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불성(眞如佛性)과 공성(空性)!!
우선적으로 크게 세가지 단어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진여(眞如) 불성(佛性) 공성(空性)
1. 진여(眞如)
반야경(대반야바라밀다경/마하반야바라밀다경)에 진여의 뜻과 같은 용어가 여러개 나옵니다. 진여/여여/일여/법계/법성/불허망성/불변이성/평등성/법정/법주/실제/허공계/부사의계
진여와 같은 뜻이 상당히 여러개인데, 다 같은 의미입니다. 실체가 없어서 공하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공성(空性)이 곧 진여(眞如)입니다.
또한 위에는 법성(法性)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모든 법의 성품이 곧 진여이며 여여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법은 인연화합, 즉 연기로 인해 생겨난 것 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공합니다. 이것이 곧 법성(法性)입니다.
그러므로 진여법성에는 스스로의 성품도 없고, 확정된 모양(相)도 역시나 없습니다. 그래서 일상(一相)이 무상(無相)입니다.
그래서 존재건 사물이건 진리건 뭐건간에 모든 것은 한모습이라 평등합니다. 그래서 <평등성>입니다. 일체의 차별이 전혀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건 마치 허공과 같아서 허공계이며, 생각으로 헤어려서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부사의계입니다. 불가사의해서 부사의계죠.
또한 진여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무상하게 변화할만한 실체나 확정된 모습 자체가 없기 때문에 무상할 수가 없어서 <불변이성>입니다.
모든 사물, 존재, 그리고 진리나 또는 기타 모든 법들의 본래 성품이 바로 空입니다. 본래 성품이란 스스로의 성품....즉 자성/실체가 없다는 걸 뜻 합니다.
생겨난 모든 법은 인연화합....즉 연기적으로 생겨난 것이라서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기법과 진여/공성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것 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엄청나게 자세히, 수도없이 반복돼서 나오는 경전이 바로 반야경입니다. 그래서 반야경을 읽어봐야만 합니다.
반야경을 먼저 읽기전에 반야경의 해설서인 용수보살의 대지도론을 읽어보고나서 읽으면 훨씬 수월합니다.
2. 불성(佛性)
불성(佛性)에 대한 설명이 나온 경전이 바로 <대방광여래장경>입니다. 이것은 삼전법륜에서 설하신 경전이라고 합니다.
초전법륜은 초기경전 중전법륜은 반야부경전 삼전법륜은 대방광여래장경/해심밀경/입능가경등이라고 하죠. 불성/유식쪽입니다.
돌맹이건 똥이건 황금이건 사람이건 천신이건 귀신이건 모두가 다 진여이며, 여여합니다. 모두가 다 인연화합으로 발생된 것이라 그 자체에는 실체라고 여길만한게 없어서 空합니다.
그래서 제법무아요, 일체개공입니다. 이걸 엄청나게 자세히 완벽하게 설하신 경전이 바로 반야경입니다.
그러나 돌맹이가 부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나무가 부처가 될 수는 없죠.
마음이 있는 중생만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파리나 모기, 귀신, 천신, 사람등의 유정에게는 불성이 있어서 노력하면 언젠가는 성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생각이 있는 중생들을 <유정>이라고 부릅니다.
무정물인 돌이나 나무가 부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걸 설명한 경전이 바로 대방광여래장경입니다.
대방광여래장경에 보면, 중생들의 불성은 번뇌에 가려져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불성이라는 것은 중생의 무명과 번뇌에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재미난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몰래 거지의 옷에 황금덩어리를 넣어줬는데, 그 거지는 그걸 모르고 언제나 거지노릇을 합니다. 자기에게 본래 보물인 황금이 있는 것도 모르고 가난하게 거지생활을 하는 것 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중생이라는 의미입니다.
본래 중생에겐 부처의 성품, 즉 불성(佛性)이라는 보물이 있는 걸 모르고, 괜스리 거지처럼 생사윤회의 고통을 당한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불성(佛性)에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라고 여긴다면, 그건 큰 병이 됩니다. 그래서 우선 반야경을 보는게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순서대로 법륜을 굴리신 것이죠. 차례차례...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번뇌에 가려져 있다. 그러므로 번뇌라는 벌을 쫓고 나서야 꿀...즉 불성(佛性)이 드러난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결국 번뇌라는 것은 5욕입니다. 5욕이란 색성향미촉의 욕망을 뜻 합니다.
진여(眞如)는 마음/생각이 있는 유정중생이건 돌맹이와 같은 사물이건 진리건 다 적용됩니다. 그러나 불성(佛性)은 마음/생각이 있는 유정중생에게만 있는 것 입니다.
아래 달라이라마의 설법, 대단히 중요합니다. 불성(佛性)이 뭔지 너무나도 명확하게 해설해주고 계십니다.
3. 달라이라마의 불성(佛性)에 대한 설법
부처님의 전승(傳乘) 또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자성전승(自性傳乘)이요, 둘째는 변상전승(變相傳乘)이다.
부처님의 자성전승은 곧 마음의 <공성>이다.
그리고 변상전승을 진언승에 의거하여 말하면, 업장에 가려진 <정광심(淨光心)>이다. 이 정광심은 불과(佛果)를 성취할 수 있는 인(因)이 된다.
구역(舊譯)인 닝마파에 따르면, "원만한 부처의 과위를 중생이 본래 구족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우 리 자신의 마음 속에 <미세한 정광심>을 그대로 구족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 마음은 부처의 마음과 사실상 전혀 다름이 없으며, 이 근본 마음의 흐름이 모두를 부처의 지혜신(智慧身)으로 바뀌는 것이다.
실로 우리는 본래 그대로 부처의 본질을 이미 구족하고 있다. 따라서 내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닝마파의 전승에 대한 모든 가르침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의미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불성이 공하여 아무것도 없다'고 인식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뜻이 없다.
그릇이 빈 것도 공한 것인데, 그렇다면 그것 역시 불성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위에서 말한 닝마파의 가르침에서 <구경의 선법(善法)은 곧 정광심(淨光心)>이요, <그것이 불성>이라는 것을 유력하게 보여주고 있다.
삼매 속에서 공을 관할 때에는 능소(陵所)가 하나가 되어 차별이 없는데, 이것은 평소의 언어 개념으로 형용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상을 여의고 언어가 끊어진 경계라고 한다.
이 경계에서는 방편과 지혜가 둘이 아니요, 대락(大樂)과 공성(空性)이 차별이 없으며, 일체의 희론과 분별이 없다.
그리고 진제(眞諦)와 속제(俗諦)가 둘이 아니게 되는데,
이와 같이 깊고 심오한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가르침은 모든 언설을 다 동원하더라도 그 뜻을 명확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전혀 차별이 없는 경지에서 그 성품의 본질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견해에서 본다면 바라밀다승과 금강승도 다른 점이 없다.
겔룩파의 쟘양샤파는 소관(所觀)인 정광(淨光)을 '공성(空性)'이라고 하였는데, 이 관의 대상이 되는 '소연경(所緣境)에 대해서는 현교와 밀교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다. 밀교의 다른 부파나 바라밀다승에는 없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구역인 닝마파에서는 능소 정광을 분별이 없는 본성자리라 하여 '희론분별을 여읜 자리'라고 하였다.
그 자리는 본래 청정하다 하여 티베트어로 '까닥(본연 청정)'이라 이름하였는데, 그것은 긍정의 부정으로, '공성(空性)'과 같이 단순한 부정은 아니다.
신역(新譯)인 샤카파. 까규파. 겔룩파에서는 이 정광을 '승의광명(勝義光明) 원만차제'라 하였으며, 승의제(勝義諦)라고도 하였다. 또 바라밀다승 중관자속파에서는 '은유승의제(隱喩勝義諦)'라 하였다.
정광은 공성(空性)을 소연경(所緣境)으로 삼은 심식(心識)을 가르키는 것이다.
- 소연경 : 대상
거친 의식은 뇌에서 생성되는 반면, 의식의 궁극적인 원천은 뇌와는 상관없이 궁극적이고 가장 깊숙한 곳의 섬세한 의식이다.
가장 섬세한 의식/마음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것은 마음의 궁극의 본성이다.
마음과 의식을 가진 모든 중생은 붓다가 될 잠재성이 있다. 이 섬세한 의식을 불성(佛性)이라 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불교의 기초이며, 특히 대승불교의 기초이다.
진여불성(眞如佛性)과 공성(空性)의 자세한 뜻을 제대로 이해하자. |
출처: 출리심 보리심 공 원문보기 글쓴이: - 반야바라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