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지 겨울호 논쟁문화의 장: 반경환 명시감상
김명인, 민정순, 조옥엽의 시
차견借見*
김명인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시간은
입동에 떠밀린 고요니
묽어진 가을 산과 거기 잇댄
능선을 나는 빌렸다
무료조차 덤이라면 이 풍경,
혼자 누리다가 동지冬至 편으로 네게 보내겠다
한때 지천을 부풀리던 초록이여,
나는 맘과 셈의 낭비가 심한 사람
물려줄 생각보다 빌려 쓸 궁리가 앞선 사람
어느새 탕진하고 여기 서 있다
이로부터 내 표적은 지워질 것이니
누가 남아 눈에 파묻힐
적막을 들춰보겠느냐!
* 남의 서화 따위를 빌려서 봄.
----김명인 시집,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에서
이 세상의 삶을 생물학적이나 자연과학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어느 것 하나 싸우거나 다툴 일이 없게 된다. ‘내가 있고 세계가 있다’라는 자아중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도 다 부질없고, 인간은 물론, 그 모든 생명체들도 다 차용 인생이자 시한부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게 되어 있는 것이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생명체에게 빚을 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영원히 살아갈 수는 없고, 어느 누구도 차용금을 상환하지 않고 공짜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돈 한 푼을 가져갈 수도 없고, 땅 한 평을 가져갈 수도 없으며, 그의 생명체를 이루던 원자(물질)들을 다 토해놓고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세상은 잠시 잠깐 수많은 생명체들의 생명을 빌려 소풍 온 것이고, 이 세상의 소풍이 끝나면 즐겁고 기쁘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김명인 시인의 [차견借見]은 시한부 인생과 차용 인생을 노래한 시이며, 입동을 지나 동지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그 고요와 적막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시간은/ 입동에 떠밀린 고요니/ 묽어진 가을 산과 거기 잇댄/ 능선을 나는 빌”린 것이다. 입동도 나의 소유물이 아니고, 묽어진 가을 산과 거기 잇댄 능선도 나의 소유물이 아니다. 무료조차도 덤이고, 풍경조차도 덤이고, 그러니까 이 고요와 무료조차도 덤으로 혼자 누리다가 곧 다가올 동지편에 돌려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입동이란 11월 초,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들어가는 시기를 말하고, 동지란 일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동면의 시기를 말한다. 입동이란 된서리가 내리는 시기가 되고, 동지란 그러니까 저승사자가 문지방을 넘어오는 시기가 된다.
한 때는 꿈도 많았고, 할 일도 많았고, 초록으로 부푼 시절을 보낸 적도 있었을 것이다. 시간도 영원하고, 공간은 무한대로 확대되고, 나는 속절없이 “맘과 셈의 낭비가 심한 사람”으로 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물려줄 생각보다 빌려 쓸 궁리가 앞섰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다 탕진하고 말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만방자함은 쓰디쓴 회한을 남기고, 후회는 깊고, 떠나갈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차견借見: 시한부 인생과 차용 인생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고,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 인생은 잠시 다른 생명체들에게 빚을 진 것이며, 후회 없이, 불평 없이, 더 이상 떼 쓰지 말고, 아름답고 깨끗하게 다 상환하고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와 우리들의 인생은 ‘먼지’와 ‘때’에 지나지 않으며, 물방울처럼, 낙엽처럼, 이윽고 그 흔적조차도 없이 사라져 갈 것이다.
적막과 고요----. 옛 세대가 가고 새 세대가 태어난다.
차견借見: 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상에 태어났으니, 모두들 다같이 불평 불만없이 떠나가기를 바란다.
개똥 나비
민정순
나비야!
개똥철학이라도 하는 거니?
네가 앉은 자리가
절대, 가볍지 않구나
---민정순 시집 {따뜻한 모서리}에서
개란 포유동물인 갯과에 속한 짐승을 말하지만, 그러나 이 ‘개’라는 말은 갯과의 동물과는 다르게 매우 다양한 뜻으로 변주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일부 식물이나 인간의 명사 앞에 붙어 ‘야생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추상적인 일을 나타내는 명사 앞에 붙어 ‘헛된’, ‘쓸데없는’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부정적인 뜻을 지닌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정도가 심한’, ‘엉망진창인’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개당귀, 개망초, 개똥참외 등은 첫 번째의 예에 해당되고, 개 같은 세월, 개 같은 시대 등은 두 번째의 예에 해당되고, 개백정, 개망초, 개차반 등은 마지막 세 번째의 예에 해당된다. 일반적으로 ‘개’라는 말이 갯과의 동물이 아닌 다른 뜻으로 사용될 때는 더럽고 추하고 그만큼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지만, 때로는 개당귀와 개복숭아처럼 그 식물의 효용성이 인정되어 진짜를 누르고 진짜보다 더 귀하신 몸이 될 때도 있다.
말이란 사회적 약속이고, 그 더럽고 추한 누명이 씌워지면 좀처럼 그 누명을 벗고 올바른 가치를 인정받기가 힘들어 진다. 민정순 시인의 [개똥 나비]는 더럽고 추한 배설물에서 먹이를 취하는 나비를 말하지만, 이 세상에는 더럽고 추한 물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더럽고 추한 물질이 고정불변한 것도 아니다. 개똥에 앉은 나비는 이 세상의 자연의 질서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 더럽고 추한 배설물 앞에서 먹이활동을 하는 나비일 수도 있다.
먹이활동----, 하지만, 그러나 이 먹이활동보다 더 고귀하고 거룩한 일이 이 세상 그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옛날의 봉건군주 시대나 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모든 전쟁은 먹이활동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 먹이활동만큼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없었던 것이다. 함박눈에서 하얀 떡가루를 생각하고, 하얀 이팝꽃에서 흰 쌀밥을 연상해낸 것도 절대적인 빈곤과 기아 선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원망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먹이활동보다 더 고귀하고 거룩한 일은 없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자본주의, 구조주의, 탈구조주의 등의 모든 철학은 개똥철학이며, 이 개똥철학을 통해서 모든 종교와 신앙이 탄생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우리 인간들이 이 첨단과학의 시대에도 제대로 경험하고 체험할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우리 인간들의 언어이고, 두 번째는 이 지구촌의 요리문화이고, 세 번째는 이 지구촌의 모든 곳을 다 가볼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의 언어에 하나의 먹이가 대응할 만큼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먹이가 있고, 제아무리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이 발달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지구촌을 다 다녀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먹이활동은 생산활동이고, 음식요리는 소비활동이다. 이 생산과 소비의 장을 둘러싸고 상호 경쟁과 싸움이 일어나고, 이 싸움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하기 위해서 철학이 생겨난다. 철학은 학문 중의 학문이고, 모든 학문의 기초이며, 이 철학을 정복한 국가와 민족이 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개똥철학과 진짜철학은 따로 없고, 이 먹이활동의 전쟁터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철학이 진짜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시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그 아름다움을 생산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개똥철학’(진짜철학)의 토대 위에서만이 가능하다. 자기 자신의 존재와 이 세상의 존재의 근거를 마련하고, 그 요리문화를 창출해내는 것이 개똥철학인 것이다. 먹이는 물질적인 식재료이고, 지혜는 정신적인 식재료이다. 이 물질과 지혜, 이 육체와 정신이 만나 하나가 되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요리문화로 탄생하게 된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역사, 사회, 학문 등, 그 모든 분야는 요리문화의 토대 위에서 자라나며, 모든 문화의 최종심급은 요리문화라고 할 수가 있다. 먹는다는 것과 미식취향----, 이것보다 더 고귀하고 위대한 것은 없다.
민정순 시인의 “나비야!/ 개똥철학이라도 하는 거니?”라는 시구는 반어反語이며, 이 철학적 질문보다 더 깊이가 있고, 심오한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네가 앉은 자리가// 절대, 가볍지 않구나”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주며, 따라서 이 먹이활동의 역사가 우리 인간들의 역사라는 것을 너무나도 정확하고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흑묘백묘黑猫白猫’를 따질 것도 없이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가장 우수하고 훌륭한 동물이듯이, 먹이활동을 가장 잘하는 나비가 모든 생명체의 스승인 개똥철학자인 것이다.
아름다운 꽃밭보다도, 넓고 비옥한 평야보다도, 온갖 과일이 풍부한 무릉도원보다도, 민정순 시인의 [개똥 나비]에게는 개똥밭이 최고급의 비옥한 텃밭인 것이다.
민정순 시인은 전천후 개똥 나비이며, 그 어떤 대상과 위치를 가리지 않는 종합예술가, 즉, 최고급의 개똥철학자라고 할 수가 있다.
고래
조옥엽
남편이 거실에서 자고 있다
오늘은 어느 바다를 헤엄치다가
귀향했는지 탈탈거리는 엔진소리가
한밤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몸 누일 둥지를 틀고
식구를 먹여 살린다는 건
거친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
어둠을 뚫고 용케
어리바리한 물고기 몇 마리
건져 올려 하루를 접고 짠물에
절은 삭신 막걸리 몇 잔으로
달래 바닥에 눕히고 잠든 남편
잠결에도 압박감에 짓눌려
바다와 교신 중인지 간간이
미간을 찌푸린다
하루 치의 엔진오일을
보충하고 소진하는 과정으로
수수 년 이어져 온 생
숱한 고비들을 넘기고 다시
이어지는 날들이 기적 같은데
충전을 다 마쳤는가
뱃고동 소리 내뿜던 거실은 고요해지고
나는 주유기를 빼 제자리에
돌려놓고 정적이 주는 평화를
양손에 꼭 쥐고 돌아눕는다
『(문장웹진』, 한국문화예술 위원회 2023, 8, 16 발표)
----조옥엽 시집 {거실에 사는 고래}에서
고래의 종류에는 흑등고래, 향유고래, 흰돌고래, 범고래, 돌고래, 큰돌고래, 밍크고래, 긴수염고래 등의 수많은 종류가 있고, 수염고래류와 이빨고래류로 분류할 수가 있다. 고래는 물속에서 살아가지만 육상의 포유동물과도 똑같고, 폐로 호흡을 하며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운다. 고래는 2-3m 안팎의 작은 종들도 있지만, 25m이상의 대형 종들도 있고, 따라서 고래는 바다의 제왕으로서 무한한 관심과 찬양의 대상이 된다. 고귀하고 위대한 것은 큰 것이고, 크고 힘 센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경건하고 숭고한 것이고, 가장 이상적인 것이고, 그 어떤 결점도 없는 것을 말한다.
사자의 꿈, 호랑이의 꿈, 용왕의 꿈, 코끼리의 꿈 등이 있지만,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꿈 중의 꿈’은 고래의 꿈이고, 이 고래의 꿈은 그 뿜어 올리는 분수와 함께 천하를 지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산다는 것은 고래의 꿈을 꾼다는 것이고, 고래의 꿈을 꾼다는 것은 그 어떤 시련과 고통과도 싸워 이기겠다는 것이다. 슬픔보다도 더 슬프고, 고통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꿈이 없다는 것이고, 꿈이 없다는 것은 그 어떤 고래도 그 커다란 몸통을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남편은 거실에서 자고 있고, “오늘은 어느 바다를 헤엄치다가/ 귀향했는지 탈탈거리는 엔진소리가/ 한밤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조옥엽 시인의 ‘고래’는 바다와의 싸움에서 지친 고래이며, 겨우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거친 바다에 몸을 던지”고, “어둠을 뚫고 용케/ 어리바리한 물고기 몇 마리”를 건져 올린 어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나, 늙고 지친 어부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거친 바다로 먹이사냥을 나선다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떨리며 무서운 일이란 말인가? 몸 누일 둥지를 틀고 식구들을 먹여 살린다는 것, 거칠고 사나운 바다에 몸을 던지며 어리바리한 물고기 몇 마리를 잡아 올린다는 것, 피곤하고 지친 육체로 하루의 일상을 접고 짠물에 절은 삭신을 막걸리 몇 잔으로 달랜다는 것도 생사를 넘어선 싸움이고, 술에 취해 잠을 자면서도 일상생활의 압박감에 짓눌려 바다와 교신하며 미간을 찌푸린다는 것, “하루 치의 엔진오일을/ 보충하고 소진하는 과정으로/ 수수 년 이어져 온 생/ 숱한 고비들을 넘기고 다시/ 이어지는 날들이 기적 같”다는 것도 생사를 넘어선 싸움의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도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듯이, 모든 위대함의 크기는 그 주체자의 고통과 희생의 크기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의 단 하나뿐인 목숨을 건다는 것은 하루치의 엔진오일을 보충하고 소비하는 것과도 같고, 숱한 고비들을 다 극복하고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모든 기적을 연출해냈다는 것과도 같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꿈은 어떤 꿈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굳세고 용기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성실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고래의 꿈이고, 이 고래의 꿈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단 하나뿐인 목숨을 거는 사람이다.
희극이나 비극이나 그 작품의 구성원리상, 필요 이상의 미화나 과장은 필수적인 요소일 수도 있다. 희극의 주인공은 실제보다 더 바보스럽거나 우스꽝스럽게 표현할 수도 있고, 비극의 주인공은 실제보다 더 고귀하고 뛰어난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노릴 수도 있다. 조옥엽 시인의 [고래]는 비극의 주인공이고, 그는 일상생활에서 피곤하고 지친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그러나 생사를 넘어선 혈투에서 수많은 기적을 연출해낸 개선장군과도 같다고 할 수가 있다. 남편이 조업을 마치고 돌아와 술 몇 잔 마시고 쓰러진 모습에서 “오늘은 어느 바다를 헤엄치다가/ 귀향했는지 탈탈거리는 엔진소리가/ 한밤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는 시구도 탁월하고, “식구를 먹여 살린다는 건/ 거친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 어둠을 뚫고 용케/ 어리바리한 물고기 몇 마리/ 건져 올려 하루를 접고 짠물에/ 절은 삭신 막걸리 몇 잔으로/ 달래 바닥에 눕히고 잠든 남편”의 모습도 탁월하다. “잠결에도 압박감에 짓눌려/ 바다와 교신 중인지 간간이/ 미간을 찌푸린다”라는 직업의식도 탁월하고, “하루 치의 엔진오일을/ 보충하고 소진하는 과정으로/ 수수 년 이어져 온 생/숱한 고비들을 넘기고 다시/ 이어지는 날들”의 “기적”도 탁월하고, “나는 주유기를 빼 제자리에/ 돌려놓고 정적이 주는 평화를/ 양손에 꼭 쥐고 돌아눕는다”라는 아내의 소명의식도 탁월하다.
시는 기교가 아니고, 기교는 시를 질식시킨다. 자기 자신의 꿈, 즉, 고래의 꿈을 위하여 그 직업의식에 투철하고 그 어떤 위험과 고통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 삶의 태도와 시인 정신이 기교를 낳고 그 아름다운 삶의 극치를 이룬다. 앞으로도, 뒤로도 물러 설 수가 없고, 한 걸음만 삐끗하고 균형을 잃으면 그의 삶이 끝나는 줄타기의 인생과도 같다.
시와 예술은 거짓이나 꾸밈이 없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기본에 충실하고, 그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은 ‘고래의 꿈’을 꾸게 된다. 새우가 고래보다 클 수도 있고, 고래가 새우보다 작을 수도 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키가 작고 평범할 수도 있지만, 키고 크고 고귀하고 위대한 탈을 쓴 사람이 더없이 어리석고 하찮은 인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조옥엽 시인의 [고래]는 비극의 삼일치에 기초해 있고, 그것은 시간의 일치와 장소의 일치와 연기의 일치라고 할 수가 있다. 시간은 밤이고, 장소는 시인의 거실이고, 연기의 주체는 선장이고, 그 이야기의 진행자는 시인이다. 너무나도 정직하고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삶의 태도와 시인 정신이 고귀하고 위대한 고래의 꿈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조옥엽 시인의 [고래]는 ‘시인 정신의 승리’가 ‘리얼리즘의 승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