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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달별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朴晙瑛(元陽)
일월면 주곡리注谷里 유래
마을의 서쪽으로는 일월산(日月山)의 갈래인 흥림산(興霖山)이 뻗어 내려 마을의 입구를 막고 있으며 감복동 감북골 서편에 영양읍과 경계를 만들고 있다. 흥림산 허리에 구름이라도 돌면 비가 오기 때문에 붙여진 산의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의 입구에 주실(注室) 쑤가 있으며 마을의 중앙을 흐르는 장군천(將軍川)을 좌우로 하여 골짜기를 서로 마주하여 이루어진 고장이다.본래 영양현에 딸린 주곡부곡(注谷部曲)이 있었으므로 하여 주실 또는 주곡(注谷)이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에 감복동(甘伏洞)과 법곡동(法谷洞)을 합하여 주곡리라 하고 일월면에 들게 된다.마을 이름의 상관으로 볼 때 감(甘)은 물신ㆍ땅신과 상관을 보이므로 감북이라 함은 물의 북쪽을 가리키니 감북은 냇물의 북쪽 마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을 주실 또는 다른 이름으로 매계(梅溪) 혹은 매한(梅寒)이라 할 때 물이 '매'로 이어짐을 들 수 있다. 가령 『삼국사기』에서 수원(水原)의 옛 이름이 매홀(買忽)이라고 하였음을 상고하면 매-물의 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하긴 주실(注室)의 주(注)도 그 뜻으로 따지자면 물과 관계가 있으며, 법곡동의 법(法) 또한 그러함은 모두가 일월산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이 합하여 장군천 및 반변천(半邊川)을 중심으로 하는 방위와 무관하지가 아니하다.
[마을의 특징]
이 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월록서당(月麓書堂)과 시인 조지훈(趙芝薰) 선생의 생가(生家)를 들 수 있으며 또한 옥천종텍(玉川宗宅)과 조지훈 선생의 시비(詩碑)들 수 있겠다. 이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연들은 주실(住實)마을의 것으로 대신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유래]
*주실(注實)ㆍ주곡(注谷)ㆍ주곡부곡(注谷部谷)ㆍ매계(梅溪)ㆍ매한(梅寒)1630년 이전에는 주씨(朱氏)가 살았으나 1630년 한양인(漢陽人) 조전(趙佺) 선생이 이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와 정착한 뒤 매한(梅寒)이라 하였고, 1700년 무렵 매계(梅溪) 혹은 매곡(梅谷)으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주곡(住谷)으로 부르게 되었다.마을 중앙을 흐르는 장군천(將軍川)을 좌우로 용골ㆍ논골ㆍ성지골ㆍ새미골ㆍ감북골ㆍ앞산골 등의 골짜기가 서로 맞닿아 있어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주실 또는 주곡이라 불러 왔다고 한다. 유형문화재인 월록서당(月麓書堂)이 이 마을에 있다.이 고장은 시인 조지훈(趙芝薰) 선생의 고향이기 때문에 최근 그의 시비를 마련하여 세웠다. 이 곳의 조씨(趙氏)를 흔히 주실 조씨라 부른다.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한데 마을 전체 분위기와 짜임이 다른 마을과는 달라 학자와 문인이 많이 배출되었다(조진영(74) 제보). 앞에서 풀이한 바와 같이 주실-매계-매한-매곡으로 이러지는 흐름과 감북-법곡으로 맞몰려 있는 땅 이름의 흐름으로 볼 때, 이는 물 곧 장군천 혹은 반변천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보완 의견
오늘은 꽃빛고을 주실을 소개합니다
[꽃빛고을 주실이야기]
- 지조 있는 선비들의 고향 -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은 조선 중기 때 기묘사화와 관련된 정암 조광조 선생의 환란을 피해 이 곳으로 와서
정착한 한양조씨 집성촌입니다.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 개화한 마을이면서 일제 강점기의 서슬 퍼런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지조 있는 선비들의 마을입니다.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였던 조지훈을 비롯하여 한국 인문학의 대가 조동일, 조동걸, 조동원 교수 등 우리나라 역사
에 남을 수 많은 박사와 인재들이 배출된 마을입니다.
일월산의 해와 달의 정기가 남쪽으로 쏟아져 내려 오다가 장군천에 이르러 문필봉을 바라 보고는 잠시 갈 길을 멈춘 언덕위
에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주실이라고 부릅니다.
마을에는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과 주실 입향조 호은공의 증손자인 옥천 조덕린 선생의 옥천종택, 조선 영조 49년 (1773) 에 후진 양성을 위하여 건립한 월록서당 등 문화자원들이 남아 있으며, 지훈문학관과 지훈시공원, 시비, 마을숲 등 볼
거리가 가득합니다.
*지조와 절개를 지켜 온 주실마을 호은종가 '삼불차' 이야기
'삼불차'는 재물. 문장.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실마을 '호은종가'가 주목 받는 이유중의 하나는 집안의 독특한 가풍 때문입니다.
이른바 "삼불차" '재물.글.사람'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 원칙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조선 후기
노론이 득세하던 시대, 사림으로 야당이었던 남인으로서 이곳 선조들은 "굶어 죽더라도 아쉬운 소리를 안 하는" 노선을 택
합니다.
자존심을 지키며 사는 삶을 인간다운 삶으로 보았던 그 정신은 의병활동을 했던 분들이나 일제 강점기에 창씨 개명을 거부
한 지훈 선생의 조부, '지조와 절개'를 중시하며 지조론펼쳤던 지훈 선생의 정신으로 이어진다 하겠습니다.
*빛을 찾아가는 길 / 조지훈
사슴이랑 이리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 오누나
해바라기 닮아가는 내 눈동자는
자운이 피어나는 청동의 향로
동해동녁바다 해 떠오는 아침에
붇받치는 설음을 하소하리라
돌부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 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에 나의 노래는
슬픈구름 걷어가는 바람이되리.
-경북영양군일월면주곡리 주실마을숲'지훈시비'에 음각된 '시'입니다.^^
*주실의 노래
- 조동걸 작사. 조동건 작곡.
#1
훈기찬 매봉산의 아침해 받아
영남의 계명천지 열어가던주실
영웅의 산발로 찾는 새 모습
긴수풀 거친 길을 다시 딱는다
(후렴)
아아 주실아 새 사조 받아서
새 역사 새 천지를 이루어 가자
#2
미풍은 독산에 산 들어 우니
천지에 묵은 낙엽 멀리 던저라
성스런 새 이상 삶의 표적
새 시대 역사 위에 횃불을 들자
#3
일월산 정기로서 기운찬 창조
웅혼한 설계도는 문화의 샘
20세기 후반기의 선봉에 서서
힘 차게 뛰어 가자 주실의 건아.
*주실소년회 노래
-조동걸 작사,학도가 차곡
일월산 솟아나던 문화의 샘물
흐르고 흐르다가 매계이로세
꽃피고 열매맺어 씨앗 거두니
빛나도다 그 이름 주실 소년회.
*은화청년회 노래
-조성을작사 작곡
매봉산 기개를 가슴에 품고
매계의 정기를 일신에 모아
유수한 일월산 속 굳게 일어나
화랑도를 자랑하는 은화청년회
(후렴)
주실 은화 청년회 만세 만만세.
*주실마을에 壺隱 趙佺이 1629년 입향하였으며, 입향조인 趙佺선생은 중국에 있는 武夷山 武夷九曲에 나오는 별천지와 신라시대 孤雲 崔致遠선생의 詩 '壺中別天' (壺中別天-崔致遠 선생은 화개동천을 일컬어 “호리병 속의 별천지”로 賞讚)했다)에서 壺隱을 취하여 아호를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壺隱宗宅은 注谷里 주실마을 入鄕祖 趙佺의 둘째 아들 趙廷珩이 조선 인조때 지은 집으로 호은 조전 선생의 손자인 옥천 조덕린이 상량기문을 썼다고 하며 이 기문내용에 "壺里別天數丘之曲浙"이라는 글귀가 있다고 한다.
*감부골ㆍ감북곡(甘北谷)ㆍ감복동(甘伏洞)
흥림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감이 특히 많이 생산되어 감부골이라 불렀으며, 1600년 무렵 감복동이라 하다가 1914년 감북동이 되었는데 감북골이라 부르기도 하며 계곡을 중심으로 도계동과 주곡동으로 갈라진다(조진영(71) 제보).감부골, 감복동은 가마실의 사마-감과 같은 계열의 마을 이름으로 보인다. 종교적인 뜻으로라면 물신과 땅신이며 산신을 섬기는 것이며 방위로는 물의 북쪽에 자리한 마을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니까 감부골을 냇물이 흥림산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지역에 위치한 동네라는 말이 된다.
*서당뫁ㆍ서당골(書堂-)
지금으로부터 260여년 전 주곡의 조씨(趙氏), 주곡의 정씨(鄭侍), 도곡의 오씨(吳氏) 등 세 문중에서 뜻을 모아서 월록서당(月麓書堂)을 건립하였는데, 서당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조진영(71) 제보).
*독산몰(獨山-)
주곡동 입구에서 서쪽에 솟는 산을 독산 또는 고산이라 부른다. 이 산은 동으로 흥림산(興霖山)에서 뻗어 내려 동리의 외구(外口)를 막았는데 이 산 밑의 마을을 독산물이라 한다(조진영(71) 제보).
*새미골ㆍ선미곡(仙美谷)
서당뫁 남쪽에 있는 마을로 처음엔 신선이 놀던 곳이라 하여 선미곡(仙美谷)이라 불러 오다가 샘물이 맑고 깨끗하여 이 물을 마시면 신선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샘의 이름을 따서 새미골이라 불러 온다고 말한다(조진영(71) 제보).
*성주골(星主谷)
밤 하늘에 아주 밝은 빛을 내는 큰 별이 이 골짜기에 나타나며 외계의 새로운 소식을 잘 전해 들을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조진영(71) 제보).
*생두들(生陽들)
주곡리에서 가곡리의 금마래골로 가는 중간 지역으로 지대가 높아 해가 뜨는 것을 제일 먼저 맞이하는 마을이라고 생두들이라 불렀다(조진영(71) 제보). 생두들의 한자를 풀이하면 해가 돋는 언덕을 드러냄이니-생-새-해의 관계를 상정해 볼 수도 있다.
*흥림산밑(興霖山-ㆍ흥霖山)
이 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월록서당(月麓書堂)과 시인 조지훈(趙芝薰) 선생의 생가(生家)를 들 수 있으며 또한 옥천종텍(玉川宗宅)과 조지훈 선생의 시비(詩碑)들 수 있겠다. 이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연들은 주실(住實)마을의 것으로 대신한다.
[참고문헌;영양군지, 영양군청홈페이지]
[#추가의견 반영하여 정리]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은 조선 중기 때 기묘사화와 관련된 정암 조광조 선생의 환란을 피해 이 곳으로 와서
정착한 한양조씨 집성촌입니다.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 개화한 마을이면서 일제 강점기의 서슬 퍼런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지조있는 선비들의 마을입니다.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였던 조지훈을 비롯하여 한국 인문학의 대가 조동일, 조동걸, 조동원 교수 등 우리나라 역사
에 남을 수 많은 박사와 인재들이 배출된 마을입니다.
일월산의 해와 달의 정기가 남쪽으로 쏟아져 내려 오다가 장군천에 이르러 문필봉을 바라 보고는 잠시 갈 길을 멈춘 언덕위
에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주실이라고 부릅니다.
마을에는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과 주실 입향조 호은공의 증손자인 옥천 조덕린 선생의 옥천종택, 조선 영조 49년
(1773)에 후진 양성을 위하여 건립한 월록서당 등 문화자원들이 남아 있으며, 지훈문학관과 지훈시공원, 시비, 마을숲 등 볼
거리가 가득합니다.
[영양군 일월면 주곡2리 감복동 이야기]
1. 甘伏洞의 위치
주곡2리 감복동은 흥림산 동쪽산록에 위치한 마을로 동북쪽에 주곡1리 주실마을, 남쪽에 영양읍 황룡기, 서쪽에 청기면 정족2리 나방마을, 북쪽에 청기면 산운리 새뉘(새눈)마을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주곡2리 감복동 입구에 지방도 918번 재일로가 있으며, 도로 동쪽옆으로 장군천 이 흐르고 있고, 마을내에는 흥림산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장군천에 합류하는 마을하천은 전형적으로 서원동류西源東流 인 감복동천甘伏洞川이 있다.
문화유산 자료로는 1700년 유학자 항재 이숭일선생이 유학을 가르치던 흥림정사가 있었다. 이 곳에는 옛날에 사용했던 빗살무늬기와 조각과 토기가 옛 터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현재는 '대명사'라는 암자가 있다.
2. 감복동(甘伏洞/甘福洞) 유래
흥림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물을 다스리는 물신(水神)과 땅을 다스리는 땅신(土神)이 있는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1600년 무렵부터 감복동(甘伏洞)이 였으나, 1914년 주실(注室)과 법곡동(法谷洞)에 통합되어 주곡동이 된 후에 감부골, 감북골, 감북곡(甘北谷)이라 부르고 있다.
감천, 감내,감복의 '감'은 물신이요 땅신을 상징한다.
최남선의 「신자전」을 보면 신을 '검' 이라고 하였으니,여기 감은 검과 같은 뜻으로서 거북신앙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거북은 옛말로 거붑이요. 다시 이는 '검'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양산 민요 '왕거미 노래'의 거미-검-거북)
모든 삶의 가능성은 물과 땅에서 말미암는 것이니 땅신을 중심으로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우리말 감내를 이에 가까운 한자로 대응을 두어 감천이라고 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감복동甘伏洞은 가마실의 사마-감과 같은 계열의 마을 이름으로 종교적인 뜻으로라면 물신과 땅신의 동네라는 말이 된다.
*감복동(甘伏洞)의 주산(主山) 흥림산(興林山, △766.7m)
최근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었다. 『여지도서』(영양)에 "흥림산은 현 서쪽 10리에 있고, 예전에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산을 미쳐 다 내려오기도 전에 비가 올 정도로 영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어난다는 뜻의 '흥(興)'과 장마를 뜻하는 '림(霖)'으로 산 명칭을 부르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흥림산 부근에서 통일신라시대 절터와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는데, 기와조각에 흥림사(興林寺)로 표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산 이름의 한자 표기도 예전에는 '흥림산(興林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옛 군현지도와 전국지도 대부분에서 흥림산이 표시되어 있다. 그만큼 영양에서 중요시되었던 산으로 여겨진다.
3. 흥림산(興霖山) 기(記)
흥림산은 일명 흑림산( 767m) 또는 흑림산(黑霖山) 이라 이르기도 한다.
일월산 중간지맥이 일월면과 청기면 사이를 뻗어 내려온 거산이다.
예로부터 이 산은 산봉이 높고 잡목이 울창하여 바라볼 때 항상 검푸른 빛을 이루었으므로 흑림산이라 하였다
유래는 오래다. 이 산의 모습은 변하는 모양이 변화무상한데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하여 비를 갈망할 때는 구름이 산허리를 돌아서 터져 오르면 하늘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단비가 내리므로 흥림산(興霖山)이라 이르게 되었다 한다.
가뭄이 심할 때 산정에 검은 구름이 단비를 내리게 한다 하여 이것이 예로부터 이 산의 영험이라는 설이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산하의 사람들이 예로부터 旱期가 있든지 雨期가 있을 때에 이 산을 바라보았다 한다.
옛날에는 한발이 심하면 관가에서 처음에 사직단에 기우하고 그 다음에 이 산에서 기우하고 마지막에 일월산에 기우하는 것이 관례가 된 영험있는 산이다.
이 산의 서쪽 나방촌(羅方村)에는 옛날에 홍림사(興霖寺)가 있었다.
내가 작년(1160) 겨울에 조군을 따라 이웃에 집터를 잡았다. 이윽고 산과 익숙하게 되고 또 날마다 조군의 이야기를 들으니, 흥림산이 영혐함이 있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다. 다음 해에 마침 큰 가뭄이 들어 무지개를 간절히 바랐다.
나는 산의 이름을 생각했기 때문에 구름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산의 모습이 타들어갈 뿐, 비가 올 기색은 막막했다. 그래서 내가 조군을 힐난하길, "그대가 '홍림'으로 이 산을 이름 붙인 것은 아름답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런데 한 해 동안 큰비가 내리느냐 가뭄이 드느냐에 따라 한때의 풍흥이 관계되며 한때의 풍흥은 실로 백성의 행불행에 관련됩니다. 이런 점으로써 말한다면, 그 가뭄과 큰비가 관계되는 것이 매우 중대하여 일개의 산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군자가 사물을 명할 때, 사실로써 이름 분이고 공허한 것으로 하지 않따니다.
지금 체험해 보니,'흥림'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산을 거짓되게 말한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조군이 무안해하며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했다. 내가 다시 해명하길, "상심하지 마십시오. 예로부터 산천의 명칭 가운데 혹 그 주인의 현명함과 그렇지 못함에 따라 영화와 욕됨이 가해진 경우가 있으니, 예를 들자면 우계. 한림석*• 승지암* 등과 같은 호칭입니다. 이런 종류는 매우 많습니다. 혹 다른 날 이 산 아래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흥기할 수 있어서 상가의 임우가 될 수 있을는지요. 이것은 아직알 수 없는 일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군이 흔연히 웃으며 말하길, "홀륭합니다. 원컨대 그대는 이것을 기록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항재이숭일선생의 - 興霖山記 흥림산기> <국역 항재선생문집 P130~13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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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집어 보는 영양말(사투리)※
대깨, 이사, 엄체, 맹글, 그랑, 마카, 마떡, 언덕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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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말캉 마실소개 /149, 228) 일월면 주곡리(注谷里)가 궁금니껴?
주곡(注谷)은 1304년 고려 충렬왕때
영양현에 딸린 주곡부곡(注谷部曲)이
있었니더.
장군천을 중심으로 서로 맞따있는
좌우의 대깨(서너개) 꼴짜기서
물이 쉴새없이 흘러 나온다 케가꼬
주곡(注谷)이라 카게 된니더.
글코, 마실 서쪼구에는
일월산(日月山)서 갈래 나온 흥림산(興霖山)
줄기가 뻗체가 마실 입세까지 이사져 있니더.
1914년 행정구역 바낄때는
감북(甘北)캉 법곡(法谷)을 엄체가
주곡이라 카고 일월면에 속하게 되었꼬
그뒤 2015년에는
주곡리가 1, 2리로 행정리가 농갈래졌니더.
(주실ㆍ주곡ㆍ주곡부곡ㆍ매계ㆍ매한)
1304년(고려 충렬왕) 주곡부곡(注谷部曲)이
있었따꼬 주곡부곡이라 켔니더.
그후 1630년 이전까지는
주씨(朱氏)들 집성촌으로
마실사람들이 충분히 먹을수 있는
식수가 있는데라꼬 매한(梅寒)이라 켔니더.
1630년경에는 한양조씨들이 입향하면서
물이 있는 계곡이자 꼴짜기라꼬
매계(梅溪) 혹은 매곡(梅谷) 이라 켔꼬.
1914년 행정구역 바낄때는
마실 중간에 흐르는 그랑(장군천) 좌우로
서로 맞따 있는
용골, 논골, 성지골, 새미골, 감북골, 앞산골
등 에서 물이 쉴세 없꺼러 흘러나온다 케가
주실(注實) 혹은 주곡(注谷)이라 켔니더.
(감복동.감북골ㆍ감부골)
흥림산 북쪼구에 붙어 있으며,
2015년 주곡리가 1, 2로 분리되면서
주곡2리 중심지 마실이 됬니더.
감(甘)이 디게 많이 생산되는데라꼬
김복동(甘伏洞). 감북골(甘北谷)이라 켔따 카기도 하고.
마실이 그랑 북쪼구에 있따꼬
감북골(甘北谷)이라 켔따 카기도 카니더.
(서당뫁ㆍ서당골)
1773년(영조 49년) 주곡의 조씨(趙氏),
가곡의 정씨(鄭侍), 도곡의 오씨(吳氏)들
문중에서 뜻을 모다가꼬
월록서당(月麓書堂)을 맹글었니더.
그뒤 서당이 있는 마실이라꼬
서당뫁 혹은 서당골(書堂谷)이라 카니더.
(독산뫁)
주곡 입세서 서쪼구로 솟아 있는 산을
독산(獨山) 또는 고산(孤山)이라 카니더.
이 산은 흥림산(興霖山)에서 뻗어내려와
마실 바깥입세를 막았니더.
마실이 독산 알게 있따꼬
독산뫁이라 카니더.
(새미골ㆍ선미곡)
월록서당 뒷산넘어있는 마실로
신선이 놀던 데라꼬
선미곡(仙美谷)이라 켔니더.
그뒤, 디게 마떡은 샘이 나는데라 케가
새미골이라 카게 된니더.
(성주골)
밤 하늘에 디게 밝은 빛을 내는 큰 별이
이 골짜기에 나타나가.
외계의 새로운 소식을
잘 들을 수 있는 데라 케가꼬
성주꼴(星主谷)이라 켔따 카기도 하고.
성주풀이(복과 행운을 비는 지신밟기 등)
하던 당(堂)집이 있었떤데라꼬
성주골이라 켔따 카기도 카니더.
(생두들)
주곡 본마실(마을회관)에서 금마래골(가곡)
가는 중간에 있는 언덕빼기시더.
지대가 높아 해가 생겨나는 언덕으로
해 뜨는 걸 젤로 먼저 볼수있는 언덕이라꼬
생두들이라꼬 카니더.
생두들(生陽들)은 해언덕을 한자로 쓴거시더.
첫댓글 이 청명한 가을에 우리 문중의 위대한 시인 지훈 선생의 고향에 종친님들께서 참여해 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