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모를 감동시킨 효자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 이이(1536년-1584년)는
강릉 북평촌 외갓집 오죽헌에서 사헌부 감찰사 이원수 공과 신사임당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율곡(栗谷)이다.
율곡은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외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외할머니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어머니 사임당은 둘째였다.
율곡은 다섯 살 때 어머니와 함께 서울의 친가로 갔다.
2년 후에는 고향인 경기도 파주의 율곡으로 가서 살았다.
그동안 율곡은 어머니의 지도로 <사서삼경>과 시문(詩文) 등을 읽고, 불교서적까지 두로 섭렵하였다.
열두 살 때에 진사시에 가장 어린 나이로 합격하였다.
열여섯 살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의 학문과 인격형성을 위해 정성스러운 교육을 행한 신사임당의 죽음은 그에게 ‘죽음과 삶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주었다.
3년상을 치른 그는 금강산의 한 절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그러나 <논어>를 읽고 깨달은 바 있어, 외가로 가서 열심히 유학을 공부하였다.
스무 살 되던 해 봄에는 한성시(漢城試-한성부에서 실시한 과거시험의 첫 관문)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이듬해 9월에는 다섯 살 아래인 성주 목사(牧使-관찰사 아래에서 목을 맡아 다스린 정3품 외직 문관)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하자 율곡은 김씨를 소실로 맞았으며, 그녀 역시 생산을 못하자 다시 이씨를 맞았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비로소 아들을 보았고, 이어 곧 딸이 태어났으며
또 둘째 부인의 몸에서 다시 아들을 하나 더 보았다.
스물두 살 되던 해 봄에는 성주의 처가로부터 강릉의 외가로 가는 도중에 퇴계를 방문하였다.
당시 퇴계는 원숙한 노대가였고 율곡은 홍안(紅顔)의 청년이었다.
이틀 동안 토론하는데, 퇴계는 율곡의 박식함을 칭찬하면서
“후생들이 가히 두렵구나.”(後生可畏-후생가외)라고 말했다고 한다.
서울로 올라온 율곡은 그해 겨울 별시(別試-정규 과거 외에 임시로 시행된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거머쥐었다.
이때 시험관이었던 정사룡과 양응정은
“우리는 여러 날 애써 생각해야 할 문제를 율곡은 짧은 시간에 이토록 훌륭한 답을 써냈으니, 과연 천재로다.”
라고 감탄하였다. 뒷날 이 논문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명나라 학자들까지 놀랐다고 한다.
율곡은 과거시험에서 아홉 차례나 장원으로 급제하였기 때문에,
‘9도 장원공’
으로 불리었다.
그의 첫째형은 일찍 죽었는데, 그 때문에 율곡이 형수와 조카를 보살펴주었다.
그런데 벼슬을 하지 못한 둘째형은 율곡에게 마구 잔심부름을 시키곤 하였다.
제자들이 보다 못해
“선생의 신분으로서, 그것은 지나친 공손이 아닐까요?”
라고 하였다. 그러나 율곡은
“부형(父兄) 앞에 벼슬의 지위가 무슨 상관이냐? 부형 앞에는 지나친 공손이란 있을 수 없다.”
하며, 조금도 꺼리지 않고 몸소 시중을 들었다 한다.
또 율곡의 계모(繼母)는 성품이 고약하였던가 보다.
조금이라도 비위에 거슬리는 일만 있으면, 문을 닫은 채 늦도록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때면 율곡이 문밖에 공손하게 앉아, 마음을 풀도록 애원하였다.
또 계모는 술을 좋아하여 아침 해장술을 들고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율곡은 항상 약주를 따뜻하게 데워가지고 가서 권하였다.
이러한 정성에 감동한 그녀는 마침내 착한 사람이 되었고,
율곡이 먼저 죽자 그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하여 3년상을 입었다고 한다.
■ 십만양병설
당시 조정에서는 붕당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종직 학파의 계통을 이은 김효원의 집이 동대문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집에 모이는 사람들을 동인(東人)이라 부르고,
인순왕후 심비(조선 제 13대 명종의 비. 선조가 즉위한 직후 잠시 수렴청정을 함)의 세력을 등에 업은 심의겸의 집이 서대문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모이는 사람들을 서인(西人)이라 부르면서
이른바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생겨난 것이다.
동인들은 주로 젊은 신진세력이었고, 서인은 대개 연로한 사대부들이었다.
율곡은 조정이 분열되는 것을 크게 걱정하여 임금에게 탕평책을 쓰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김효원은 함경도의 부령부사로, 심의겸은 개성유수로 전근해갔다.
그러면서 임금은 율곡에게 모든 탕평책을 일임하였다.
율곡은 양쪽으로부터 초연하여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동서화합에 온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다 서인 중에 송강 정철을 비롯한 율곡의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동인 측으로부터 그가 서인을 옹호한다는 의혹을 받기도 하였다.
사실 율곡은 현명한 학자로서, 임금의 총애를 많이 받긴 했다.
그러나 과감한 정치가는 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조정은 당파싸움에 들끓고 임금은 임금대로 후궁에만 빠져있으니,
이것을 보다 못한 율곡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릉으로 내려가고 만다.
그러나 북으로는 여진족이 호심탐탐 조선을 노리고
남으로는 왜구가 노략질을 일삼는 데도 조정은 여전히 붕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율곡은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고 나선다.
유성룡이 도승지로, 율곡이 국방정책을 총괄하는 병조판서로 있을 때였는데,
서울에 2만 명, 각 도(道)에 1만 명씩의 군사를 양성하여 배치하라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종8품 정도의 벼슬에 머물러있던 이순신을 천거하면서
“장차 3한(三韓-한반도의 남부지방)을 구제할 인물입니다.”
고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이 이러한 건의를 묵살하였던 바, 결국 율곡이 죽은 지 8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때서야 유성룡은
“율곡이야말로 참으로 성인(聖人)이시다.”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송강 정철에게
“사람을 쓰는데 파당을 가리지 말라”
고 당부한 이튿날, 선조 17년(1584년) 1월 16일 새벽이었다.
율곡은 손톱을 깎고 몸을 씻은 다음, 조용히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의건(衣巾)을 바로 잡은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마흔 여덟이었는데, 집안에 남은 유산이라고는 부싯돌 한 개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의 부음을 들은 임금의 통곡소리가 밖에까지 들렸고,
그의 출상 날에는 골목마다 사람들의 곡하는 소리가 진동하였으며, 밤에는 시민들이 치켜든 횃불의 불빛이 서울 교외 수십 리 밖에까지 비쳤다 한다.
퇴계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이 일종의 관념론이라면,
율곡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은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은
“무릇 일어나게 하는 것은 이(理)이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기(氣)이다.
사단(四端) 역시 기가 일어나, 기가 그것을 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 주장하였다. 퇴계의 영남학파와 율곡의 기호학파(畿湖學派)는 서로 대립하여 쌍벽을 이루었던 바,
퇴계가 금욕주의를 부르짖은 데 대하여, 율은 최소한의 물질적 욕구를 인정하였다.
“먹어야 할 때 먹고, 입어야 할 때 입는 것은 성인(聖人)이라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의 냉철한 현실인식과 여러 가지 처방은 후에 실학(實學)의 모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