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유네스코 ‘올해의 문화인물’에 올랐던 조선후기 실작자 다산 정약용의 문집이 『정본 여유당전서』(사암출판사, 2013.2)가 지난해 말 출간됐다. 정본 여유당전서 편집운영위원장인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전서’ 1권에 ‘해제’ 형식으로 이번 출간의 의미를 정리해 관련 연구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에서부터 이번 정본에 이르기까지 과정, 이번 정본 전서의 구성 등 송재소 편집운영위원장의 ‘해제’ 글 부분을 발췌, 소개한다.
『여유당전서』는 조선 실학을 집대성한 茶山 丁若鏞(1762~1836)의 저작집이다. 다산 사후에 필사본으로 전해 오던 저술들이 처음으로 완간된 것은 1938년이었다. 1936년의 다산 선생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1934년부터 간행에 착수해 1938년에 완간됐다. 5개년에 걸친 이 간행 사업은 다산의 외현손 金誠鎭이 편집하고 정인보, 안재홍 두 분의 교열을 거쳐 154권 76책의 鉛活字本으로 완성됐다. 발행처는 新朝鮮社다.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다산의 저작집은 그동안 『與猶堂集』, 『洌水全書』 등의 이름으로 불려 오다가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의 간행을 계기로 『여유당전서』로 통칭되고 있다. ‘여유당’은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다산 생가의 堂號다.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가 출간되기 이전에도 『목민심서』(1902년), 『흠흠신서』(1908년), 『경세유표』(1914년) 등 다산의 저술들이 개별적으로 출간되기도 했지만 전집의 형태로 묶여서 출간된 것은 신조선사본이 처음이다.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신조선사본이 출간됨으로써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다산 연구가 시작됐고 ‘다산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이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이후1960년에 문헌편찬위원회에서 『民堡議』를 추가해 신조선사본을 4책으로 축쇄영인한 『丁茶山全書』를 출간했고, 1969년에는 경인문화사에서 신조선사본을 다시 6책으로 축쇄 영인한 바 있으며, 1985년에는 여강출판사에서 신조선사본을 實物大의 크기로 영인해 20책을 출간했다. 그동안 이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를 저본으로 해 2천 편이 넘는 학술논문과 300여 편의 석·박사 논문, 그리고 100여권의 연구 저서가 출간됐으니 신조선사본이 기여한 功이 실로 크다고 하겠다.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는 학계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植字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생각되는 오·탈자가 수없이 발견됐고, 다산의 저작이 아닌 글이 잘못 수록되기도 했다. 또한 『민보의』와 같이 널리 알려진 다산의 저술이 누락된 경우도 있었다. 詩集의 경우에는 1819년부터 1836년까지 시의 저작 연도가 갈피를 잡을 수 없을만큼 錯綜돼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종이로 출간된 책이 지닌 숙명적인 한계라 여겨지지만, 이 밖에도 신조선사본에는 크고 작은 여러 문제들이 지적돼 학계에서는 일찍부터 『여유당전서』 定本化 사업의 필요성이 대두돼 왔다. 뿐만 아니라 신조선사본 출간 당시에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다산의 저작들이 이후 꾸준히 발견됐다. 그래서 신조선사본 간행 이래 새로 발굴한 저술들을 모아 影印한 『與猶堂全書補遺』 5책이 1975년에 간행됐다. 이 책은 다산 연구를 심화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여기에도 문제점이 지적됐다. 다산의 저술로 판단하기에 의심스러운 글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가 출간된 지 80년 가까운 세월이 지
난 시점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을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다산 학술문화재단에서는 조심스럽게 정본화 사업에 착수했다. 마침 교육부가 지원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주관하는 국학진흥사업단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정본화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2004년부터 정본화 사업 시작
첫째, 편집 체제는 신조선사본을 따랐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조선사본의 체제는 다산이 「자찬묘지명」에서 스스로 밝힌 저술목록의 체제와 다르다. 그래서 학계 일각에서는 「자찬묘지명」의 체제대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어 왔다. 「자찬묘지명」에는 經集 232권, 詩 6권, 雜文 60권, 雜簒 260권의 순서로 기록돼 있다. 신조선사본은 이를 해체해 시문집 25권, 경집 48권, 禮集 24권, 樂集 4권, 政法集 39권, 地理集 8권, 醫學集 6권의 순서로 재구성해 7집 154권의 형태로 편집했다. 우리는 신조선사본의 체제를 따를 것인지, 「자찬묘지명」의 체제에 따라 편차를 완전히 바꿀 것인지를 두고 여러 번의 회의와 원로 학자들의 자문을 거친 결과 신조선사본의 체제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신조선사본을 편집하고 교열하신 분들이 「자찬묘지명」을 읽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 체제를 따르지 않고 편집체제를 바꾼 데에는 先學들의 深慮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유당전서보유』도 수록된 저술의 眞僞여부를 정밀하게 고증해 別卷으로 묶었다.
둘째, 校勘 작업을 통해 신조선사본의 오·탈자를 가능한 한 바로잡았다. 植字工의 단순한 실수에 의한 오·탈자 이외에도 한 단락이 누락된 부분이나 순서가 뒤바뀐 부분 등을 바로잡았다. 이를 위해서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300여 종이 넘는 각종 필사본을 광범위하게 수집해 교감자에게 제공함으로써 정확성을 기하려 했다.
셋째, 한자·한문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학문 후속 세대를 위해서 標點 작업을 가했다. 기본적인 마침표와 쉼표 이외에도 인명·지명 등의 고유명사 표기, 대화나 인용문 등을 나타내기 위해서 총 13개의 부호를 사용했는데, 표점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의 워크숍을 통해 한국 실정에 알맞은 부호를 선정하고 그 용법을 확정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그러나 한문 문장의 특성을 고려할 때 표점 부분은 앞으로 개선의 여지가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넷째, 재단에서 수집해 정리한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와 『보유』에 수록되지 않은 친필 유묵을 탈초·표점해 간단한 해제를 덧붙여 별책으로 구성했다.
이상과 같은 원칙 하에서 다산의 저작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재구성해 보려는 일념으로 사업을 시작한 지 10여 년이 소요됐다. 그리고 표점·교감을 담당한 전문 학자와 재단의 전임 연구원, 박사급 연구원, 보조 연구원 및 출판의 실무를 담당한 인력이 총 80여명에 달하였다.
첫댓글 이런 노력을 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