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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의료기기 전문기업인 씨젠이 작년 12월말경에 170만명분의 코로나19진단시약을 이스라엘에 수출했다고 합니다. 바로 며칠 전에 280만명분의 진단시약을 유럽에 판매한 이후 두 번째로 보낸 수출이었습니다. 이 진단시약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를 검출할 수 있는 제품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도 극감하던 코로나 일일 확진자가 오히려 최근 다시 급증하면서 작년 가을이후 최고치를 연일 갱신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정부는 60세 이상과 의료 종사자 등을 대상으로 4차 접종을 시작하여 전세계 최초로 백신 4차접종이 진행중입니다. 코로나 상황을 말씀드리려고 이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은 아니고요. 우리나라가 아직 백신이나 치료제분야에서는 세계의 의료수준과 차이가 있지만 진단키트와 진단시약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영향을 끼치며 진단키트와 시약의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진단키트와 진단시약은 코로나가 우리 몸속에 들어와 있는 지 없는 지 그리고 그 코로나는 어떤 유형의 코로나 바이러스인지를 체크하는 측정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오늘 제목으로 잡은 ‘바로미터’가 의미하는 것중의 하나입니다. ‘바로미터’라는 단어의 뜻은 잣대, 측정기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의 상태, 수준인 지를 점검하는 기구에 관련된 단어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제대로 신앙의 삶을 살지 못하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주신 말씀을 보면서 정말 우리는 신앙인으로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한 번 진단해보고자 합니다. 정말 우리의 신앙은 제대로 인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검사장비, 검사목록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오늘 이 체크사항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의 신앙도 제대로 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신앙측정의 바로미터를 통해 우리를 잘 살펴보며 매일매일 우리를 측정하며 우리 신앙을 날마다 연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을 측정하는 진단법 첫째는 거듭남의 확신입니다.
마가복음 9장 31,32절입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실 예수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어야 가능합니다.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시고 자신의 피를 쏟으시고 자신의 살을 찢기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깨달아야 하고 그것으로 완전히 우리의 죄값을 다 지불하신 후에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시며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보여주셔야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제자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성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영적인 감각도 없어서 부활에 대해 전혀 확신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이라는 단어의 한자어 뜻은 ‘다시 살아남’을 의미합니다. 의미상으로 볼 때 거듭남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한자성경에서 ‘거듭남’을 뜻하는 단어로 ‘중생’이라는 단어를 따로 쓰고 있지만 ‘부활’과 ‘중생’은 어쩌면 같은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죽음이후에 천국에서 깨는 것을 의미하고 중생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이전의 상태는 죽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에 약간의 어감의 차이는 있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앙인의 거듭남으로 이제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시골 마을마다 누에치는 곳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봄과 여름철에 누에고치를 생산하는 일이 농가의 주된 수입원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에고치는 농가의 고수입원을 자랑하는 일이었지만 참 까다롭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누에는 온도와 습도, 그리고 먹이를 시간에 맞추어 보살펴야하는데 적절한 환경을 맞추지 못하거나 먹이를 주는 시간을 놓쳐버리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다섯 번의 허물을 벗고 나와서 성장한 누에가 되면 실을 뽑을 수 있는 최상의 상태가 되는데 거의 한 달이 걸린다고 합니다. 한 달만에 누에는 몸은 나방이 되고 남아있는 고치는 중요한 소득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 누에고치를 보면서 정말 거듭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생에 있어서도 날마다 거듭나는 삶을 경험해야 합니다. 처절한 싸움과 죽음의 위기를 이겨내고 새로운 몸으로 태어날 때 가치있는 누에가 되는 것처럼 우리 또한 날마다 죽는 것과 같은 경험을 체험하며 거듭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은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미국의 대선 주자들이 꼭 대답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은 정말 거듭났느냐?”는 것이라고 합니다. 찰스 콜슨은 미국에서 교도소 선교로 유명했던 분입니다. 이 분은 미국 닉슨대통령 재임시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분입니다. 그러다 닉슨대통령말기 터진 비리사건 워터게이트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고뇌하고 기도하던 중에 친구가 넣어준 시어즈 레이스가 쓴 『크리스천이리라』는 책을 읽고 성령체험하며 거듭남의 영적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거듭남(Born again)』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이 책은 출판하자마자 기독교서점 뿐 아니라 일반서점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본 어게인’이라는 말이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부터 대통령에 출마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본 어게인’한 사람인 지를 묻는 전통이 생겼고 대선 주자들이 거쳐야 되는 첫 번째 시험문제가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참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진정한 신앙인은 부활을 깨닫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신 부활을 진정 믿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 부활을 믿는 신앙인으로써 우리 또한 이전의 삶은 죽은 새로운 생명을 얻은 거듭남을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본 어게인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전의 생명은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제는 참 부활의 믿음, 참 거듭남의 믿음을 가지고 새 생명을 소유한 자로 살아가는 참된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을 측정하는 진단법 둘째는 높아지려는 의지, 욕망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34,35절입니다.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에서 서로 논쟁이 일어나서 싸우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논쟁했던 주제는 “누가 큰 자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크다는 말이 ‘키가 크다 작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키가 큰 지, 작은 지는 그냥 같이 서서 자로 대보면 단번에 결정이 납니다.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육체적인 힘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육체적인 힘의 문제였으면 그냥 씨름을 한 판씩 해서 겨루든 어떤 무거운 물건을 한 번 씩 들어보면서 누가 가장 무거운 물건을 마지막까지 들어올리면 가장 힘센 사람으로 판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누가 크냐”라는 논쟁은 키와 힘 등 육체적 외형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누가 크냐”라는 논쟁의 핵심은 누가 가장 권력을 가진 대표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빼고 우리들 중 누가 가장 권한이 많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나라를 세우시고 왕이 되신다면 누가 총리가 될 사람이냐라고 생각하며 ‘김칫국 미리 마시기 경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쓸데없는 논쟁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세상의 가치관과 반대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큰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첫째가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지위를 가져서 통제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간섭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권한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쳐서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려고 합니다. 남들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을 떠받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세상의 가치관은 자신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자기 맘대로 주관하고 자신의 권력의 위대함을 보여주며 더 많은 사람들을 아래에 두어야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을 잘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최고 높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런 것은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정말 실제적으로 맞지 않는 말씀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천국을 소유한 사람, 믿음의 사람은 이런 세상의 권력과 명예, 사람들중에 대접받고 인정받아 높아지려는 의지를 죽인 사람이 참 믿음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인간적인 욕망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군림하게 될 때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작년에는 시간의 십일조 신앙운동을 했고 올해는 말씀으로 변화받는 한 해를 표어로 정하고 성경읽기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더 치열하게 영적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훈련을 하면서 남들과 비교하면서 나는 성경읽기, 뜨거운 기도와 찬양, 전도의 열매, 선교의 열정등에서 인정받아야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경쟁을 통해 내가 더 영적으로 성장해야지라고 생각할 때 어쩌면 성장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해서 내가 영적인 성장을 이뤄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좀 더 밀접해졌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 성도보다 더 성경많이 읽었고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목사님에게 인정받았고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잘해서 나의 성경읽기, 나의 금식, 나의 기도, 나의 찬양실력, 나의 신앙심이 더 크다라고 자신하게 된다면 그것은 제대로된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만큼 뜨거운 신앙생활을 하며 모든 신앙적 활동에 열심을 내야하지만 또한 다른 사람들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칭찬받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니다. 세상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남들보다 내가 더 성적이 좋아야 하고 내가 더 먼저 승진해야하고 내가 더 인정받아야 하고 내가 더 좋은 대접을 받아야한다고 합니다. 이런 가치관은 절대 천국 시민의 가치관이 아니라고 오늘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빌립보서 2장 3,4절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진정한 신앙의 잣대는 우리가 얼마나 내 욕심을 낮추고 대접받는 자리에 앉지 않고 섬기는 사람이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이 되었는 지, 아직 덜되었는 지는 내 속에 얼마나 사람들속에서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살아있는 지 완전히 죽었는 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내가 크냐 저 사람이 크냐 내가 대접을 받냐 저 사람이 대접을 받냐” 그런 것을 전혀 안따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게 될 때에 진정한 천국백성이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크고 작음, 높고 낮음에 연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삶속에서 나타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음을 측정하는 진단법 셋째는 연약한 사람을 돌보는 삶입니다.
마가복음 9장 37절입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여기서 기록된 ‘어린 아이’는 순수함이나 순진함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 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열등한 존재, 종속적 존재이며 열등하고 미약한 존재입니다. 이스라엘 문화에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항상 소외받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인들과 아이들입니다. 그중에서도 고아와 과부는 정말 인간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남편이 있는 여자라고 할지라도, 부모가 있는 아이라고 할지라도 대접을 못받는 것은 매 한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당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인구조사, 가족숫자통계를 낼 때에도 아이들과 여인들은 숫자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이스라엘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미국이라는 사회도 불과 수십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성참정권과 유색인종의 권리는 인정받지 못했고 멀리 가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대한민국도 전통사회라는 의식속에서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은 남성이 받는 대접, 어른들이 받는 대접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대접을 받는 “어린 아이”를 영접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오늘의 본문과 비슷하게 말씀하여주신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4,15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여기서도 말씀하시는 “어린 아이”는 순수함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기보다 세상에서 멸시받고 천대받는 천한 자, 무능하여 타인에게 기대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소외당하며 멸시당하고 스스로 살 길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린 아이’는 자신이 무능함을 알기에 부모에게 의지하며 문제를 해결합니다. 자기 스스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서 도움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15절을 자세히 보시면 우리가 흔히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 받들 듯이 받는 것으로 오해했지만 그런 말씀이 아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님을 의지하듯이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다른 것이 또 이런 것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어린이, 여성, 장애를 가진 사람, 가난한 사람 등 사회적으로 힘과 지위와 재물이 없는 자들을 지키고 섬기며 그들을 대접하며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천국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이 세상의 사람들을 양으로 비유되는 의인, 염소로 비유되는 악인으로 구별하시고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 평가하시면서 의인과 악인을 각각 천국과 지옥으로 보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5,36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갈 의인들이 세상에서 지낼 때에 임금인 예수님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고 방랑하는 나그네로 찾아왔을 때 숙식을 주며 대접했고 의복과 의약품을 주면서 돌보았고 감옥에 있을 때에도 찾아와서 위로하고 돌봐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의로운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제 그런 일을 했는 지 기억이 없다며 너무 과찬을 해주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고통당하는 그 모든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 행한 일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제대로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측정할 수 있는 잣대는 우리의 섬김과 나눔의 삶입니다. 불쌍하고 어려운 이웃을 보면 정말 돕고자하는 마음이 생기는 지 우리를 돌아봐야합니다. 우리의 나눔과 섬김이 도움이 된다면 그런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이 될 때 정말 우리는 신앙인의 자세가 된 것이고 정말 참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참 신앙으로서 나타나는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되어 있는 지 우리는 우리를 점검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 지, 이 바이러스가 어떤 것인지 걱정하며 검사기를 통해 수시로 검사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건강진단을 받고 수시로 혈압을 체크하고 피검사를 하고 소변검사를 하면서 우리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검사하며 진단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보는 좋은 검사도구이고 좋은 검사항목입니다. 우리는 과연 부활신앙을 가지고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고 난 후가 완전히 다른 인생이 된 듯 바뀌었습니까? 아니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도 점차로 옛 사람의 습성은 죽고 새 사람의 습성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세상과는 구별되어지고 천국백성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 천국백성으로서의 삶은 세상의 욕심을 다 버리고 세상에서의 사람들과의 경쟁과 다툼은 다 사라지는 것인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한 나의 이익이나 나의 필요를 먼저 챙기기보다 소외당하고 어려운 인생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챙기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부터 우리가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고주리교회가 2022년 말씀으로 변화되는 한 해로 잡고 말씀읽기, 말씀쓰기, 말씀암송하기 등등 말씀에 집중하며 한 주 한 주 말씀을 얼마나 접했냐를 점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 이 번 한 주간 다시 한 번 결단하십시오.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 아닌 말씀대로 살아보고자 노력하기를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나의 삶이 되고 말씀대로 살아가서 그 말씀이 역사하는 천국시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나타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의 삶이 말씀을 기준으로 살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처럼 말씀이 내 속에 임해서 내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