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미 더 스포츠-192]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간은 누구일까?' 이 단순해 보이는 질문에 대다수는 지금은 은퇴한 우사인 볼트를 꼽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볼트는 2009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100m에서 9초58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10년이 지났지만 그의 기록을 깨기는커녕 근접한 선수도 나오지 않고 있다. 육상 100m 경기는 0.01초 이하의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볼트를 제외한 다른 선수가 세운 가장 빠른 기록은 9초69다. 볼트의 기록과 0.11초가 차이 난다. 9초58이라는 기록이 얼마나 독보적인지를 보여주는 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간이 누구일까'라는 문장에는 빠져 있는 게 있다. 바로 거리에 따른 기준이다. 이 질문에 답을 함에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100m라는 육상 최단거리를 가정하고 답을 생각한다. 하지만 육상 필드 종목에는 다양한 거리의 세부 종목들이 있다. 100m에서 42.195㎞의 마라톤까지 각각의 세부 종목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들은 종목만큼이나 그 수가 많고 다양하다. 엄밀히 얘기하면 그들 모두가 자신의 종목에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간'이다.
100m와 더불어 육상 세부 종목 중 가장 대표성을 띠는 종목으로 마라톤을 꼽을 수 있다. 마라톤은 42.195㎞를 누가 가장 빨리 달리는지를 겨룬다. 2시간 이상이 소요되며 지구력과 순발력, 스피드가 모두 요구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육상의 꽃, 나아가 스포츠의 꽃으로 마라톤을 꼽는다.
육상은 기본적으로 기록 경기다. 대회별로, 또 레이스별로 순위도 물론 중요하지만 기록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 특히 100m와 마라톤의 세계신기록은 늘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아왔다.
100m는 아이러니하게도 우사인 볼트의 등장과 퇴장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육상팬들의 관심이 줄어들었다. 워낙 짧은 거리에서 경쟁하는 종목인 만큼 기록 단축도 어렵거니와 볼트가 워낙 압도적인 기록과 퍼포먼스를 보였기 때문에 볼트와 볼트의 기록을 능가할 선수가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상대적으로 낮다. 세계신기록에 대한 기대치 또한 당분간은 '이 정도(9초58)면 충분하지'라는 심리가 깔려 있는 게 사실이다.
반면 마라톤은 최근에 매우 '핫(hot)'하다. 마라톤 공식 세계신기록은 2시간1분39초다.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2시간 벽이 코앞에 다가왔다. 마라톤은 100m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긴 거리를 뛰기에 기록의 단축 폭이 상대적으로 크고, 그 때문에 기대감 또한 높은 게 사실이다. 그리고 지난 10월 12일 마침내 인류는 마라톤 2시간 벽을 깨내고 말았다.
▲ 케냐 마라토너 엘리우드 킵초게(35)가 12일(현지시간)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열린 'INEOS 1:59 챌린지' 마라톤 경주에서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그는 1시간59분40.2초를 기록, 인류 사상 최초로 42.195㎞의 마라톤 풀 코스를 2시간 안에 완주했다. /사진=빈 신화, 연합뉴스
세계신기록 보유자이자 현존하는 최고 마라토너인 엘리우드 킵초게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INEOS 1:59 챌린지' 마라톤 경기에서 1시간59분40초의 기록으로 인류 최초로 1시간대에 마라톤 코스를 주파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42.195㎞라는 거리를 제외하고는 국제육상연맹(IAAF)이 정한 여러 공식 기준들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킵초게 그리고 나이키를 비롯해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여러 관련 기관에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2시간이라는 '시간'에 집중했고, 이를 위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기록 달성과 함께 세계 언론들은 대서특필하며 이 사실을 알렸다. 비록 비공인 기록이라는 꼬리표도 함께였지만, 세계에서 가장 빠른 마라토너인 킵초게가 실제로 42.195㎞를 달려서 만들어낸 기록만큼은 분명했다.
'INEOS 1:59 챌린지'가 성공적으로 끝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와 관련한 다양한 의견과 토론은 진행 중이며, 킵초게의 스폰서인 나이키가 특수 제작한 신발에 대한 관심과 논란이 특히 크다. 급기야 IAAF는 이 마라톤화가 부정한 보조기구인지를 조사하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논란이 커질수록 이 특수 마라톤화에 대한 호감도는 증가하고, 나이키의 브랜드 가치는 더욱 올라간다는 점이다. '줌엑스 베이퍼플라이(ZoomX Vaporfly)' 계열로 알려진 킵초게의 러닝화는 분명 기록 수립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는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어느 정도 실증적으로 입증되기도 했다.
하지만 킵초게가 2시간 벽을 돌파한 것은 레이스 당일의 온도, 습도, 기압, 바람의 세기, 코스의 고도 및 환경 등 자연적 요소들과 더불어 페이스메이커, 코스 안내 레이저빔, 효율적인 음료 공급 등과 같은 최적의 지원들이 어우러진 결과다. 물론 회귀분석을 통해 각각의 요소 가치를 구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하나의 요소만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나이키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킵초게만큼이나 승리한 셈이 되었다. 마라톤 2시간 벽 돌파와 함께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도움을 준 브랜드임을 전 세계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알렸기 때문이다.
▲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7일째인 2일 오후 대구 스타디움에서 열린 남자 200미터 준결승전에서 1위로 들어온 우사인 볼트가 방송 인터뷰 도중 팬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사진=매경DB
나이키와 아디다스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푸마는 세계 최고의 스프린터 우사인 볼트의 등장과 함께 극적으로 재기했다. 각종 대회에서 우승한 후 신고 있던 푸마 운동화를 보여주는 볼트의 세리머니는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광고 그 자체였다. 그리고 지금 볼트와는 또 다른 의미의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간' 킵초게는 나이키를 신고 달리고 있다.
다른 제품이나 서비스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실제로 그것들이 얼마나 역할을 하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어떻게 포장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알리느냐가 더 중요하다. 어쩌면 그게 마케팅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