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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묵상글 들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 말에 앞서 바른 행실을 해야 한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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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에 앞서 바른 행실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습니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마더 데레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수도자와의 만남에서 “청빈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또한 순전히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은 것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로마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하셨습니다.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어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자신이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을 하면서도 정작 대접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면 큰일입니다. 사람의 주목을 받는 일에는 기를 쓰고 일을 하려고 들고 알아주지 않는 일, 하지만 충실히 채워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백성이 떼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4,5). 그리스도인은 행실이 표양이 되어야 하고 버릇없는 이들과도 함께해서 좋은 것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듯 말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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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주년 기념미사.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이 미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주년 기념미사입니다. 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교황청은 ‘희년’으로, 유네스코는 ‘기념의 해’로 선정하였습니다. 곧 교황청은 2020년 11월 29일(대림 제1주일)~2021년 11월 27일(대림 제1주일 전날)까지를 ‘희년’으로 선포하였고, 희년의 주제를 1846년 8월 26일 [옥중서간]에 나오는 옥중취조 질문이었던 “당신이 천주교인이요?” 삼았습니다. 이는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요.”라는 죽음의 두려움을 과감히 떨쳐버린 성인의 놀라운 신앙고백을 통해 하느님만이 우리 삶의 전부이고, 그분에 대한 신앙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보장한다는 확신을 심어주면서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게 해줍니다.
성인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특히 한국천주교회와 대전교구는 당진시와 더불어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을 경축하고, 진리를 향한 그분의 투신과 선구자적 시대정신을 되새겨 오늘의 지평을 삼고자, 8월 17~19일(2박3일) 동안 내포교회사연구소 주관으로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지인 당진 솔뫼성지에서 국제학술심포지엄이 개최되었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기념강연을 한 유네스코 주재 교황대사인 프란치스코 폴로 몬시뇰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올해의 세계의 인물]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인품과 그분의 메시지와 귀감은 오늘날에도 평화의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김대건 신부님(1821,8,21~1846,9,16)은 우리나라의 첫 번째 사제로서 민족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요, 또한 참된 목자로서 존경받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25년의 짧은 생이었으나 전근대적인 조선사회에 인권, 박해, 평등과 같은 근대적 가치를 실현하려 했던 선구자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나는 착한 목자이다.”(요한 10,11),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요한 10,15)라고 선포하십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배웁니다. 그리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야말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착한 목자’로서, 예수님을 참되게 따라 순교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고귀한 사랑을 성소로 받아 살아가고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선사하신 이 아름다운 사랑의 성소를 삶으로 불태워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름 아닌 순교의 정신으로 살 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5)
주님!
당신의 눈은 항상 저를 향하고 계십니다.
저를 살리기 위해 당신을 내놓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보십니다.
주인이면서도 군림하지 않으시고 시중들기 위하심입니다.
이 지고한 당신의 사랑 앞에, 황송함으로 무릎 꿇어 경배합니다.
오늘 제 마음이 형제를 향하여 있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놓기 위해서 그러하게 하소서.
섬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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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룻이 아들 오벳을 낳다
모압 여인 룻은 유다인 가정에 며느리로 들어가서 시어머니인 나오미로부터 하느님 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자식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당시 관습으로는 동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도 어쩐 일인지 나오미의 며느리로 남기로 결심하였습니다(룻 1,16). 나오미는 아브라함의 후손답게 신앙의 모범을 룻에게 보여주었고, 모압족으로서 하느님을 알지 못하다가 시집에 와서 나오미로부터 참 신앙을 발견한 룻은 그 신앙의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의 삶을 하느님 신앙과 그 신앙을 전해 준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겨레로 삼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 사이에 일어난 이 일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부하신 선교의 사명이 꽃피운 미담입니다. 나오미의 친척이었던 보아즈도 이 미담을 듣고 비록 혼인하기에는 많은 나이였지만, 룻의 선택에 호감을 느껴 관습상 ‘구원의 의무’(룻 4,1-10)를 지키려고 아내로 삼고자 하였고, 마을 사람들도 보아즈가 자신의 며느리 뻘 정도 되는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 대를 이으려 하자, 일찍이 유다가 자신의 며느리 타마르로부터 아들 페레츠를 얻었던 고사를 인용하며 축복해 주었습니다(룻 4,12). 그리하여 룻이 낳아준 보아즈의 아들 오벳이 자칫 끊어질 뻔 했던 유다 지파의 적자 혈통을 이어줄 수 있었고 그 손자가 다윗입니다. 그리고 이 다윗의 후손 중에 요셉이 나옵니다.
일찍이 야곱이 열두 아들 앞에서 유다에게 내려준 축복의 예언(창세 49,8-12)이 요셉으로 이어지기까지 아슬아슬했던 이런 과정이 있었고, 하느님께서는 나오미와 룻 사이에 이어진 신앙의 끈으로 인간사의 취약한 고리를 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유다와 다윗에게 내려진 축복의 예언이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소명의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정작 구세주의 어머니로 간택하신 마리아와 요셉이 정혼하는 것까지 보시고서 그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시어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맺으신 약속을 실현시키시려고 얼마나 정성을 들이시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위신을 높이려고 위선적인 처신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뜻을 섬기는데 진정한 명예가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사람들과의 약속을 실현시키는 데 온 정성을 다 기울이셨던 하느님을 본받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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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밥때가 되면 식사 준비를 합니다. 제일 먼저 살피는 것은 냉장고 안입니다. 무엇이 있는지를 보고서, 찌개나 국을 만들고 또 여러 반찬을 직접 만듭니다. 사실 처음 직접 해 먹어야 할 때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인스턴트 음식만 해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오랫동안 혼자서 하다보니 자유롭게 음식을 하게 됩니다.
처음 요리책을 보고서 요리할 때, 책에 적혀 있는 재료가 다 있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또 요리 순서를 어기면 큰일이 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리를 계속하다 보니 이런 틀에서 자유롭게 됩니다(물론 맛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 맛있다고 하지 않더군요).
저만의 방식이 생긴 것입니다. 저만의 방식으로 뚝딱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내공이 생겼습니다. 이런 저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도 이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방식도 자기만의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주님과 함께하려고 노력할 때, 자기만의 방식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주님과 기쁨의 만남을 가질 수가 있게 됩니다.
문제는 자기 방식만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상대방이 하지 않는다고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의 방식 역시 주님께 다가가는 또 다른 방식이 되기 때문입니다(물론 이단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합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일입니다. 신부님께서도 신부님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자기만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딱 1년 간의 사제 생활이었지만,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충실하게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과 제자들을 향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자주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사람들에게 보이는 행동만 하려 하고, 진심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옳고 남은 옳지 않다면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옳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모세의 자리에 앉아 가장 올바른 사람인 척하면서 살았던 것이지요.
이런 위선을 주님께서는 절대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짧은 이 세상의 삶을 사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떠올리면서,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의 뜻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자기만의 방식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기심이 들어가면 주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오로지 겸손만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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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현명한 생각은 모두 이미 많은 사람이 몇 천 번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진실로 우리의 것으로 만들려면, 깊이 숙고해서 개인적 경험에 뿌리를 내리게 만들어야 한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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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버튼, 부정적 버튼
백화점에 가서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8층에 자신이 사려는 가전제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몇 층 버튼을 눌러야 할까요? 당연히 8층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그런데 지하 1층을 누르고서는 왜 가전제품을 팔지 않느냐고 항의한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원하는 층수를 눌러야 정확하게 자신이 가려는 층에 도착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긍정적 버튼’을 누르면, 긍정의 층으로, ‘부정적 버튼’을 누르면 부정의 층으로 갈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적 버튼’을 누르고는 긍정의 층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이상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불행한 이유만을 찾아내면서 이 세상에 살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부정적 버튼을 누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에 살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즉, 긍정적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나의 인생을 긍정의 삶으로 이동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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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제는 떨림과 울림에 대한 강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은 ‘전기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라는 강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린이에게 노트북을 보여주면서 노트북의 전기는 어디에서 오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아이는 아무런 막힘없이 전기는 벽에서 온다고 답하였습니다. 아이의 눈으로는 그것이 맞았습니다. 대부분의 전기는 우리의 벽에 있는 콘센트를 통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또 물었다고 합니다. 벽에 있는 전기는 어디에서 올까? 아이는 그 질문에는 답을 잘 못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기는 전선을 타고 오는데 변전소를 거쳐서 옵니다. 변전소의 전기는 송전선을 타고 가면 발전소에서 옵니다. 발전소의 전기는 어디에서 올까요? 발전소는 석탄 태운 에너지를 이용해서 전기를 만듭니다. 전기는 전기유도장치를 통해서 만들어지는데 커다란 자석과 코일이 있으면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전기는 사실 아주 간단한 원리로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석탄은 3억 년 전 식물이 썩어서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당시의 지층을 ‘석탄기’라고 부릅니다. 식물은 에너지를 어디에서 얻었을까요?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광합성은 태양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라는 에너지는 태양을 통해서 얻은 것입니다. 태양은 어떻게 에너지를 만들까요? 태양에는 수소가 있습니다. 수소는 핵융합을 통해서 에너지를 만듭니다. 이렇게 태양 에너지의 기본이 되는 수소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과학자들은 그것을 ‘빅뱅’에서 왔다고 합니다. 지금도 팽창하는 우주는 빅뱅이 시작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을 포함해서 우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원소는 그때 만들어졌습니다. 수소, 산소, 탄소, 질소입니다. 다른 원소는 폭발하는 초신성에서 왔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왔습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은 별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빅뱅이 있어서 우주의 질서가 생긴 것처럼 태초에 말씀과 하느님이 있어서 우리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우주와 만물의 근원이 됩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저도 제가 태어난 시골집을 가보았습니다.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고, 뒤에는 조상들이 묻혀있는 선산이 있습니다. 김제, 정읍, 전주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박해시대에 피난을 가기 좋은 장소였다고 합니다. 김제에서 포졸이 오면 정읍으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정읍에서 포졸이 오면 전주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포졸들은 자기들의 영역이 아니면 쫓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주의 끝을 알기 위해서는 시작을 알면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태초에 있었던 말씀과 하느님께 돌아가면 됩니다.
최고의 과학자들이 빅뱅으로 우주가 생겼다고 합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하느님이 계셨다고 믿습니다. 빅뱅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듯이, 하느님께서는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과학자들이 우리는 별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믿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비오 10세 교황을 기억하며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복된 비오 교황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도록 천상 지혜와 사도의 용기를 주셨으니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그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받게 하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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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섬김의 여정
- 내적 깊이의 본질적 삶 -
오늘은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이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1821.8.21-1846.9.16.), 탄생 200주년 기념일입니다. 두 성인의 생몰연대를 보니 거의 동시대 분들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확실한 사실은 언젠가 죽는 다는 것입니다.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오래 많이 살아서 성인이 아니라 어떻게 참되게 살았느냐에 따라 성인입니다. 생몰연대를 확인해 보니 성 비오 10세 교황님은 79세를 사셨고, 순교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25세를 사셨으니 교황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보다 세배 이상을 사신 셈입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나?’는 물음은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내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한다면 어느 시점에, 일년사계로 압축한다면 어느 계절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참 자주 인용했던 물음입니다. 이렇게 적용해보면 삶이 참 절실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저절로 하루하루 깨어 내적 깊이의 본질적 깊이의 삶을 추구할 것입니다.
어느 분의 기발한 생각에 공감한 일이 생각납니다. 코로나 시대 마스크는 침묵의 삶을, 거리두기는 고독의 삶을, 자주 손씻는 일은 회개의 삶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침묵과 고독, 회개의 삶을 통해 내적 깊이의 본질적 삶에 이르고 보이지 않는 내적 연대도 깊어질 것입니다.
가톨릭 굿뉴스를 여는 순간 책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미소는 나의 소명-아름답게 나이 들기 영성-”이란 제목에 나이 듦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대략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미소띤 얼굴로 노년을 살아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자발적 기쁨으로 섬김의 여정에 항구하며 늘 깨어 내적 깊이의 본질적 삶을 추구할 때 늘 미소띤 얼굴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두 성인도 이런 섬김의 삶의 모범입니다. 이미 살아서 성인으로 추앙 받았던 비오 10세 교황님에 관한 감동적 삶을 소개합니다.
-교황은 사목 표어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에페1,10)로 삼았다. 가난한 출신의 교황은 항상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으려고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라고 말할 만큼 가난을 사랑하였다. 교황은 종래의 호화스럽던 교황의 의식주의 상당부분을 생략함으로써 되도록 간단하고 검소하게 치렀다.
교황의 일과는 거의 매일 일정했다. 오전 4시에 일어나서 6시에 미사를 집전하였다. 8시 정각이 되면 바티칸 궁전의 2층에서 개인적인 연구를 하느라 책상에 있었다. 여기서 사사로운 알현을 받았다. 그의 큰 책상은 보통 문서와 서류들로 쌓여 있었고, 중앙에는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신부의 성상과 성녀 잔 다르크의 성상이 놓여 있었다.
정오에는 공식 회견을 했고, 1시에는 자신의 측근들과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잠깐 동안 막중한 의무와 책임으로 돌아오기 전의 휴식을 취했다. 저녁 식사는 9시에 이루어졌고, 그 이후에도 밤이 깊을 때까지 다시 일했다.”-
하루하루의 일과에 참으로 충실했던, 근면, 검소, 섬김의 삶이 몸에 뱄던 참 귀하고 아름다운 성인 교황이셨습니다. 섬김의 사랑과 겸손은 영성의 잣대입니다.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등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파스카의 영성, 바로 섬김의 영성뿐이겠습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그러니 수도자의 삶은 평생 섬기는 법을 배우는 여정중의 삶입니다.
아주 오래전 수도원 설립 초창기에 있었던 사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늦은 전화에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던 저에 대한 격렬한 항의에 즉시 사과했고 곧 이어진 깨달음이었습니다.
“아, 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구나! 섬김의 직무, 서비스업 말이다. 서비스업의 3대 요소는 1.사람이 좋고, 2.사람이 실력이 있어 유능하며, 3.환경이 좋아야 하겠구나. 서비스업인 음식점의 경우가 잘 들어 맞겠구나! 주방장의 인성이 좋아 친절히 환대를 잘하고, 음식 솜씨도 탁월하며, 식당내의 환경이 단순하고 넉넉 편안하다면 서비스업에는 최상일 것이다. 과연 주님의 서비스업에 속하는 여기 수도원은 세 조건을 갖췄는가?”
벼락같은 깨달음이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참으로 부끄럽게도 여전히 많이 부족한 섬김의 삶입니다. 그리하여 매일 강론을 써서 나누는 것 하나만이라도 섬기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적 깊이의 본질적 삶은 섬김의 삶, 하나뿐임을 역설하십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무지의 어둠을 밝혀주는 죽비같은 깨달음을 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세상 우상들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겸손과 섬김의 참 나를 살도록 일깨우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바로 삶의 중심인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과 형제들을 겸손히 섬기는 섬김의 여정에 항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어제 금요 강론중 어느 영성대가의 인터뷰시 고백에 공감했습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마라. 그것은 영성이 아니다. 나는 이 삶에서 비상한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결코 초자연적인 것들도 찾지 않았다. 옛 수도교부들도 똑같았다. 자기 착각. 자기 기만을 영성이라 착각하지 마라. 평범한 일상에 충실함이 제일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온갖 겸손중에 섬김을 실천해야 한다(We should carry out our service in all humility)’.”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섬김의 영성이 있을 뿐이며 섬김의 사랑과 겸손이야말로 성덕의 잣대입니다. 바로 이런 섬김의 모범이 제1독서의 주인공 룻입니다. 하느님 섬김과 이웃들 섬김이 하나로 표현된 룻의 참 겸손한 삶입니다. 다음 룻과 보아즈의 아름다운 만남과 대화에서 환히 드러나는 룻의 겸손한 섬김의 영성입니다.
-‘룻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생각해 주시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
보아즈가 대답하였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느님 구원 섭리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보시는 바, 종교나 국적이 아니라 섬김의 사랑과 겸손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보아즈의 만남을 통해 룻은 오벳을 낳았고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러니 이방 여인 룻이 나은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며, 우리 구원자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되니 하느님 구원 섭리의 손길이 참 오묘합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은 겸손과 사랑의 섬김의 사람을 당신 구원 섭리의 도구로 삼으심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128,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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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무릇 높은 사람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제1독서는 이방여인 룻이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된 일화를 발췌해 들려 줍니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룻 ,11)
이삭이라도 주워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들에 나간 룻이 "우연히" 보아즈의 밭에 이르게 되고, 보아즈는 룻에게 커다란 호의를 베풉니다. 이방인인 자기를 친절히 대하는 보아즈에게 룻이 겸손히 까닭을 묻자 보아즈는 룻의 사연을 "다 잘 들었"기 때문이라고 답하지요.
보아즈는 나오미와 룻에게는 히브리말로 '고엘', 즉 구원자 의무가 있는 친족입니다. 한 가족의 가장과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경제적인 지원이나 살해에 대한 복수, 혹은 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지요.
나오미와 룻의 경우에는 보아즈가 룻과 혼인하고 아들을 낳아서 이스라엘 가문에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아들이 두 여인의 노후도 책임질 수 있습니다.
"내가 다 잘 들었다."
지역의 유지이고 재산가인 보아즈가 이미 룻의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기근으로 고향을 떠났다가, 기구한 운명을 당한 채 베틀레헴으로 되돌아온 두 여인 중 하나는 노인이고 하나는 이방인이니, 친족으로서 안타까운 연민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는 자기 겨레와 부모를 두고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의 하느님 날개 밑으로 들어온 룻을 기특하고 고맙게 생각한 듯 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려지기를 바랍니다."(룻 4,14)
룻은 보아즈와 혼인해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이가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이지요. 보아즈가 품었던 가엾이 여기는 따뜻하고 관대한 마음이 구원 역사를 잇는 다리를 놓습니다. 세상 어디건, 어느 시대건 하느님의 마음을 품은 이들을 통해 하느님 구원의 역사는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구원자 제도를 가장 완전하게 실천하신 분은 다름아닌 예수님이십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민낯을 군중과 제자들에게 드러내십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즉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던 당시 종교 기득권자들이 스스로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지는 않으면서 많은 규제와 복잡한 조건으로 오히려 백성들의 어깨를 더 무겁게 한다는 사실을 직관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백성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고, 보아즈처럼 가난하고 기댈 곳 없는 이를 측은히 여기고 배려하는 연민을 지니지 못한 탓이겠지요. 짐짓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행동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 찬사받기만을 바라는 그들은 예수님 눈에 위선자에 불과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섬기는 이는 타인의 짐을 대신 져 줍니다. 고통의 무게를 덜어주고 나누며 함께하지요. 섬기는 이는 그를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을 대신해 그에게 손을 내미는 존재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고엘 제도가 혈연과 친족 관계 안에서 작동했다면, 예수님은 이를 사랑과 연민의 의무로 방향지어 주셨습니다.
"내가 다 잘 들었다."
우리 구원자 주님께서 다 잘 듣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짊어진 상처와 고통의 무게를 헤아리시고 경청하시며 마음 가득 연민과 자비를 품고 계십니다. 그분은 저 위 높은 곳에서 이래라 저래라 손가락질로 평가하고 명령하시지 않고, 가장 아래, 우리보다 더 아래로 내려와 우리를 섬기며 짐을 대신 져 주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랑을 말씀하시고 그 사랑을 실천하시는 주님께서 다 잘 듣고 계시니 우리 앞에 놓인 삶이 아무리 어렵고 지치고 버거워도 실망하지 말고 힘 내어 나아갑시다. 그리고 그분처럼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사랑이 되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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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말씀(마태23,1-36)의 시작'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시대 당시 백성들을 가르치는 사람들,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율법에 근거하여 옳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런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금 우리 가운데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일까?
그 대상은 아무래도 신자들을 가르치면서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사람들, 사제들이나 수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위선에 대한 책망이고, 더 넓게는 믿음과 삶이 다른 우리의 위선에 대한 책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좋은 말, 하느님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유튜브나 SNS를 통해 하느님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저도 7년 전부터 복음 묵상글을 나누고 있는데, 작년부터는 유튜브(생명의 샘)를 운영하시는 자매님의 제안으로 음성으로도 복음 묵상글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꼭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복음 묵상글을 통해 "이렇게 합시다! 저렇게 합시다!" 하고 늘 말은 하지만, 하루의 삶을 되돌아 보면 충실하게 살아내지 못한 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살아내신 예수님의 삶 앞에서 우리는 결코 교만을 드러낼 수도 없고, 드러내서도 안 되지만...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을 지금 여기에서 겸손하게 살아내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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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유다교 지도자들의 하느님 말씀에 대한 사랑은 놀랍기만 합니다. 양피지에 구약 성경의 핵심 구절(탈출 13,1-16; 신명 6,4-9; 11,13-21)을 적어 양피지로 만든 작은 갑에 넣습니다. 이것이 ‘성구갑’입니다. 이를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묶는데, 머리로 율법을 생각하고 왼팔 윗부분이 맞닿는 심장으로 율법을 사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또 겉옷의 네 귀퉁이에 흰 실과 푸른 실을 꼬아 술을 만들어 달았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주님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그대로 지키도록 하라는 말씀(민수 15,38-39 참조)에 따른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왜 심판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는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입법자인 모세는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을 만났고, 백성이 그분의 뜻을 법으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나는 ……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 그래서 내가 …… 내려왔다”(탈출 3,7-8). 유다인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백성의 울부짖음을 듣고 내려오셨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이는 우리 자신에게도 물어보아야 합니다.
장 바니에는 “하느님은 ‘파라클리토’라고 합니다”(『눈물샘』, 159면). 그리스 말인 ‘파라클리토’(Paracletos)는 ‘곁에’(para)와 ‘부르다’(kleo)가 합쳐진 단어로 일반적으로 보호자, 변호자로 번역되며 ‘곁으로 불려 온 이’, ‘부름에 응답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도움을 청하는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마치 아이가 엄마를 부를 때 이에 응답하여 파라클리토 엄마가 되듯이, 우리도 다른 이의 울부짖음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섬기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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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예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 해설가로 자처하며 그 지식으로 이익을 바라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기 때문에 자신들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이 있다. 이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된 자들(perusím)이라는 말에서 왔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실 때문이 아니라, 가르침을 생각하며 그들의 말을 따르라고 하신다. 즉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말만 할 뿐, 사람들에게 율법이라는 짐만 지워놓고 그 짐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자격도 없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이들의 허영심을 폭로하신다. 성구갑과 옷자락 술이 바로 그들이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지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옷자락 술은 율법을 잘 알고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해 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다. 그들의 유일한 옷자락 술은 예수님의 은총이었다.
그들은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6-7절) 교회 안에도 이런 성직자들과 봉사자들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들추어내어 그들을 꾸짖으셨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것들을 알 필요가 있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8절) 우리는 물과 영으로 새로이 태어났으며,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난(요한 1,13 참조)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12절)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봉사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세를 낮춘다는 것이다. 끝자리라는 것은 바로 봉사하기 위한 자리라는 것이다. 그 사랑과 봉사를 통해 하늘나라에서는 높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끝자리를 택하여 참으로 봉사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가르침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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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 12)
때 묻지 않은
가을이
우리에게
오고있다.
실천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의
시간이다.
생명의
참모습은
자신을
낮추는
사랑의
실천에
있다.
실천하는
삶이 섬기는
삶이다.
낮추고
비워야
기쁘게
실천할 수
있다.
삶의
아름다움은
바로 노력과
실천에 있다.
실천이
구원이고
실천이
회개이다.
사랑의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참된 실천은
우리의
뉘우침에서
시작되며
참된 실천은
낮추고
섬기는
우리의
사랑에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천의 뜨거운
가르침이다.
하느님을
높이는
실천의
하루이다.
실천이
참된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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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말과 행동이 하나되어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23,1-2) 율법 학자들은 회당의 ‘모세의 자리’에서 율법을 해석했습니다. 그 자리는 모세 율법의 권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해석하는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셨지만 그들의 언행불일치를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에 해박하였고 종교의 순수성을 열성을 다해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습니다(21,3). 그들은 율법에 권위를 두려고 사람들에게 무겁고 힘겨운 짐을 지우면서도 그들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23,4).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좋은 뜻에서 다른 이들에게 모범을 보이려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심을 과시하려고 겉모양을 꾸몄을 뿐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23,5) 그들은 하느님이 아닌 자신을 첫 자리에 두었던 것이지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눈이 아니라 인간의 시선을 의식한 그들은 교만에 빠져 사회적 명예에 집착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드러내기 좋아하고, 윗자리 높은 자리를 좋아하며,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으로 인정받기를 좋아했습니다(23,6-7).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23,11-12)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직무는 섬김이며(23,11), 서로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이야말로 제자다운 몸짓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돌아봅니다. 우리는 언행일치의 중요성을 잘 알면서도 입이 발을 앞서갑니다. 자신을 내놓기보다는 지키려 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말은 적게 하고 사랑으로 경청하며, 말의 무게를 행동으로 옮기도록 힘써야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입니다.”(성 프란치스코, 2신자 편지 52-52)
다음으로 무엇을 하든, 또 어떤 자리에서든 늘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해야겠습니다. 드러나야 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정받아야 할 것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으로 하느님을 드러내려면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작아져야만 할 것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될 때 하느님의 자리는 사라져버림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우리 모두 위선과 교만에서 벗어나,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를 추구하며 서로를 섬기는 수평적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하루가 되도록 헌신하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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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자신을 낮추는 이는.” (2017년 8월 26일)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구원사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 앞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적처럼 앙숙관계였던 모압의 여인, 룻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명예로운 가문이던 유다, 그것도 다윗 가계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사실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베틀레헴 여인들 앞서 한탄하며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셔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너무나 쓰라리게 하신 까닭이랍니다.”(룻 1,20)라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즐거움’, ‘행복’이라는 의미의 ‘나오미’로 부르지 말고 ‘쓰다’라는 의미인 ‘마라’로 자신의 이름을 바꿔서 불러달라고 한탄스럽게 말하지요.
그래서 그녀는 베틀레헴의 여인들에게 “주님께서 나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찌 그대들은 나를 나오미라 부르나요? 주님께서 나를 거칠게 다루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불행을 안겨 주셨답니다.”(21절)라고 자신의 처지를 또한 한탄합니다.
사실 아들이 죽은 며느리가 나오미에게는 말그대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기치로 남편의 친척인 보아즈와 룻을 부부로 맺어주면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줍니다.
룻은 오벳이라는 아들을 낳아 유다가문을 이어가게 합니다. 실의에 차 있던 나오미에게 동네 아낙네들의 칭송의 소리가 들려 옵니다. 본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웃 아낙네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이름은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4,17)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공공연하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실천이 없는 위선을 꼬집어 말씀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그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짐은 지워놓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완전한 사람으로 행세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기를 좋아하며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이고 잔칫집이나 회당에서 윗자리를 좋아하며 사람들로부터 존칭어인 ‘스승’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진실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많은 경우 우리는 위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위선은 악의 뿌리와 연결되어서 진실의 반대인 사실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사탄은 뱀의 형상으로 여인을 유혹할 때 자신이 지혜가 있고 여인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 주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 안에는 악의 세력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인을 파괴로 몰고 가면서도 여인을 하느님처럼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속은 그렇지 못한데 겉으로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 위해서 위선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주님께서 꼬집어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룻의 이야기에서 신앙인이 배워야 할 것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룻의 시어머니에 대한 효성으로 구원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신앙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언제나 희망을 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과 다르게 진실한 모습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겸손을 갖추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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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룻이 오늘 우리에게 남겨준 찬란한 덕행들: 극진한 효심, 한결같은 충절, 한없는 온유, 다정다감함!
신구약 성경 통틀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아름다운 장면이 어제 오늘 룻기를 통해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가련한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방인 며느리 룻의 모습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니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룻기 1장 16절)
또한 시어머니를 따라 물 설고 낯선 땅으로 따라온 룻을 어여쁘고 연민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흔쾌히 아내로 맞이한 보아르의 관대하고 자상한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룻기 2장 11절)
룻기를 통해 우리는 유다 공동체가 그리도 중요시 여겼던 순혈주의, 선민의식, 율법지상주의가 사실은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압 출신 여인들과 결혼한 나오미의 두 아들들, 그리고 남편과 사별한 이방 여인 룻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며 결혼한 보아르, 그리고 그 가문에서 탄생한 다윗왕...
결국 이방 여인들도 다윗 가문의 남자들과 결혼하였고, 구세사의 한 축을 당당히 구성한 것을 통해 순혈주의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구원은 보편적이라는 것, 유다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정통 이스라엘 사람들만 도구로 쓰시지 않고, 이방인들은 물론, 부당해 보이는 죄인들, 나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협조자로 선택하시는, 활짝 열린 개방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룻이라는 이방 여인이 오늘 우리에게 남겨준 덕행들과 자질들은 얼마나 가치 있고 찬란한지 모릅니다. 극진한 효심, 한결같은 충절, 한없는 온유, 다정다감함...
그녀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으로 인해 남편과 두 아들마저 떠나보낸 불운의 여인 나오미는 팔자를 펴게 되었고, 기울어져가던 이스라엘 가문이 다시금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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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기대하는 유일한 것, 그리스도의 품성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했던 말을 되풀이할 뿐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은 없었습니다.
대리자에게 중요한 것은 가르침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대리자의 자질 중에서 행실이 가르침보다 더 중요합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있는 사제에게 기대하는 것은 좋은 강론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의 성품일까요? 성품이 그리스도답지 않다면 가르침은 따르기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성품만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았다면 가르침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조사에서 신자들이 사제에게 바라는 사제상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강론 잘하는 신부, 기도 잘하는 신부, 겸손한 신부 중 어느 것이 1위였을까요? 1위는 겸손한 신부, 2위는 기도하는 신부, 3위는 강론 잘하는 신부였습니다. 가르침이 꼴찌이고 성품이 1위입니다.
신자들은 사제들에게서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우선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신학생들은 강론 잘하는 신부를 가장 바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지 않으면 말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도 우리나라에서 말을 가장 잘하는 사제와 이태석 신부님이 살아계신다면 이태석 신부님을 만나러 갈 것 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위치에 서면 신자들이 강론 잘하는 사제를 더 좋아할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은 교구 사제의 주보 성인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강론을 엄청나게 못 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공부 자체를 못 한 분입니다. 라틴어 때문에 사제가 못 될 뻔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항상 일주일 전부터 주일미사 강론을 글로 써서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이미 써 놓은 강론 원고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미사 시작할 때부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강론시간이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만 하고 앉았습니다. 더는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람들은 이 강론을 최고의 강론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거의 냉담하던 시골 마을에 온 비안네 신부는 하루에 17시간 정도를 고해소에 앉아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인품을 보았기 때문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것을 그리스도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하지만 인품이 바탕이 되지 않은 강론은 어떨까요? 아무리 멋진 강론이라도 신자들은 “신부님 말씀 잘하시네!” 정도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의 ‘교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아버지나 스승으로 불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를 ‘대리’하는 것이 아닌 ‘대치’하려 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인품을 먼저 닮으려 하지 않으면 그것은 대리자가 아니라 모세를 대치하려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 모세만큼 겸손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고 나옵니다.
미국의 한 개신교 교회에서 예배 시작 30분 전에 아주 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한 거지가 나타나 주변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오직 세 명만이 그 사람에게 간단하게 인사했을 뿐 어느 사람도 그 사람에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 사람은 맨 앞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당신은 앞에 앉을 수 없다면서 맨 뒷좌석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찬양이 끝나자 교회 장로님이 나와 새로 오신 담임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우리의 새로운 목사님은 예레미야 스피크입니다. 나오셔서 설교해주시겠습니다.”
모든 성도는 일제히 일어나 새로 오신 목사님을 환영하는 손뼉을 쳤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강대상에 없었습니다. 맨 뒤에서 냄새를 풍기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돈을 달라고 했던 그 거지가 강대상으로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으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았습니다. 박수 소리는 조금씩 사그라들고 웅성거렸습니다.
예레미야 목사님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내용은 마태오 복음 25장 34~40절 말씀이었습니다. 심판 때에 주님 오른쪽에 서게 될 사람들이 주님께서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성도들은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곳곳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오늘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모임을 보았지만, 하느님 자녀가 모인 교회는 보지 못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성도라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인품이 그리스도를 닮으면 말씀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품이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면 가르침도 변질합니다. 그리스도처럼 살지 못하면서 그리스도처럼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이 자기 삶을 합리화하는 것밖에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품 중 닮아야 하는 것은 온유함과 겸손입니다. 이 안에 가난도 포함됩니다. 마음이 인품입니다. 이것이 먼저 드러나지 못하는 강론이란 음식을 더러운 그릇에 주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에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거짓 모세의 대리자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제는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그분을 보여주고 그런 다음 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이지 그분의 가르침이 아닙니다.사람은 말을 듣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다면 차라리 그 순간에는 입을 다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기대하는 유일한 것은 유창한 말이 아닌 그분의 성품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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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전통이란 무엇일까요?
전통은 과거로부터 전해진 문화유산으로
꾸준히 문화유산의 재평가를 이루어지는 가운데
오늘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신념체계입니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이어오는 객관적 모습인 관습도 아니고
단순히 옛 것을 말하는 인습도 아닙니다.
공동체가 가치를 공유하는 가운데
오늘 가치를 담아 살아가려는 하나의 틀입니다.
그렇기에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재평가와 수정 보완이 필요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소중한 가치를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만약 재평가 없이 무조건적인 수용만 하거나
과거가 좋았다는 향수에 빠져 강요하게 된다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처럼 될 뿐입니다.
그들의 열정은 본받아야 할 정도지만
그들이 가진 신앙을 전통이 아닌
관습이나 인습으로 만들게 됩니다.
소중함이 과도하여 변질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지키고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신앙을 돌보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향해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한 신앙이 아닌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비오10세 교황을 통해
우리는 전통의 재평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세계 대전을 통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교황이 된 비오 10세는
교회를 개혁하며 전통에 대한 올바른 재평가를 하였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재정립하였고
전례를 개혁하며 의미를 더 많은 이들이 성체를 모시도록 하였으며
가톨릭 교리 문답을 완성하여 공통적인 기준을 세웠습니다.
또한 교회법을 개정하여 보편적인 교회법을 제정하고
교회 조직을 개편하여 세상 안에서 교회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교황님을 통해 교회의 전통은 수호되었지만
동시에 교황님을 통한 개혁에만 머물게 된다면
우리 신앙 생활은 또 하나의 인습이나 관습을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정신을 심화시키면서도
세상의 변화에 열린 자세로 꾸준히 성찰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하느님께 대한 기쁨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721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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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합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제일 먼저가 하느님 사랑이고 이와 동등하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급으로 간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급으로 왜 여기셨을까를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도 나옵니다. 나오미는 과부가 된 몸입니다. 두 며느리도 과부가 된 신세입니다. 시어머니는 두 며느리를 생각해서 자기 살 길을 찾아가라고 하였지만 오르파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말씀대로 시어머니와 이별을 하고 자기 갈 길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룻은 어떤 이유에서 그런지 시어머니와 함께하려고 합니다. 룻은 이미 시어머니의 신앙을 지켜봤을 겁니다.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와 같은 고백을 하는 걸로 봐서도 나오미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어땠는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룻은 단순히 시어머니의 신앙도 신앙이지만 인간적인 사랑이 더 우선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젊지만 늙으신 시어머니를 홀로 지내시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말하면 시어머니가 "자, 이제 우리와 함께 지내자." 하고 말씀을 하셨더라면 어쩔까 하고 고민이 됐을 수도 있습니다.
시대가 다르지만 요즘 같은 시대를 보더라도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모신다는 것은 왠만하면 다 회피하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그때 그 당시에는 그런 문화가 아니였더라도 주변 상황을 본다면 시어머니를 모시는 게 그녀들에겐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 덕이 될 일이 별로 없었던 상황임에도 룻은 시어머니를 봉양할 생각을 한 것은 참으로 기특한 며느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친정 어머니였다면 당연히 피를 나눈 부모님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있다고 하지만 룻은 달랐습니다.
룻이 만약 시어머니 품을 떠난다고 해도 그렇게 비난 받을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어머니의 뜻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룻은 단순히 세상 관습에 묶여서 자신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만이 시어머니를 선택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바로 연민의 정이었을 겁니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부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차이는 조금 늙고 젊고 그 차이였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과부의 몸으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인데 더군다나 늙은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더욱 힘든 상황이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외면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시어머니의 뜻에 따른다는 명분으로 회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걸로 보면 룻의 마음속에는 시어머니를 떠나서 따뜻한 인간애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게 인간의 사랑이고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룻의 마음을 어떻게 보실까 한번 생각해봅니다. 저는 아마도 룻은 시어머니를 생각하는 갸륵한 마음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동일하게 여기셨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비록 룻은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여기셨을 겁니다. 답은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나약하고 힘없는 이가 바로 예수님 당신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죄와 연관시켜서 이런 묵상을 한번 해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살면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게 쉬운 게 아닙니다. 천국에 가고 영생을 얻는 것은 부자 청년에서도 나오지만 아무리 계명을 잘 지킨다고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그보다 자신의 재산을 이웃을 위해 자선을 베푸는 것이 더 완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도 따지고 보면 사랑입니다.
수많은 계명보다도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늘나라에서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룻과 같은 사랑을 실천하는 게 가장 아름다운 사랑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을 하길 원하실 것입니다. 룻의 마음이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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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제1독서(룻기2,1~3.8~11;4,13~17)
"오늘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려지기를 바랍니다." (14ㄴ,ㄷ)
베틀레헴 아낙네들은 룻에게 아들을 낳게 하신 분이 바로 주 하느님이심을 알고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에 해당하는 '빠루크 예흐와'(baruk yehwa; praise be to the LORD)에서 '빠루크'(baruk)는 '축복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빠라크'(barak)의 수동태 분사로서 '축복을 받는', '찬양을 받는'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주님께서 찬미를 받으신다'는 뜻이다.
즉 베틀레헴 아낙네들은 나오미에게만 주님을 찬미하라고 명령하지 않고, 나오미와 더불어 주님을 찬송한 것이다. 룻이 아들을 낳은 사실이 그들에게도 커다란 기쁨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않게'로 번역된 '히쉬비트'(hishybith; has left without)의 원형 '샤바트'(shabath) 동사가 전치사 '민'(min)을 수반하지 않고 사역 능동형 완료로 사용되어 '끝나게 하다', '그치게 하다'는 뜻이 된다.
이 동사 자체가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에 앞의 부정어 '로'(lo)는 이 문장이 이중으로 부정된 상태임을 드러내어 강한 긍정의 표현이 된다.
즉 아낙네들은 후손이 없어 영원히 그 가문의 이름이 없어질 위기에 처했으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대를 이을 자가 생겨 기뻐하고 있는 나오미에게 부정을 통한 강한 긍정으로 축하했던 것이다.
한편 대를 이을 자가 구체적으로 보아즈인지 아니면 룻이 낳은 아들인지에 관해 의견이 많지만, 룻기 4장 14절 후반절과 15절의 내용이 룻이 낳은 아들에 관한 것임을 볼 때 후자로 이해된다.
그리고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한 축복의 말들은 룻기 1장 21절("나 아쉬움 없이 떠나갔는데 주님께서 나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찌 그대들은 나를 나오미라 부르나요? 주님께서 나를 거칠게 다루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불행을 안겨 주셨답니다.")과 상당히 대조된다.
룻기 1장 21절에서 나오미는 자신의 처지를 거의 절망적으로 표현했지만, 여기서 베틀레헴 아낙네들은 나오미의 그때의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말하고 있다.
한편 '이 아이의 이름'으로 번역된 '셰모'(shemo; his name)는 '그의 이름'이라는 뜻이며, '기려지기를 바랍니다'로 번역된 '웨익카레'(weiqqare; that may be famous)는 접속사 '와우'(wau)와 '부르다'는 뜻을 가진 '카라'(qara)의 단순 수동형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형이 결합된 형태로 '그리고 그가 불리워질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미완료는 화자의 염원, 기원을 나타내는 권유형이므로 '그리고 그가 불리워지기를 바라노라'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 나타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계약의 백성 모두를 지칭한다.
룻기 4장 11절의 보아즈에 대한 축복에서는 같은 지역인 '에프라타와 베틀레헴'이 언급되었으나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언급함으로써, 축복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베틀레헴 출신의 이스라엘 임금 다윗과 더 멀게는 온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과 '모든 계약의 백성'에게 끼칠 축복을 보여준다.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모세의 자리, 구약(모세오경)은 모두가 예수님의 이야기인 것이다.
(요한5,39-46) 39 너희는 성경(구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 구약에서 영생을 주시는 분을 깨닫고, 믿는 그 실행(킵)이 아닌 사람의 규정과 교리, 계명으로 받아 인간의 의로움, 영광 그 가치를 챙기는 행위, 그 행실을 따라 하지 말라 하시는 것이다.
(요한6,27)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 영생의 양식은 예수님의 길,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로 먹는 것, 믿는 것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 구약의 법에서 신약의 대속으로 살리시는 그 진리의 길로 옮기는 그 일을 하지 않는 것, 곧 예수님의 대속으로 용서 받아 거저 의롭게 되어 하늘의 생명을 얻는 그 후하신 하느님의 계명, 말씀을~ 용서받지 못하는 인간들의 규정(계명) 교리로 만들어 신앙이 짐이 되게, 그래서 온갖 질병, 곧 죄의식이라는 병을 치유하는데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인 것이다.
(골로1,13)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 보이는, 사람의 의로움을 위한 신앙을 산다는 것이다.
(로마8,24) 24 그러나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코린4,18) 18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히브11,1.3)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3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 율법학자, 바라사이파들의 육적 거만으로 거들먹거렸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들은 그런 유치한 사람들이 아니였다. 율법을 사람의 규정과 계명, 교리로 열심히 지킨, 그 자기 의로움, 영광이 큰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늘의 영생을 얻지 못하는 그 자기 의로움의 그들을 지적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마태5,20)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인간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것, 곧 차원이 다른 하늘의 의로움,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의로움이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 뿐이시다.
= 아버지는 한분, 흙의 그 없음의 존재인 나를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육의 생명을 창조하신 그 하느님 아버지 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 인간의 의로움이 아닌 구원을 위한 하늘의 의로움을 주시는, 그 가르침을 주시는 실체이신 그리스도 이신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내게 거저주신 하늘의 의로움, 곧 십자가의 복음을 이웃에게 알려주는 그 섬김인 것이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자기 의로움을 고집하면 낮아지고, 그 자기 의로움이 구원의 가치, 능력 없음을 깨닫고 인정하는, 그 자기 부인, 버림을 하면 높아지는 것이다. 그것이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참 길인 것이다.
주님~! 내 뜻을 높이 세우려는 그 고집, 아집의 우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내 뜻을 낮추는 그 낮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천주의 성령이시여! 의탁하나이다. 아멘.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복음(마태23,1~12)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5)
마태오 복음 23장 5~7절까지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외적인 경건 과시(5절),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과 끝없는 명예욕(6절),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얻고자 하는 마음(7절)에 대한 대표적 예이다.
'성구갑'으로 번역된 '퓔라크테리아'(phylakteria; phylacteries)의 원형 '퓔라크테리온'(phylakterion)은 모세 율법 중에서 탈출기 13장 1~10절, 11~16절, 신명기 6장 4~9절, 11장 13~21절 등의 네 부분을 작고 긴 양피지 조각에 기록하여 그것을 작은 상자 속에 봉해 넣은 것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네 손에 감은 표징과 네 이마에 붙인 표지로 여겨라'는 말씀(탈출13,16; 신명6,8)에 근거하여, 위의 네 부분의 율법의 구절을 기록한 경문을 넣은 성구갑을 이마와 왼팔에 가죽끈으로 고정하여 틈나는 대로 보면서 경건에 힘썼던 것이다.
마태오 복음 23장 5절에서 '넓게 만들고'에 해당하는'플라튀누신'(platynusin; they make wide; they make broad)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도록 그 성구갑의 크기를 크게 한다는 뜻이다.
시행 초기인 바빌론 유배 포로기 직후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한 순수한 목적으로 성구갑을 달고 다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경건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달고 다녔다.
과시욕이 지나치다 못해 어떻게 하면 더 크게 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한편, '옷자락 술'로 번역된 '크라스페다'(kraspeda; the tassels of their garments)의 원형 '크라스페돈'(kraspedon)은 '망토 또는 외투의 가장자리에 털실을 꼬아 매달리게 장식한 작은 부속물'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민수기 15장 37~40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흰색과 청색 실로 짠, 이와 같은 부속물을 겉옷의 가장자리에 매달았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실천하게 하는 기능을 하며, 마음과 눈이 쏠리는 데로 욕심을 따라 방종하게 살아 배신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해 주었다(민수15,39).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러한 율법의 정신을 따르려는 마음보다는, 단지 사람들에게 자신을 거룩하게 보이려는 열망으로 '옷자락 술'을 더 크게 만들어 그것을 즐겨 입고 다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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