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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4) 루카 조르다노의 ‘성 카를로 보로메오와 성 필립보 네리의 만남’
16세기 교회 재건과 개혁 이끌며 고군분투한 두 성인
- 루카 조르다노, ‘성 카를로 보로메오와 성 필립보 네리의 만남’(1704년), 지롤라미니 성당, 나폴리, 이탈리아.
1527년 로마 약탈은 목자가 정신줄을 놓으면 양 떼는 늑대들의 공격을 받는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달리 말하겠지만, 처참한 상황을 겪은 로마 처지에서는 그렇게밖에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바오로 3세 교황(재임 1534~1549)의 등장과 트렌토(트리엔트) 공의회 개최, 뒤이은 율리오 3세, 바오로 4세, 비오 4세 교황을 거치면서 교회의 본격적인 개혁이 진행되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트렌토 공의회는 가톨릭 신앙과 교회의 규율에서 다른 어떤 공의회보다도 폭넓고 깊은, 우리 시대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공의회였다. 물론 그리스도교 일치를 도모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라틴 국가들에서 교회를 구하는 데는 아슬아슬하게 성공했으나 북유럽은 이미 너무 멀리 나가버렸다.
서구 그리스도교는 신앙적으로 심하게 분열되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 교리는 중요한 결정적인 부분에서 명확해졌고 분명해졌다. 칙령들을 시행하는 데 있어 개별 국가에 따라 적용 범위를 달리했어도, 공의회가 “가톨릭교회의 쇄신/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재생적이고 창조적인 힘이 발산된 것은 분명했다.
비오 4세 교황은 이런 공의회 개혁의 선봉에 섰고,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개혁자들은 그에게 암살을 시도했다. 겨우 목숨을 건져 로마에 당도한 교황은 그 충격으로 병이 들고 말았다. 참으로 고단하고 힘든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마무리하고, 다시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는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카이며 밀라노의 대주교 카를로 보로메오와 로마의 살아 있는 성자(聖者)로 불리던 필립보 네리가 교황에게로 달려갔다. 두 사람은 교황의 임종을 도왔고, 비오 4세는 두 성인의 품에서 1562년 12월 9일 밤 선종했다. 그의 무덤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로마시 공화국 광장의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있다.
트렌토 공의회는 이렇게 비오 4세의 삶과 함께 마무리되었고, 이제 남은 과제는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교회의 모든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성인들이었다. 그중 비오 4세의 임종을 도왔던 카를로 보로메오와 필립보 네리는 이탈리아 교회 쇄신의 주춧돌이었다.
교회 쇄신의 기틀 마련에 열정 다해
먼저, 성 카를로 보로메오(San Carlo Borromeo, 1538~1584)는 1500년대 가장 힘든 시기에 밀라노의 대주교로 있으면서 교구 개혁의 선두에 섰던 분이다. 지금도 밀라노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하는 두 주교를 꼽으라면, 암브로시우스와 보로메오를 들 정도다. 처음 보로메오는 외삼촌인 비오 4세에 의해 1563년 6월 사제품을 받고, 그해 12월 주교로 서품돼 입방아에 올랐으나, 그것을 만회하려는 듯 교회의 영광을 위해 분골쇄신했다. 그는 성직에 입문하기 전에 이미 파비아대학교에서 시민법과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한 상태였다. 학자의 자질을 인정받아 비오 4세와 후임인 비오 5세의 교황청 고문 요청을 받지만 이를 거절하고, 밀라노대교구로 돌아와 지난 80년간 공석 상태였던 교구를 일으켜 세우고, 자기에게 맡겨진 양 떼를 돌보았다. 교구 행정을 정비하고 교구 시노드를 소집하며, 사목 방문을 정례화했다. 그는 가톨릭교회가 무질서하고 나태해진 것은, 무지하고 게으른 성직자들 때문이라며, 훌륭한 사제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세우고, 수도단체들을 지지했다.
보로메오는 종교개혁을 보면서 튼튼한 평신도 학자 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해 학술협회를 세우고, 모교인 파비아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교에 가문의 유산을 기부, 평신도 학자 양성에 힘썼다. 신자들의 신앙심 고취를 위해 신앙 재교육 시스템을 만들어 운영한 덕분에 이후, 가장 많은 선교사가 배출돼 세계로 나갔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트렌토 공의회에서 결정한 교회 개혁과 쇄신의 기틀을 마련하고, 공의회에 참여하여 저 유명한 「트리엔트 교리문답」을 초안 감수, 발간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1576년 흑사병이 밀라노를 강타했을 때 귀족들까지 모두 도망간 상태에서도 그는 끝까지 밀라노에 남아 성사를 주고 식량을 나눠 주며, 예방법을 알렸다. 뜨거운 사목자로서 그의 열정은 1584년 11월 3일, “주님, 제가 여기 대령했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46세로 선종하는 순간까지 활활 타올랐다. 그의 유해는 밀라노 대성당 중앙 제단 아래에 있고, 1610년 바오로 5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설교와 영적 지혜로 사람들 어루만져
성 필립보 네리(San Filippo Neri, 1515~1595)는 약탈(1527년)로 초토화된 로마를 보며, 말보다 행동으로 이웃을 돌보고, 무너진 로마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피렌체의 유명한 네리(Neri) 가문 출신으로 친모가 5살 때 사망하자, 부친이 알렉산드라라는 여성과 재혼했는데 그녀의 깊은 사랑 덕분에 필립보는 구김살 없이 사랑 많고 친절하고 명랑한 ‘착한 피포(Pippo)’로 자랐다. 피렌체에 있던 어린 시절에는 부친과 산마르코의 도미니코수도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533년, 학업을 위해 로마로 가서 피렌체 출신 지인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있으며, 로마대학과 성 아우구스티노회 콜레지움에서 철학과 신학을 마쳤다. 이후 거리와 시장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는 숱한 참사를 겪으며 신앙생활을 등한시했던 로마인들에게 신성한 감동을 주었다. 1548년에 그는 자신의 고해사제 페르시아노 로싸 신부와 함께 ‘삼위일체의 형제회’를 설립해, 로마로 순례 오는 순례자를 맞이하고 순례 영성을 고취했다. 1551년 로마 백성의 요구에 따라 36살의 늦은 나이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신자들을 ‘오라토리오(Oratorio)’라고 하는 작은 방에 모아놓고, 영적 권고와 고해성사를 주었고, 훗날 그가 설립하는 ‘오라토리오회’의 근거가 되었다. 1564년 5명의 제자가 사제품을 받으면서 기도 모임으로 시작한 오라토리오회는 1575년에 공식 승인을 받았다.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은 그에게 발리첼라(Vallicella)의 산타 마리아 성당을 주었고, ‘키에사 누오바(Chiesa Nuova, ‘새 성당’이라는 뜻)’로 단장하여 오라토리오회 본원으로 삼았다.
그의 뛰어난 영적 지혜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혜안으로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힘없는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영적, 물적으로 도와주었다. 누군가는 그를 ‘신비가’로 알고 있을 만큼 깊이 있는 기도와 영적 체험을 한 성인으로도 유명하다. 로마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교황과 추기경은 물론 권력자들과 일반 시민들의 깊은 존경을 받았다. 하느님을 향한 타는 영적 목마름과 백성을 향한 측은지심은 자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해성사와 십자가를 들 만큼 뜨거웠다. 1595년 5월 25일 79세로 선종했다. 무덤은 키에사 누오바에 있다. 1622년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나폴리의 거장
소개하는 작품은 트렌토 공의회 정신을 삶으로 살아낸 두 성인이 만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나폴리 출신의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 1634~1705)가 그렸다. ‘성 카를로 보로메오와 성 필립보 네리의 만남’(1704년)이라는 이 작품은 현재 나폴리 지롤라미니 성당 내, 성 카를로와 필립보 소성당의 제단화다. 같은 장소에 같은 작가가 그린 ‘카를로와 필립보의 기도’, ‘카를로가 필립보 앞에 무릎을 꿇음’도 있다.
루카 조르다노에 대해서는 앞서, 이 코너를 시작하는 첫 작품 ‘세네카의 죽음’을 소개하면서, 그것을 그린 작가로 간략히 소개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은 1703년 조르다노가 사망하기 2년 전에 지롤라미니 오라토리오회 사제단에서 노(老) 거장에게 주문했다. 사제단은 이후 “나폴리에서 루카 경에 버금가는 붓놀림은 볼 수 없을 것”이라며, 거장의 수작 중 하나로 꼽았다.
그림 속으로
작품의 배경은 교황궁이 아니라, 로마 발리첼라의 산타 마리아 성당 공사장이다. 그러니까 비오 4세가 임종할 당시에 만난 것이 아니라, 이후에 만난 것이다. 비오 4세가 선종한 후 비오 5세를 거쳐 그레고리오 13세가 산타 마리아 성당을 필립보의 오라토리오회에 주었고, 그 후 ‘키에사 누오바’로 바꾸는 공사를 했으니까 시간적으로도 한참 후가 된다. 카를로가 다시 로마를 찾았을 때, 필립보가 있는 키에사 누오바 성당 공사가 한창인 곳으로 온 것이다. 그것도 성당 건축에 보태라며 은색 접시에 금화를 수북이 담아서 가지고 왔다. 참 반가운 일이다. 색의 혼합과 구성과 음영 처리가 탁월하다는 평을 받은 작품이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5) 피에르 쉬블레라의 ‘환자를 구하는 성 가밀로’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도 힘있게 병자를 둘러업은 성자
- 피에르 쉬블레라, ‘환자를 구하는 성 가밀로’(1746년), 로마, 브라스키궁 소장.
트렌토 공의회로 교회가 세상 안에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노선과 방향이 확정되자, 교회의 모든 지체가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위에선 교회 행정에서부터 재정비가 시작되었고, 아래서는 인문주의, 휴머니즘을 실천하는 많은 성인이 나와 ‘성인들의 시대’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1500년대 초가 혼돈의 시대였다면, 1500년대 후반은 ‘성인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시대가 성인을 만든다고 했던가!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성인이 나왔다. 앞서도 언급한 적 있지만, 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니, 성녀 안젤라 메리치, 성 가에타노 다 티에네, 하느님의 성 요한, 성 이냐시오 로욜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필립보 네리,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성 가를로 보로메오, 성 루이지 곤자가, 성 알렉산드로 사울리, 십자가의 성 요한, 성 베드로 카니시오 등 참으로 많다. 유럽의 진흙탕 속에서 탄생한 성인들은 유럽 안에서는 물론, 세계로 나가 이전 시대에 발전한 유럽의 인문주의 휴머니즘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오늘 소개하는 성 가밀로 데 렐리스(San Camillo de Lellis, 1550~1614)도 그중 한 사람이다.
가밀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가밀로는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초 부키아니코 마을의 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를 낳았을 때, 어머니의 나이가 거의 60세였고, 그래서 어머니의 이름 가밀라(Camilla Campellio)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가밀로가 13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사망했다. 아버지는 스페인 정부 소속의 장교였다. 어린 시절 가밀로는 게으르고 싸우기를 잘했던 말썽꾸러기였다. 아들의 장래를 걱정한 아버지는 본인이 잘 아는 군대에서 경력을 쌓도록 했다. 그러나 가밀로는 족염증으로 곧 군대를 떠나야 했다. 치료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로마에 있는 불치병 환자들의 성 야고보 병원(l‘Ospedale di San Giacomo degli Incurabili)으로 가야 했다. 병이 치료되자 병원에 남아 급사로 취직해서 일했으나, 일도 못 할뿐더러 오히려 방해되는 바람에 곧 해고되고 말았다. 그 사이에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군인이 되어 베네치아와 스페인을 위해 일했다. 하지만 곧 예전처럼 무질서하고 나태한 생활로 돌아갔다. 가산을 탕진하고 이탈리아를 떠돌며 방랑객으로 살다가 만프레도니아의 카푸친 수도회에서 받아주자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산 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에 들렀다가 다시 만프레도니아로 되돌아가는 중에 ‘지옥의 계곡(Valle dell’inferno)’ 근처에서 깊은 회심이 있었다. 1575년 2월 2일이었다. 이후 진심으로 수도 생활에 몰입했으나 발에 생긴 오래된 염증이 다시 속을 썩여 로마로 가야 했다.
병원 치료를 받으러 로마로 가면서, 신분을 종으로 바꾸었다. 성 야고보 병원에서 4년간 겸손하게 일하며 병자들을 돌봤다. 거기서 자신의 성소를 느끼고 병자들 곁을 지키느라 카푸친 수도회는 잊고 있었다. 그의 삶은 이미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러자 “오직 하느님 사랑 때문에, 병자들을 위해 자기를 내어놓을 선한 사람들”을 찾았다. 그를 따르는 동료가 생기기 시작했고, 다섯 명의 동료가 나오자 함께 병자를 돌보는 데 생명을 바치기로 하고 1582년 8월, ‘병자들의 성직 동반자회(Compagnia dei Ministri degli Infermi)’를 설립했다. 그는 시스티나 병원(훗날 ‘사씨아의 산토 스피리토 병원’이 됨) 옆에 있는 막달레나 수도원에 자리를 잡고, 성 야고보 병원보다 규모가 큰 시스티나 병원에서 봉사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 야고보 병원도 죽을 때까지 인연을 이어가며, 환자들을 돌봤다. 그는 환자들의 요청으로 필립보 네리의 영적 지도를 받으면서 공부하여, 1584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가 마련한 첫 회칙은 1586년 식스토 5세 교황이 승인해 주었다.
붉은색 십자가를 댄 검은색 수도복의 활약
1590년 로마에 기근이 들었을 때, 동반자회(Compagnia)는 힘을 발휘했다. 죽어가는 병자들 곁을 지키며 그들을 그리스도로 섬기는 동반자회의 놀라운 영웅적인 활동에 그레고리오 14세 교황은 크게 감동했고, 이듬해(1591년)에 교서 「그분의 양들을 위해(Illisu qui pro regis)」로 ‘동반자회’에서 ‘병자들의 성직 수도회’로 정식 승인했다. 가밀로와 그의 첫 동료들은 삼대 수도 서원과 함께 네 번째 서원으로 “위험한 상황에서도 병자들을 돌본다”는 서원을 하나 더 넣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새로운 수도회가 가톨릭교회의 아들로 탄생했다.
수도회는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로 신속하게 확산했고, 가밀로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공동체를 나폴리, 밀라노, 제노바, 팔레르모, 볼로냐와 만토바에 세웠다. 그는 1614년 7월 14일, 사망할 때까지 병자들을 돌보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는 형제들에게 붉은색 십자가를 가슴에 댄 검은색 수도복을 입도록 했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알려 전쟁이건 재난 상황이건, 그 옷을 입은 사람은 긴급구조대원이고 희망의 징표임을 보여주었다. 이후 그들은 설립자의 이름을 따서 “가밀리아니(Camilliani)”라고 불렀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활동했다. 병원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달려가 임종을 도왔다. 그들은 설립자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가슴에 새겼다. “병자와 가난한 사람은 ‘주님의 사람’입니다”. 가슴에 붉은색 십자가를 단 사람들은 병원에서 주는 소임을 거부하고 오로지 환자에게만 집중했다. 신앙과 학문으로 무장하여 사제로서, 의사로서 활동했다. 가밀로는 병자들의 ‘형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아낌없이, 기쁘게 내어주는 ‘어머니’가 될 것을 주문했다. 그것을 남은 생을 다해 보여주었다. 그가 사망할 때 수도회 형제는 322명이었다. 그러나 30년 후, 많은 성소에도 불구하고 307명으로 오히려 줄었다. 그것은 가밀로의 바람대로 전염병의 강타에도 형제들이 침상에 있는 병자들과 운명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역사화가이자 초상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프랑스 화가 피에르 쉬블레라(Pierre Subleyras, 1699~1749)가 그린 ‘환자를 구하는 성 가밀로’(1746년)이다. 1598년 12월 24일 성탄 전야에, 테베레 강이 범람하여 강변에 있던 시스티나 병원으로 물이 덮치자 병자들을 구하고 있다. 캔버스에 유화 작품으로는 크기가 상당히 큰 172×248cm 작품이다. 로마 박물관 브라스키궁(Palazzo Braschi)에 있다.
당대 최고의 역사화가, 초상화가라는 평을 받았던 쉬블레라는 예술가였던 아버지 덕분에 27살이던 1726년에 파리를 거쳐, 이듬해에 로마에서 장학금으로 그림 공부를 했다. 1737년 프랑스 아카데미아에 입학하면서부터 중요한 대작들의 의뢰를 받기 시작했다. 오늘날 루브르에 있는 ‘바리사이 집의 화려한 만찬’(1737년, 루브르 소장)과 ‘성 베네딕토의 기적’(로마), ‘성 암브로시우스와 테오도시우스 1세’(페루지아) 등을 연이어 완성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중 프랑스 미술계에서 손꼽는 작품은 역사도, 초상화도 아닌 누드 작품이다. 아니 전체 미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드로 간주된다. ‘여성의 누드’(1740년경, 로마 국립 고대 미술 갤러리)라는 작품이다. 구글에 검색하여 한번 찾아보기를 권한다.
그림 속으로
작품 속 구조 장면은 매우 균형 잡힌 구성으로, 인물들의 절제된 몸짓과 표현이 혼란의 상황임에도 안정감을 주고 있다. 오른쪽 어깨에 환자를 둘러업고 물속을 빠져나오는 가밀로의 모습은 아에네아스가 아버지 안키세스를 둘러업고 트로이를 빠져나오는 것을 연상시킨다. 약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온전히 내어놓는 가밀로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난장판이지만, 약자를 돕는 가밀로와 봉사자들의 팔뚝 근육이 뭔가 의지하게 만든다.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희망의 징표를 힘차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구조 현장은 산토 스피리토 병원이 재건되기 이전, 열악한 시스티나 병원이다. 람베르티니 곧 베네딕토 14세 교황(재임 1740~1758)은 1746년 이 그림을 통해 바로 그해에 자기가 주도하여 새로 건설한 산토 스피리토 병원을 조명하고자 했다. 작품 속 주인공인 가밀로 데 렐리스도 그해에 베네딕토 14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건축가 후가(Ferdinando Fuga)의 설계로 완성된 산토 스피리토 병원은 베네딕토 14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되었고, 근대 의학(醫學)이 탄생하던 상황에서 혁신된 방식의 치료와 시대의 요구에 응답한 교회의 첫 번째 행동이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6) 스카라무챠의 ‘1630년 페스트에 라자레토를 방문하는 페데리코 보로메오’
기근과 페스트에 쓰러진 이들을 살펴보는 목자의 눈길
- 루이지 스카라무챠, ‘1630년 페스트에 라자레토를 방문하는 페데리코 보로메오’(1670년), 유화, 이탈리아 밀라노 암브로시아나도서관 소장.
1563년, 트렌토 공의회 폐막과 함께 공의회 결정 사항을 실천하기 시작한 것 중 교회 쇄신의 가장 큰 동력이 된 것은 교회 지체들의 인문주의적인 삶 곧 ‘휴머니즘의 실천’이었다. 지난 150년간 교회 안에서도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실천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 가지 혼선이 있었다. 1400년대,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한창 꽃을 피울 때, ‘로마 학술원’을 폐쇄하고 인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싫어하던 바오로 2세와 같은 교황이 있었는가 하면, 비오 2세, 니콜라오 5세, 식스토 4세에 이어 율리오 2세와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등 문화와 예술을 장려하여 시대의 흐름에 응답했던 교황들도 있었다.
그러나 트렌토 공의회는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문화 예술 분야에서만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정신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전환점이 됐다. 신자들에게 피부로 와 닿았던 두 가지는, 우선 전례 분야에서 중세 성당들에서 보던 신자석과 성직자-수도자석을 구분하던 트라메쪼(tramezzo)라는 벽을 모두 허물었다. 오늘날 미술사학자들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당시에 글을 모르던 신자들을 위해 저명한 작가들의 그림과 조각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고위 성직자에서부터 무명의 신자에 이르기까지,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고단한 그들의 삶 속으로 뛰어든 성인 성녀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이렇게 교회 안에서 조용히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종교개혁가들이 외쳤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걸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그것이 1600년대를 규정하는 교회의 모습이었다.
박학다식하고 겸손했던 보로메오 추기경
오늘 소개하는 인물도 그중 한 사람이다. 앞서 언급한바 있던 밀라노의 대주교로 여러 면에서 모범이 되어 주었던 카를로 보로메오의 사촌 동생 페데리코 보로메오(Federico Borromeo, 1564~1631) 추기경이다.
그는 3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친척 성직자들을 아버지의 모델로 보고 자랐다.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촌 형 카를로 보로메오(1538~1584)는 그의 영적 지도자로, 사제가 되도록 길을 제시했다. 외사촌 구이도 루카 페라로와 먼 친척인 식스토 5세 교황,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 폰 호에넴스 추기경도 있었다. 카를로 보로메오가 밀라노의 대주교로 있을 때, 페데리코는 밀라노대학교에 입학해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후에 볼로냐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다음, 다시 파비아대학으로 옮겨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로마에서는 필립보 네리와 그가 세운 오라토리오회 회원으로 있던 체사레 바로니오를 만나기도 했다. 로마에 있는 동안 고대 로마에 대한 관심이 커져 고전연구를 시작했고, 샤콘, 바로니오와 오르시니 등 석학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페데리코 보로메오는 박학다식함과 겸손한 인품을 인정받았다. 식스토 5세 교황은 겨우 23살밖에 되지 않은 그를 도메니카의 산타 마리아 성당(Santa Maria in Domenica)의 부제급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1590년 교황청은 불가타 성경 ‘로마판’ 개정에 들어가면서 재심위원회를 만들었는데 페데리코 추기경도 포함되었다.
사비 들여 성당·대학 짓고, 밀라노 시민들 돌봐
1595년 밀라노의 대주교로 있던 비스콘티(Gaspare Visconti)가 사망하자, 필립보 네리의 권유와 클레멘스 8세 교황의 제안에 따라 밀라노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그는 사촌 형 카를로 보로메오의 모범을 따라, 또 트렌토 공의회의 규범에 따라 성직자 교육을 철저히 하고 사비를 들여 성당과 대학을 지었다. 그가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장을 받고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유럽 전역으로 사절을 보내 수기본과 인쇄본으로 된 저작물들을 수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1607년 2월부터 1609년 가을까지 그의 명령으로 수집한 저작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1609년 12월 8일 암브로시아나도서관이 설립됐다. 그리고 로마에서 수집하여 갖고 있던 고대 조각상들과 회화 컬렉션들은 1618년에 ‘과드레리라 암브로시아나’를 지어 소장했는데, 이것이 후에 ‘암브로시아나 피나코테크’가 됐다. 그는 여러 개의 아카데미아를 더 설립해 평신도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최근에 그가 새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저서 「1630년 밀라노 페스트(De Pestilentia)」를 쓴 작가로 알려지면서다.
「1630년 밀라노 페스트」는 페데리코 보로메오 추기경과 이탈리아 소설가 알렉산드로 만조니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작품이 모두 그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데리코 추기경은 저서에서 페스트로 죽어가는 도시와 ‘한 인간 영혼’에 대한 초상을 잘 그렸다. 그해(1630년) 밀라노의 거리에는 시체를 실은 마차와 그것을 처리하는 사람들과 병을 전염시켰다고 의심받는 사람들로 넘쳐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 인간 영혼’은 대주교인 페데리코 보로메오 자신으로 보인다. 르네상스의 원칙에 있어서 단호하고 예측을 불허했던 그가 자신의 책에서 묘사한 죽음으로 점철된 끔찍한 광경은 그와 밀라노 간의 마지막 작별 인사가 됐다. 1628년의 기근과 1630년의 페스트에서 밀라노 시민들을 물심양면 돌보며 큰 사랑을 보여줬던 그는 이듬해인 1631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의 유해는 밀라노 두오모 내(內), ‘나무의 성모(Madonna dell‘Albero)’ 경당 제단 아래 묻혔다.
탁월한 전기작가이며 미술사가
소개하는 작품은 페루지아 출신으로, 스카라무챠로 알려진 루이지 펠레그리니(Luigi Pellegrini, 1616~1680)의 ‘1630년 페스트에 라자레토를 방문하는 페데리코 보로메오’(1670년)라는 유화 그림이다.
스카라무챠는 일찍 고향을 떠나 로마, 볼로냐, 밀라노 등 장화 반도 전역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바로크 시대의 탁월한 전기작가이자 미술사가로 더 유명하다. 말하자면 ‘1600년대의 조르조 바사리’라고 하겠다. 그가 남긴 최고의 작품은 「이탈리아 붓들의 섬세함(Le Finezze De Pennelli Italiani)」으로 1674년 파비아에서 초판된 바로크 미술가들의 첫 번째 전기작 중 하나다. 화가로서, 그는 체리니와 함께 구이도 레니의 제자였다. 그가 이탈리아 전역에 작품을 남긴 것도 그의 재능을 알아본 여러 도시의 군주가 요청했기 때문이다.
1670년에 밀라노로 거처를 옮긴 후, 죽을 때까지 밀라노에서 활동했다. 암브로시아나도서관에 소장할 ‘1630년 페스트 시기 병자들을 방문하는 페데리코 보로메오’도 그 시기에 그렸다. 암브로시아나 아카데미아의 설립자에게 헌정하는 일련의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그에 관한 이런 작품은 여러 면에서 밀라노 시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전임 카를로 보로메오 대주교를 연상시킨다. 오늘날 브레라 아카데미아 아트 갤러리에는 스카라무챠의 초상화가 있는데, 그의 친구 프란체스코 카이로가 그려준 것이다.
그림 속으로
만조니는 소설 「약혼자들(I promessi sposi)」에서 추기경을 여러 차례, 비교적 길게 언급하고 있다. 성직자를 대개 악역으로 등장시킨 것과 달리, 페데리코 추기경에 대해서만큼은 관대하게 말하는 것으로 봐서 추기경의 인품이 원래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모든 시기에 걸쳐 참으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놀라운 독창성, 모든 풍족한 수단, 특권적인 조건에서 오는 모든 이점을 활용하여 지속적인 의지로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 실행에 옮긴 인물이다.” 1630년 밀라노 페스트는 기근과 전쟁에 이어 덮친 최악의 광풍이었고, 몇몇 사람이 기름을 발라 페스트를 퍼트린다는 소문으로 사회적인 분위기까지 냉혹한 처참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주교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백성을 돌보았고, 절제심 강한 순수한 복음주의자였다. 인간의 모든 아픔과 조건에 대한 뛰어난 공감 능력을 갖춘 특별한 인물이었다며, ‘약혼자들’에게 삶에 대한 복음적인 개념을 계속해서 실천하도록 인도하는 인물로 등장시켰다. 그가 보여준 자선과 교리 활동을 만조니는 가톨릭교회가 해야 할 ‘사회적’ 사명이자 메시지로 소개했다.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증거하고 약자들을 보호하는 데 주저하지 않음으로써 신앙을 설교해야 한다는 것은 트렌토 공의회가 남긴 큰 메시지였다. 그리스도교의 힘은 오로지 이웃을 향한 봉사에서 나오는 것임을 설파했다. 작품 속에서 추기경은 기근과 페스트로 죽어가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악취가 진동하는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배경 속 밀라노시는 참담한 분위기를 말하려는 듯 혼란에 휩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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