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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일대에 세거하는 안동 권씨는 15개파 중 최대 계파인 복야공파와 부정공파, 별장공파, 동정공파, 검교공파가 세거하고 있다.
고려조에 尙書左僕射 上將軍을 지낸 權守洪을 派祖로 하는 복야공파는 고려때 兵部尙書를 지낸 權子與, 右政丞 權漢功 등이 있으며, 조선조에 예의판서 權靷. 권개. 화산 權柱. 사락정 權질(石+質). 충재 權橃. 송암 權好文, 옥봉 權暐 등 名人 學行이 많다. 복야공파의 세거지는 서후면 솟밤, 북후면 道개촌, 봉화 닭실, 醴泉 맛질, 금당실, 풍천면 佳日 등 안동 인근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복야공파 파조 권수홍의 증손 權漢功(?-1349)은 충선․충숙왕때 都僉議政丞을 지냈다. 권한공의 舊基는 예천군 유천면 성평리에 있다. 권한공의 맏아들 權仲達은 화원군에 봉군되었는데, 목은 李穡은 화원군의 사위가 되고, 구담 마을에 시거한 상주목사 權執經은 화원군의 손자가 된다. 권한공의 둘째 아들 권중화(1322-1408)는 태종때 영의정을 지냈고 안동 권씨 4시의 하나인 ‘耆英의 始’로 유명하다. 권중화는 무남하였고, 사위는 청주 한씨 韓寧으로 한영은 인수대비의 부친 韓確의 조부가 된다. 그러나 권한공의 후손은 증손자 상주 목사 권집경이 무남함으로써 무후가 되었다. 고려조 廉悌臣과 柳總은 권한공의 사위가 된다.
복야공 權守洪의 또 다른 손자 중에 權允平이 있었다. 권윤평의 증손자가 예의판서 權靷이다. 권인의 손자 權啓經에게는 2남 1녀가 있었는데 장남 權玠는 송암 權好文(1532-1587)의 증조가 되고, 차남 權琨은 충재 權橃의 조부가 된다. 권계경의 사위 李時敏은 용재 李宗準의 부친이 된다. 안동에 세거하는 안동 권씨의 대다수는 예의판서 권인의 후손이며 宗派는 풍산 魯洞에 세거한다. 권인의 증손 權玠는 덕망이 있고 의협심도 있어 단계 河緯之의 嗣孫 河源을 사위로 삼아 단계의 향화를 잇게 하였다. 權玠의 후손들은 魯洞, 松坡 및 吉安, 校洞에 거주한다. 西後 솟밤 마을은 安東市에서 豊山쪽으로 약 15리쯤, 松夜橋에서 西後방면으로 한마장쯤 들어가노라면, 나즈막한 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들을 놓고, 동남향으로 수십 집의 농가가 자리한 작은 동네가 안동 권씨와 진양 하씨가 함께 살아오는 마을이다. 안동 권씨 복야공파의 한 갈래가 이 마을에 정착하기는 고려말 禮儀判書를 지낸 權靷으로부터 비롯된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이곳에 숨은 권인은 조선 태조가 벼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고려 옛 서울 송도를 잊지 못해, 스스로 호를 松坡라 한 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 그 아들 厚가 膺揚衛中領에 中郞將, 그 손자 啓經이 현감을 지냈으며, 계경의 아들 玠가 陰補로 副司正에 기용되었다. 世祖의 임금자리 강탈에 많은 義로운 이들이 참혹한 화를 입게 되매,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隱居한 玠는 종의 등에 업혀 서울을 빠져나와 봉화(奉花)의 외가에 숨어 자란 死六臣의 한 분인 河緯地의 조카 河源을 사위로 맞이하여, 집과 토지를 주어 이웃에 살게 하니, 하원이 위지의 양자로 그 자손이 여기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玠의 아들 叔衡이 別侍衛司猛, 숙형의 증손 夢斗가 通政大夫로 龍讓衛副護軍, 그 아우 夢參이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豊縣都大將으로, 多仁에서 적을 무찔렀으며, 몽두의 아들 紀가 안동의 첫 鄕土史인 永嘉誌를 편찬했고, 기의 조카 思道가 武科 급제로 節制使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火旺山城에서 크게 활약했다. 숙형의 아우 叔均이 進士, 그 손자 好文이 퇴계 문인으로, 진사에 오르고, 깊은 학문에 덕행을 아울러, 나라에서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사양하고, 靑城山 아래 연어헌을 지어 후진을 기르며 초연히 自適했으며, 호문의 아들 行可와 그 현손 德秀가 함께 진사로 文集을 남겼고, 덕수는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권계경의 차남은 權琨이다. 權琨의 아들 士彬이 進士로 道村에 옮겨 정착했으며, 문과에 올라 正郞을 지낸 檣, 右贊成을 지낸 벌은 다 사빈의 아들이다. 권곤의 장남 權士英의 후손들은 진보 한상 및 서후면에 거주하는데 敬堂 張興孝의 부친 張彭壽와 鶴峰 金誠一은 權士英의 증손서가 된다. 따라서 張彭壽와 金誠一이 서후면 검제에 거주하게 된 것도 처향과 관련이 있다.
權琨의 차남 權士彬은 북후면 도촌으로 이거하여 도개촌 입향조가 된다. 권사빈은 4형제를 두었는데 장남은 도촌에 거주하는 野翁 權檥, 차남이 봉화 닭실로 이거한 冲齋 權橃(1478~1548), 3남이 예천 맛질로 이거한 權楺, 4남이 예천 금당실로 이거한 權檣이다. 장남 權檥의 4자 권심행(1517-1579)과 권심행의 아들 玉峰 權暐(1552-1616)가 문과에 급제하여 문명이 있었고, 특히 冲齋 權橃의 후손에는 靑巖 權東輔(1518-1592)와 石亭 權東美 형제, 그리고 손자 石泉 權來, 증손자 항렬에 蒼雪齋 權斗經과 荷塘 權斗寅 등 소위 28斗로 유명한 봉화 닭실마을에 거주하는 안동 권씨는 경북 북부지방 안동 권씨 중에는 최고로 치는 문중이다.
닭실 마을 안동 권씨의 계보를 정리하면 복야공 권수홍의 손자가 권윤평, 권윤평의 증손자가 예의판서 권인이고, 권인의 손자가 권계경, 권계경의 둘째 아들이 권곤이고 권곤의 둘째 아들이 권사빈이고, 권사빈의 둘째 아들이 충재 권벌이다. 奉化 닭실 安東 權씨는 金鷄抱卵形局이라 해서 마을 이름이 닭실(酉谷)이다. 옥저봉 줄기로 앞을 감싼 닭실 마을은 닭의 둥우리처럼 아늑한 느낌인데 멀리 동북쪽 文殊山에서 근원한 昌坪川이 마을을 안고 흘러 동구 밖에는 맑은 여울이 흰 바위를 씻어 흐르는 泉石의 美가 운치로우며 그윽하고 조용함이 세상 밖의 別境이 있었다고 옛 文獻은 전한다. 冲齋 權橃(1478~1548)이 己卯士禍를 겪고 나서 道溪村에서 이곳으로 전거함으로 닭실 權씨로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士禍로 파직된 충재가 닭실에 물러와 숨어 지내면서 집 옆에 충재정사 靑巖亭을 짓고 讀書와 逍遙로 愛國의 鬱懷를 달래기 一四년, 1533년 복직되어 刑曹參判, 漢城判尹, 右議政 겸 義禁府都事 등을 거처 明宗초에 院相을 지내고 1547년 良才역 璧書사건에 연루되어 求禮에 유배, 朔州에 移配되어 移所에서 몰 한 바 되고, 宣祖초에 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그로부터 닭실엔 文風이 크게 떨침과 함께 가문이 번성하여 충재의 아들 東輔가 郡守, 東美가 縣監을 지내고, 손자 來가 軍資監正, 채가 현감, 현손인 음이 文科에 올라 承政院注書를 지냈으며, 進士를 거처 文科에 올라 修撰을 역임, 詩. 書. 畵에 능하고 百科事典的 博學이라고 불려지던 蒼雪齋 斗經, 文科에 올라 校理를 지낸 斗紀, 進士로 工曹佐郞을 지낸 斗寅 등 沖齋의 五대손인 斗字 항렬에서 學行과 文章을 겸한 인물이 무리로 나와 세상에 28斗로 일컬었는데, 닭실 權씨는 이 무렵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四백년을 누려온 닭실엔 많은 遺蹟이 보존되어 오는데 충재의 翰苑日記, 堂後日記, 中宗 13년 승지로 있을 때 日記, 栗谷의 石潭日記 등은 史料로서도 매우 중요한 文化財이다. 그외 寶物로 지정된 袖珍近恩錄이 종택에 보존되고, 충재가 은거하던 冲齋精舍, 靑岩亭, 石泉亭, 충재를 재사 지내는 三溪書院 등이 있다.
한편 복야공파의 한 갈래 知瑞州事 權時中의 증손자 權恒(1403-1461)이 입향하여 五백년을 世居해 오는 풍천면 가일 마을은 안동의 鎭山인 鶴駕山의 한 줄기가 서남으로 달리다가, 풍산평야의 서북 모서리에 이르러 우뚝하니 井山을 일으켜 동서로 두 봉우리를 나란히 세웠으며, 이 井山 앞 기슭에 아늑히 감싸인 남향 마을이 바로 佳日 마을이다. 고려 때는 王氏에 이어 풍산 류씨가 살아 왔다는 이 마을에 안동 권씨가 깃들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 世宗때 正郞을 지낸 權恒(1403-1461)으로, 이 마을의 부호였던 장인 柳湑(풍산류씨 8세)로부터 부근의 임야며 많은 전답을 물려받아 여기에 奠居하게 되었다고 한다. 權恒에게는 두 아들(權邇, 權建)과 세사위(潭庵 金用石의 부친 광산 김씨 金洙, 順天 金氏 金若秤, 司正 金軾)가 있었다. 權邇의 아들이 花山 權柱(1457-1505)이며 권주의 아들이 四樂亭 權 石+質로 퇴계의 장인이 된다. 洪貴達의 아들 洪彦弼은 권주의 사위가 된다. 권주의 후손에는 權礩 (1483-1545), 權磌(1490-1521), 屛谷 權榘(1672-1749)가 이름이 높았다.
권중화(權仲和) l322(충숙왕 9, 임술) ~1408(태종 8, 무자)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용부(容夫). 호는 동고(東皐). 시호는 문절(文節).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한공(漢功)의 자.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여, 대언(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가 되고, 우왕(禑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1390년(공양왕 2)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개국 후 문하부판사(門下府判事)에 올라 1396년(태조 5) 사은사(謝恩使)로 명 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 영의정(領議政)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진 뒤 치사(致仕)하였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고, 고사(故事) 및 의학․지리․복서(卜筮)에도 통달했으며, 전서(篆書)를 잘 썼다. 작품으로는 글씨에 『회암사 나옹화상비(檜巖寺懶翁和尙碑)』(楊州) 『광통보제사비(廣通普濟寺碑)의 전액(篆額)』(開城) 등이 있다. ■참고문헌 : 太祖․太宗實錄․高麗史․醴泉郡誌
권한공(權漢功) ? ~ 1349(충정왕 1, 기축)
고려 말기의 문신(文臣). 본관 안동(安東). 호는 일재(一齋). 시호는 문탄(文坦). 첨의평리(僉議評理) 책(𩑠)의 자. 충렬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사관(直史館)을 지내고, 1294년(충렬왕 20)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후에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거주하였으며, 충선왕을 따라 귀국 밀직부사(密直副使)․첨의평리(僉議평리)를 역임. 충숙왕(忠肅王) 초 삼사사(三司使)․찬성사(贊成事)를 지냈으며, 충선왕 양위 후 원나라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에서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독서하며 문명(文名)을 떨쳤다. 후에 충숙왕에 의하여 구금, 장류(杖流)되었으나 원제(元帝)의 명으로 풀려나와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옹립하고, 충숙왕을 폐위시키려고 획책하였으나 원나라의 거부로 실패하였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고,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집에 『일재일고(一齋逸稿)』가 있다. 예천(醴泉) 유천(柳川)에서 살았다. ■참고문헌 : 高麗史․醴泉郡誌․安東權氏譜
권호문(權好文) 1532(중종 27)∼1587(선조 20)
조선 선조 때의 문인·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 안주교수(安州敎授) 권육의 아들이다. 1549년(명종 4) 아버지를 여의고 1561년 29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564년에 어머니상(퇴계 3兄 의 女)을 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성산(靑城山) 아래에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그곳에 은거하였다. 이황(李滉)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같은 문하생인 류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교분이 두터웠고 이들로부터 학행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만년에 덕망이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다.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내시교관(內侍敎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56세로 일생을 마쳤으며, 묘지는 안동부 서쪽 마감산(麻甘山)에 있다. 안동의 청성서원(靑城書院)에 제향되었다. 그는 평생을 자연에 묻혀 살았는데, 이황은 그를 소쇄산림지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고 하였고, 벗 류성룡도 강호고사(江湖高士)라 하였다. 작품으로는 경기체가의 변형형식인 〈독락팔곡 獨樂八曲〉과 연시조인 〈한거십팔곡 閑居十八曲〉이 《송암집》에 전한다.
권벌(權橃) 1478(성종 9, 무술) ~ 1548(명종 3, 무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훤정(萱亭). 시호는 충정(忠定). 북후(北後) 도촌(道村) 출생. 생원(生員) 사빈(士彬)의 자. 1496년(연산군 2) 진사가 되고, 1504년(연산군 10) 대과에 급제했으나 김처선(金處善)의 ‘처(處)’자가 글 속에 있다고 취소되어, 1507년(중종 2) 별시문과에 다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관직에 나아갔다. 이어 승문원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1519년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이어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다가 이 해 겨울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당했다. 1533년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복직되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1539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예조판서(禮曹判書)․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겸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역임하였다. 1545년(인종 1) 우찬성(右贊成)으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하였고, 이 해 7월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랐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로 귀양간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을 구하려다 파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547년(명종 2)에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구례(求禮)에 유배된 후, 삭주(朔州)에 이배(移配)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1568년(선조 원년) 신원(伸寃)되어 좌의정(左議政) 추증되었다가, 1591년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봉화(奉化)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문집에 충재집(冲齋集)이 있다. 중년에 외향(外鄕)을 따라 안동에서 봉화(奉化) 유곡(酉谷)으로 이거했다. ■참고문헌 : 中宗․仁宗․明宗實錄․國朝人物考․酉谷(權廷羽)
권동보(權東輔 1518(중종 13, 무인) ~ 1592(선조 25, 임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운경(雲卿). 호는 청암(靑巖). 우찬성(右贊成) 벌(橃)의 장자. 이황(李滉)의 문인. 음서(蔭敍)로 헌릉참봉(獻陵參奉)이 되고, 1543년(중종 38)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을 역임하였다. 1547년(명종 2) 윤원형(尹元衡) 등의 소윤(小尹) 일당을 비난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관련된 혐의로 부친 벌(橃)이 삭주(朔州)로 귀양가서 1년만에 죽자, 관직을 버리고 20년 동안 두문불출하였다. 선조 때 벌(橃)의 무죄가 밝혀지자 복관되어 초계군수(草溪郡守)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여 봉화(奉化) 유곡(酉谷)의 계곡 위에 석천정사(石泉精舍)를 짓고, 산수를 즐기면서 여생을 보냈다. 저서에 『청암집(靑巖集)』이 있다. ■참고문헌 : 永嘉誌․陶山及門諸賢錄․酉谷(權廷羽)
권두경(權斗經) 1654(효종 5, 갑오) ~ 1725(영조 1, 을미)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안동(安東). 자는 천장(天章). 호는 창설재(蒼雪齋). 우찬성(右贊成) 벌(橃)의 후손. 유(濡)의 자. 외조는 예안인(禮安人) 김견(金鋻). 처부(妻父)는 의성인(義城人) 김시온(金是榲). 이현일(李玄逸)의 문인. 1679년(숙종 5) 진사시에 합격했다. 1694년 학행(學行)으로 태릉참봉(泰陵參奉)이 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700년 정랑(正郞)에 올랐으며 곧 영산현감(靈山縣監)으로 나가 풍속을 교화시켰다. 171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지내고,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어 시정(時政)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시(詩)․서(書)․화(畵)에 능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한국 산천의 형세, 도리(道里)의 원근, 인물의 출처, 시대의 변혁, 군신(君臣)의 현부(賢否), 정사(政事)의 득실(得失), 유학(儒學)의 장단점 등에도 정통하였다. 봉화(奉化) 백록리사(栢麓里社)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창설재집(蒼雪齋집)』이 있고, 편저에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이 있다. ■참고문헌 : 嶺南人物考․酉谷(權廷羽)
권두기(權斗紀) 1659(효종 10, 기해) ~ 1722(경종 2, 임인)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숙장(叔章). 호는 청사(晴沙). 우찬성(右贊成) 벌(橃)의 후손. 유(濡)의 자. 두경(斗經)의 제. 1687년(숙종 13) 생원시에 합격하고, 1696년(숙종 2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1701년 예조좌랑(禮曹佐郞)․해운판관(海運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1707년 시사(時事)를 논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전라도 해남(海南)에 유배되어, 4년만에 풀려나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했다. 문집에 『청사집(晴沙集)』이 있다. ■참고문헌 : 嶺南人物考․安東鄕土誌(宋志香)
권두문(權斗文) 1543(중종 38, 계묘) ~ 1617(광해군 9, 정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경앙(景仰). 호는 남천(南川). 영주(榮州) 출생. 사복재(思復齋) 정(定)의 후손.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유년(有年)의 자. 1572년(선조 5)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가 되고 이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등을 거쳐 1586년 형조정랑(刑曹正郞)․청도군수(淸道郡守)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아들과 함께 왜병의 포로가 되었다. 이 때 적의 정세를 세밀히 탐지하여 관군에게 알렸으며, 이 일을 『호구일록(虎口日錄)』에 기록하여 남겼다. 그 뒤 탈출하여 이듬해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가 되고, 이어 군자시첨정(軍資寺僉正)을 지낸 뒤 예천(醴泉)․영천(永川)․금산(錦山) 등의 수령을 지냈다. 1602년 사섬시정(司贍寺正)․간성군수(杆城郡守)를 역임하고 내자시(內資寺)․통례원(通禮院)의 정(正)을 지냈다. 많은 서적의 수장가(收藏家)로 알려졌으며, 많은 책을 구교(仇校)하고 주석(註釋)을 달았다. 영주(榮州) 구호서원(鷗湖書院)에 제향되고 있으며, 문집에 『남천집(南川集)』이 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嶺南人物考․榮州誌
권두인(權斗寅) 1643(인조 21, 계미) ~ 1719(숙종 45, 기해)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안동(安東). 자는 춘경(春卿). 호는 하당(荷塘)․설창(雪窓). 우찬성(右贊成) 벌(橃)의 후손. 영릉참봉(英陵參奉) 목(霂)의 자. 홍준형(洪浚亨)의 문인으로 연이은 부모와 조부의 상(喪)으로 인해 35세에 비로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했다. 하당(荷塘)의 글은, 문장은 ‘평포전아(平鋪典雅)’하여 조탁(彫琢)을 일삼지 않았고, 시는 ‘한담청원(閑淡淸遠)’하여 속세의 기운이 없어, 상국(相國) 권대운(權大運)이 ‘남사제일(南士第一)’이라 칭하였다. 학행(學行)으로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 뒤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세자익위사사어(世子翊衛司司禦)를 거쳐 영춘현감(永春縣監)․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안동(安東) 동백서원(東栢書院)․봉화(奉化) 백록리사(栢麓里社)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하당집(荷塘集)』이 있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宋志香)․酉谷(權廷羽)
권두추(權斗樞) 1632(인조 10, 임신) ~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수보(壽甫). 생육신(生六臣) 절(節)의 후손. 승지(承旨) 확(鑊)의 손자. 진사 후(厚)의 자로 백부 기(土自)에게 출계. 1651년(효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5년(효종 6) 춘당대시 문과에 급제했다. 관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 삼사(三司)의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외직으로는 1668년(현종 9) 홍양현감(洪陽縣監)을 역임했다. 또, 효종실록(孝宗實錄) 수찬(修撰)에 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했다. 보충 : 권두추(權斗樞)는 관향은 안동이지만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으로 안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편집상의 착오로 본 안동인물초(安東人物抄)에 등재된 것 같다. ■참고문헌 : 司馬榜目․ 顯宗實錄 ․安東權氏譜
권심행(權審行) 1517(중종 12, 정축) ~ 1579(선조 12, 기묘)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안동(安東). 자는 가립(可立). 호는 취규재(聚奎齋). 북후(北後) 도촌(道村) 출생. 현감(縣監) 의(檥)의 자. 어려서 숙부 벌(橃)을 따라 상경하여 수학했으며,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다.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김부필(金富弼)․조목(趙穆)․권대기(權大器) 등과 교유하며 향리에서 후진을 가르치고 행실을 닦으며 유유자적했다. 만년에 당시의 안동현감(安東縣監) 서익(徐益)의 모함으로 서울로 불려가 서울 객사(客舍)에서 타계했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宋志香)․安東道溪村誌(權五崇)
권장(權檣) 1489(성종 20, 기유) ~ 1529(중종 24, 기축)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제부(濟夫). 호는 우암(寓菴). 북후(北後) 도촌(道村) 출생. 생원(生員) 사빈(士彬)의 자. 충재(沖齋) 벌(橃)의 제. 1513(중종 8)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9년(중종 1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등을 역임하며 신진사류(新進士類)로서 촉망받았다. 이듬해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피척(被斥)되어 진보현감(眞寶縣監)으로 좌천되었으며, 1529년 또 금산군수(金山郡守)로 좌천되어 임지로 가던 중 병을 얻어 환향하여 세상을 떠났다. 기묘명현(己卯名賢) 중의 한 사람으로, 학문이 해박․통달하고, 효행․우애․지조가 있었다. 후에 예천(醴泉)으로 이거하였다. 부제학에 추증되고, 예천(醴泉) 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醴泉郡誌
권주(權柱) 1457(세조 3, 정축) ~ 1505(연산군 11, 을축)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지경(支卿). 호는 화산(花山). 풍천(豊川) 가곡(佳谷) 출생. 종묘서령(宗廟署令) 이(邇)의 자. 10세 때 이미 경사(經史)에 통하였다. 1474년(성종 5)에 진사(進士)가 되고, 1480년 친시문과(親試文科)의 급제하였다. 중국어에 능하여 1489년(성종 20) 공조정랑(工曹正郞)으로 있으면서 요동(遼東)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다녀오고, 1493년에는 홍문관부응교로(弘文館副應敎) 대마도(對馬島)에 경차관(敬差官)으로 다녀와 응교(應敎)가 되었다. 1497년(연산군 3)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고, 이어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어 1502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앞서 성종이 윤비(尹妃)를 폐위시키고, 이어 사사(賜死)할 때 사약(賜藥)을 가지고 갔다 하여 그 죄로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교살되었다. 중종 때 신원되어 우참찬(右參贊)이 추증(追贈)되었다. 문집에 『화산유고(花山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 永嘉誌․安東鄕土誌(宋志香)
권질(權礩) 1483(성종 14, 계묘) ~ 1545(인종 1, 을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사안(士安). 호는 사락정(四樂亭). 참판(參判) 주(柱)의 장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장인.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부친 주(株)가 살해될 때 마침 한글로 표기된 연산군 실정(失政)의 투서가 궁중에 들어가 언문옥사(諺文獄事)가 일어나자, 이것이 죄인 자손의 소행이라 하여 혐의를 받고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아버지가 신원됨과 함께 풀려나와 음보(蔭補)로 현릉참봉(顯陵參奉)이 되고, 1517년(중종 12)에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가 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장살(杖殺)된 아우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전(磌)의 사건에 연좌되어 예안(禮安)에 유배되었다가, 1545년(인종 1) 복관되어 풀려났으나 그 해 병으로 죽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安東鄕土誌(宋志香)
권전(權磌) 1490(성종 21, 경술) ~ 1521(중종 16, 신사)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군안(君安). 참판(參判) 주(柱)의 제2자. 질(礩)의 제. 1510년(중종 5) 생원(生員)이 되고,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조광조(趙光祖)의 덕치주의(德治主義)를 펼치는데 같이 힘썼다. 같은 해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1521년(중종 16)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안처겸(安處謙) 등과 함께 36세로 장살(杖殺)의 화를 당했다. 1746년(영조 22) 신원(伸寃)되어 부제학(副提學)에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安東鄕土誌(宋志香)
권구(權榘) 1672(현종 13, 임자) ~ 1749(영조 25, 기사)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안동(安東). 자는 방숙(方叔). 호는 병곡(屛谷). 참판(參判) 주(柱)의 후손. 선교랑(宣敎郞) 증(忄登)의 자. 외조는 졸재(拙齋) 유원지(柳元之).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썼다.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탐독했으며, 천문(天文)․주수(籌數)․복서(卜筮)․병가(兵家) 등 백가서(百家書)에 두루 통달하였다. 향리에 사창(社倉)을 열어 빈민을 구제하고, 향약(鄕約)을 실시 교도하여 양풍(良風)을 일으켰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영남에 파견된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그가 적당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고 보고하여 서울에 압송되었으나, 그의 인품에 감동을 받은 영조의 특지(特旨)로 석방되었다. 특히 시조(時調)에도 능하여 『병산육곡(屛山六曲)』이 전한다. 평생 향리 풍천(豊川) 가곡(佳谷)에서 학문에 힘써 『병곡집(屛谷集)』을 비롯한 많은 저작(著作)이 있으며, 가곡(佳谷)의 노동서사(魯東書社)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嶠南誌․安東鄕土誌(宋志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