교역품을 하역하는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상인들. 해외무역을 확대하고자 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남방교역선(포르투갈)과 함께 도래한 외국 선교사들의 기독교 포교활동을 잠정적으로 묵인하고 있었으나 일본 내에 그리스도인들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그에 따른 부정적 요인들이 발생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천주교 금지를 선포하였고 1597년 2월 5일 허락을 받지 않고 일본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한 22명의 예수회 선교사를 나가사키에서 처형하였다. 막부는 1639년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에 오는 것을 금지하고, 기독교와 관계가 없는 네델란드 사람들과 중국인들에게만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에서 무역하는 것을 허가했다. 이러한 정책을 강행하기 위하여 동인도회사는 정치적·군사적 권력의 대행기관이 되어 식민활동과 전제적 정치를 실시하였고, 크게 번영함으로써 네델란드의 세계적 지위를 상승시켰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의 압박이 가중되고, 식민지 억압정책에 파탄이 일어난 네덜란드 정부에 그 지배권을 양도하고 1800년에 해산하였다. 네델란드 동인도회사가 파산한 또 다른 원인은 높은 배당금 때문이었다. 그들은 매년 12.5퍼센트에 달하는 배당금을 주주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아무런 이윤도 남기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지속적으로 배당금을 지불한 회사는 큰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국가가 동인도회사에 점점 더 많은 돈을 빌려줄 수밖에 없었고 결국 회사가 국유화 되면서 경쟁력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 동인도회사 – 1600년 설립. English East India Company. (Governor and Company of Merchants of London Trading into the East Indies) 당시의 식민지 경쟁에 있어서 영국은 네델란드, 포르투갈에 뒤쳐진 후발 주자였다. 1602년 네델란드가 인도 항로로 진출하여 향료 무역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자 이에 자극받은 영국 런던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인도양, 동아시아에 대한 모직물 시장과 향료등을 확보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London의 Leadenhall Street에 위치한 영국 동인도회사 본부건물. 영국 동인도회사는 엘리자베스 여왕 말기인 1600년 레반트 상인을 중심으로 설립되어 동인도 무역의 독점권을 획득했다. 처음에는 개별적 기업제였는데, 점차 그 폐해가 나타나 1613년 합자(合資)기업제로 전환함과 동시에 영속적인 조직이 되었다. 영국 정부가 보호무역과 중상주의정책을 펼친 탓에 활동 초기에는 무역권 쟁탈에 치중하였다. 특히 네델란드와는 향료의 무역권을 두고 유혈사태를 비일비재하게 벌이는 등 격전을 벌였다. 이 회사는 네델란드령 동인도제도(지금의 인도네시아)에서 네델란드인들과 대립했으며 포르투갈인들의 반발에도 부딪쳤다. 1623년 암보이나 학살사건 이후 네델란드인들에 의해 동인도제도에서 축출당했지만 후일, 인도에서 포르투갈인들을 격퇴함으로써 무굴제국으로부터 무역특혜를 얻어내게 된다.
1667년 네델란드함대와 영국함대가 격돌했던 ‘Chatham 해전’ 영국 동인도회사는 1656년 크롬웰에 의해서 개편된 뒤 찰스 2세 때에 이르러 근대적 주식회사로 확립되었고, 그 활동의 영향력이 17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일본에까지 미쳤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향료무역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남부 인도를 상대로 향료를 사들이고 면, 견직물염료, 초석(硝石) 등을 판매해 기반을 잡아나갔으며 활동범위도 페르시아 만, 동남아시아, 동아시아까지 확장되었다.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에 대한 반발이 대두되자 경쟁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708년 이들 회사는 ‘통합동인도회사’라는 이름으로 합쳐졌다. 그러나 영국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해가던 동인도회사는 점차 향료제도 무역에서 서서히 자리를 잃어갔고 결국 네델란드에게 무역권을 빼앗겼다. 17세기 말에는 인도반도로 후퇴하여 인도 서안의 수라트를 근거지로 삼아 봄베이로부터 캘커타에 이르는 해안선을 지배 하에 두었다. 이 때부터 인도에서는 면직물 수입을 주요사업으로 정하고, 이를 확보하기 위하여 원주민 생산자에게 경제 외적 강제를 가하는 인베스트먼트제를 채택하였다. 한편으로는 내륙지방의 토지와 주민에 대한 지배를 점차 확대하고, 1756년 벵골지방의 조세징수권을 무굴황제로부터 양도받음으로써 인도의 정치권력자이며 영토지배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영국동인도회사에 소속된 군인들. 통합영국동인도회사는 서서히 독점무역과 부정부패로 얼룩졌고 각종 횡포로 인해 본국에서도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런던의 이사회는 인도에 있는 사원들의 행동을 규제하려고 애썼지만 효과는 없었다. 회사의 권력을 이용한 사원들의 축재, 주변의 현지 세력과의 끊임없는 전쟁, 전쟁 비용의 증대에 따른 회사 재정의 악화 등은 막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1766년에 수상에 취임한 피트는 회사의 내분을 틈타 처음으로 회사의 실태 조사에 나섰다. 그가 노린 것은 회사가 당시 벵골에서 획득한 영토에서 얻는 수입과 영토에 대한 법적 권리가 회사가 아니라 영국 국왕에게 있다는 의회의 보증을 얻는 것이었다. 이는 기업체로서 사병을 보유하고 실질적으로 토지의 지배권을 소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징세권은 경제적인 권리일 뿐이다' 라고 계속 주장하는 동인도회사에 대해서 영국 의회가 1784년에 '피트의 인도법'을 제정함으로써 인도에서 새로 획득한 영토는 국왕의 것이라는 기본 원칙과 통제 권한을 확고히 하고, 매년 일정 금액을 납부하는 조건으로 회사에 종래와 같은 특권을 허락 하는 것이었다.
빅토리아 여왕, Queen Victoria of the United Kingdom.
게다가 1813년에는 인도의 독점 특허권이, 1833년에는 차(茶) 무역의 독점권을 가졌던 중국의 독점 특허권 기한 마저 만료되자 의회는 권한 연장을 승인하지 않았다. 결국 무역 독점권을 폐지당한 동인도회사는 이후 영국의 인도통치 대리자 구실을 하다가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1858년에 인도통치의 모든 권한을 빅토리아 여왕에게 헌납하고 회사는 공식적으로 해산하였다.
세포이 항쟁(Sepoy Mutiny, 세포이 반란) 영국의 인도 지배가 점차 확대되어가면서 그들에 대한 반감이나 분노도 이와 비례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종래의 기득권을 상실하게 된 왕가(王家)나 지방 세력가들의 불만이 조직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영국식 합리주의의 도입은 인도의 전통적인 관습이나 생활양식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몰아붙여 인도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인도 사회 전반에 스며든 반영(反英) 분위기는 자연 발생적으로 다양한 성격의 폭동이나 반란을 야기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 동안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185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 횟수가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무엇인가 커다란 파국을 예고하는 듯했다. 이런 긴장된 분위기에 드디어 불을 당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용병 세포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세포이 반란(Sepoy Mutiny)은 1857년 영국인들이 인도의 전통을 무시하고 차별하는데 반발한 민중항쟁이다. 반란의 발단은 총탄을 싸는 기름종이에서 비롯되었다. 그 기름이 쇠기름이나 돼지기름이라서 힌두 사병에게 모욕이 된 것이다. 쇠기름은 힌두가 성스럽게 여기는 동물의 기름이요, 돼지기름은 천민도 만지기 싫어하는 오염물질이다. 1857년 5월 마침내 메루트의 세포이가 폭동을 일으켜 이 지역의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델리로 진격했다. 델리에서는 성 안의 세포이와 시민이 성문을 열고 이들을 맞이함으로써 순식간에 반란군은 이 도시를 점령해버렸다. 그들은 명목뿐이던 무굴 황제를 다시 옹립하고 그의 통치 부활을 안팎에 선언했으며, 그의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 반란 동참을 호소했다. 반란은 인도의 전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이제 반란은 단순한 세포이의 폭동 수준을 훨씬 넘어서서 농민과 일반 시민 등 전 사회계층이 참여하는 형태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반란군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의 불만과 분노 때문에 모여든 감정적 집단에 가까웠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들을 하나의 목표 아래 결속시킬 만한 지도력이나 서로간의 유대감도 희박했었다. 이에 반해 영국측은 1857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초기의 낭패감에서 벗어나 전력을 재정비하고, 이들을 진압할 구체적 행동에 들어갔다. 상대적으로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반란군은 곧 전투의 주도권을 영국군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고, 9월에 들어 델리를 다시 빼앗겼다. 이때 자행된 영국군의 파괴와 학살 행위는 그 참혹함으로 유명하다.
형틀에 묶인 채 발사를 기다리는 대포 앞에 세워져 있다. 델리에 이어 영국군은 칸푸르를 함락시켰고, 얼마 동안의 소강상태를 이용해 네팔 왕조에 원군을 요청했다. 반면 반란군측은 차츰 내부 분열에 휩싸여 내적 통일성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마침내 반란군은 1858년 3월 캠벨이 지휘하는 7만명의 영국·네팔 연합군에 속수무책으로 격파되었다. 이렇게 하여 반란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러크나우마저 함락되었다. 이 반란이 수습된 후 이른바 ' 인도 통치법'(1858. 8)이 발효되었다. 일종의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법의 시행에 따라 인도인들도 관공서의 주요직책을 맡을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또한 인도의 전통적인 제도나 관습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그간 악명을 떨치던 동인도회사가 문을 닫았고, 영국 국왕에 의한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내각에는 인도 담당 국무장관이 새로 임명되었고, 그 하부기관으로 15명으로 이루어진 인도 참사회가 구성되었다.
프랑스 동인도회사 – 1604년 설립. French East India Company. (정식명칭은 Compagnie Française des Indes Orientales)
루이 14세의 재정장관이었던 장 바티스트 콜베르가 설립한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프랑스 상인들의 재정적인 지원을 얻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콜베르는 많은 상인들에게 가입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프랑수아 샤르팡티에를 설득하여 프랑스인들이 금, 후, 계피, 목면 등을 외국 상인들로부터 사들여야 하는 이유를 들어 이 회사에 참여할 경우 가져올 이득에 관한 강력한 선전문을 쓰도록 했다.
장 바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가 루이 14세에게 지도를 보이며 설명하고있다.
루이 14세는 119개 시(市)에 편지를 써서 상인들에게 이 회사에 기부하는 문제를 토의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인들은 이를 얄팍하게 은폐된 세금징수 조치라고 여기고 가입권유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1668년경 동인도회사의 가장 많은 액수를 투자한 사람은 왕 자신이었고 회사는 그의 통제를 받았다. 이미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의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번번히 네덜란드인들에게 시달리고 물품을 몰수당하기까지 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시장개척에 나섰다. 이 회사는 1670~75년의 짧은 기간 동안 호황을 누렸으나 1680년경에 이르자 수익을 거의 올리지 못하고 많은 선박들은 수리를 해야만 하는 상태가 되었다.

첫댓글 각각의 동인도 회사가 지금의 각 국가로 되는 과정과 회사의 깃발이 국기로 되는 것, 중앙을 무너뜨리고 여러국가로 만들어진 과정. 그것이 현재의 자본으로 이어진다는 ..... 서서히 풀어가야할 과제입니다.
녜, 중요한 과제입니다. 동인도회사에 심각한 수수께끼가 들어있군요.
가장 중요한 것은 유럽국가들이 하나로 뭉쳐 아시아 조선을 무너뜨리고 한중일을 만들어준 다음 서로간에 전쟁과 분열을 극대화시켜 그들이 세계적인 패권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한중일도 단결하면 세계정치경제문화학문을 주도할수 잇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시아조선 카페가 단순히 학문적인 관점에서 출발햇지만 잘 만활용하면 세계최대이익을확보하는데 기여할 수 잇읍니다. 우리도 국제금융가들의 두뇌를 잘 활용할 수 있읍니다.
1843년부터 영국런던에서 발행된 economist지에 아마도 아시아조선의 역사가 그대로 있을수 도잇읍니다.economist지에서 `1843년부터 발행된기사를 인터넷으로 볼수잇다고 하니 아시아조선 카페에서 연구하면 좋겟읍니다.
제가 economist를 권유하는것은 세계적인 시각을 배울수잇기때문입니다.제가economist를 처음 읽을 때 매우당황햇읍니다.그이유는 제가 학교에서 배운것이 상당히 틀리다는것을 알수밖에없엇기때문입니다. 그래서 몇년동안은 내가옳다고 덤벼들엇는데 그때마다 제가 틀렷읍니다.언제부터인가는 제가 저의 두뇌를 않믿고 economist지를믿습니다 물론 economist가 100%사실인 것은 아니지만 영어기사중에 제일 객관적이고 심도가깊습니다.
명심해야 할 사안이라 생각합니다. 꿈 꾸는 사람에겐 꿈을 이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