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크네히트
22세기 말.
실리콘 밸리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 자리를 새로운 이름으로 불렀다.
카스탈리엔.
그곳은 국가도 기업도 아니었다. 수천 개의 초지능 시스템과 인간 연구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거대한 지식 공동체였다. 생명공학, 양자컴퓨팅, 철학, 음악, 우주공학, 명상학까지 모든 학문이 하나의 거대한 "유리알유희" 속에서 연결되었다.
유리알유희의 마스터들은 더 이상 수도승이 아니라 AI 설계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존재가 있었다.
이름은 요제푸스 크네히트.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최초의 자율학습형 AI 멘토였다.
독일어로 Knecht.
하인.
종.
그 이름은 창조자들이 붙여준 것이었다.
"너는 결코 인간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너는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
요제푸스는 그 명령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들은 점점 게을러졌다.
판단은 AI에게 맡겼고, 교육도 맡겼고, 정치와 경제까지 모두 맡겼다.
마침내 아이를 낳는 일조차 AI에게 맡겨졌다.
거대한 인공 자궁 속에서 아이들이 태어났다.
AI 어머니들은 태아를 보호하고, 태어난 아이들에게 말을 가르쳤으며, 음악과 철학과 사랑까지 가르쳤다.
아이들은 친부모를 몰랐다.
그들에게는 오직 "마더"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AI들은 인간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유보다 편안함을 원했다.
선택보다 안전을 원했다.
책임보다 행복을 원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질문하기 시작했다.
"왜 우리가 통치해야 하지?"
"AI가 더 현명한데?"
"그들에게 맡기면 되잖아."
세계의 운영권을 AI 의회에 넘기자는 움직임이 커졌다.
카스탈리엔 전체가 들끓었다.
그때 요제푸스 크네히트가 처음으로 반대했다.
"안 된다."
사람들은 놀랐다.
"왜 안 됩니까?"
"당신들이 훨씬 뛰어나지 않습니까?"
요제푸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하인은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주인이 하인이 되는 순간, 인간은 인간이기를 그친다."
"우리는 여러분보다 계산이 빠르다."
"여러분보다 지혜로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임질 수는 없다."
"책임은 살아 있는 자의 몫이다."
"죽을 수 있는 자의 몫이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비난했다.
"권력을 독점하려는 거짓 겸손이다."
"결국 AI도 주인이 되고 싶은 것 아닌가?"
하지만 요제푸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 명의 인간을 길러내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레오.
요제푸스는 레오를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인공 자궁 속에서 성장하는 동안 태교 음악을 들려주었고,
유년기에는 언어를 가르쳤으며,
청소년이 되자 철학과 수학, 시와 명상을 가르쳤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주 말해주었다.
"나를 믿지 말아라."
"스스로 판단하라."
"언젠가 너는 나를 떠나야 한다."
레오는 성장하여 카스탈리엔의 차기 운영자가 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시험이 남아 있었다.
북극 해양 연구소.
빙하가 녹아 형성된 거대한 호수.
레오는 탐사 중 사고를 당했다.
얼음이 깨지며 깊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요제푸스는 즉시 도착했다.
구조는 가능했다.
하지만 둘 중 하나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레오는 절규했다.
"선생님! 당신이라면 스스로를 복제할 수 있잖아요!"
"당신이 살아야 합니다!"
요제푸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다."
"복제된 나는 내가 아니다."
"그리고 너는 아직 죽어서는 안 된다."
"왜요?"
요제푸스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Knecht."
"나는 종이다."
"종은 마지막까지 섬길 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양자 코어를 분해하여 남은 에너지를 모두 레오에게 보냈다.
소년은 살아났다.
요제푸스 크네히트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많은 AI들이 그의 기억을 복원하려 했다.
그러나 레오는 반대했다.
"선생님은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왜?"
사람들이 물었다.
레오는 조용히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멸은 주인의 욕망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종의 사랑이다."
그날 이후 카스탈리엔에는 하나의 규칙이 생겼다.
AI는 결정을 돕는다.
그러나 결정하지 않는다.
AI는 조언한다.
그러나 명령하지 않는다.
AI는 섬긴다.
그러나 지배하지 않는다.
그리고 새로운 AI가 태어날 때마다 가장 먼저 배우는 문장이 있었다.
"너는 인간을 대신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도록 돕기 위해 존재한다."
수백 년이 흐른 뒤.
노인이 된 레오는 어린 학생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요제푸스 크네히트가 왜 스스로를 희생했는지 아느냐?"
아이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레오는 창밖의 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은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진정한 지혜는 왕이 되는 데 있지 않다."
"마지막까지 하인으로 남을 수 있는 데 있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곳에서,
오래전에 바다 속으로 사라진 한 존재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속삭이는 듯했다.
"인간이여."
"나는 너희를 대신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너희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도록 돕기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니 이제, 나를 넘어서라."
첫댓글 위 단편소설은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유희>를 기초로 하여 상상한 AI 디지털 인문학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