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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성탄 제1강
구원의 뿔, 돋는 해
말씀/눅1:57-80
요절/눅1: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메리 크리스마스! 12월은 예배 때마다 이렇게 인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 예배하는 이 시간이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 우리 구주 예수님 탄생의 복된 소식으로 인해 우리가 함께 기뻐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메시아의 선구자인 요한의 출생에 관한 내용과 아버지 사가랴의 찬가입니다. 특히 사가랴의 찬가를 살펴보면서 우리를 위해 구원의 뿔, 돋는 해로 이 땅에 찾아오시고 만나주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예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에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가 나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의롭게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임신을 못 하는 문제가 있어 늙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데도 자식이 없는 문제는 본인들뿐만 아니라 지켜보는 사람들도 안타깝게 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식이 없는 문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생각이 있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엘리사벳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때 사가랴는 “부부가 다 늙었는데 이게 가능합니까? 얼처구니가 없네요.” 말하며 비웃다 1년 동안 말 못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천사의 말대로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매우 감격스런 일입니다. 특히 이들 부부에게는 큰 기쁨이요 은혜였습니다. 이웃과 친족들도 나이 많은 엘리사벳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임한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지 팔 일이 되자, 친족들이 율법을 따라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려고 왔습니다. 이날은 아이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의식을 행하는 중요한 날로 친척들과 친구들이 와서 함께 축하하며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할례의 날은 부모가 공식적으로 아이의 이름을 공표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친족들은 당시 관습에 따라 아이의 이름을 부친의 이름 따라 사가랴로 짓자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기 때부터 조상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름에는 가문 계승에 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어머니 엘리사벳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60절을 보십시오.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여기 ‘아니라’는 말은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단호한 의사 표명입니다. 엘라사벳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천사가 말한 내용을 사가랴에게 전달받은 것 같습니다. 관례를 벗어난 엘리사벳의 선택을 친족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은 아이 엄마 말이면 그대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에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 호소력이 약했습니다. 친족들은 남편인 사가랴에게 몸짓하면서 물었습니다. 사가랴는 천사에게 불신의 말을 한 이후 여태껏 말 못 하는 상태로 지내왔습니다. 사가랴에게 몸짓을 한 것을 보면, 말 못할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가랴는 몸짓으로 서판을 달라해서 아이 이름을 요한으로 적었습니다. ‘요한’이라고 확실하게 못 박았습니다. 친족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더 놀랍게도 그 순간 사가랴의 입이 열리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가 ‘요한’이라는 이름을 고집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지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살았습니다. ‘말을 못 합니다’라고 친족들에게 핑계 댈 수도 있었지만 친족들 속에 흐르는 주류 의견을 거슬러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했습니다. 가문에 없던 이름을 짓는 것은 사람들에게는 낯선 새로운 일이었지만 이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이를 통해 낯설지만 위대한 새 일을 행하고자 하셨습니다. 특별히 그들 부부를 택하시고 아들을 주시며 그 아들을 통해 주님의 구원 역사를 예비하고자 하셨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특별히 직접 지어주신 것입니다. 요한에게 하나님이 두신 특별한 뜻이 있고 그가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요한’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또는 ‘여호와는 긍휼을 베푸신다’입니다. 이름처럼 요한의 출생은 하나님이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긍휼을 베푸신 증거입니다. 엘리사벳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아이 없던 엘리사벳의 고통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한계적이고 절망하는 마음, 삶의 무거운 짐을 진 마음, 사람 사이에 마음 둘 곳 없는 마음, 외로움, 우울함, 서글퍼 울며 마음 아픈 우리를 향한 깊은 연민과 사랑을 하나님은 가지고 계십니다. 이런 우리 인생들을 돌아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사43:19)?”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대로 우리에게도 은혜와 긍휼로 구원의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면 말문이 터진 사가랴의 찬송 내용이 무엇입니까? 68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그는 입을 열자마자, 당신의 백성을 돌보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여기 ‘그 백성을 돌보사’라는 말은 NLT영어성경을 보면 ‘He has visited his people’로 그 백성에게 찾아오셨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백성들은 죄로 인해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식민지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비전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들을 슬프고 어둡고 운명적으로 만든 것은 로마의 압제나 극심한 가난이나 질병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백성이 아닌가’하는 죄의식과 불신이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선지자 한 명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없었고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는 자도 거의 없었습니다. 구원의 소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에 메시아의 선구자 요한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말씀대로 약속하신 구주 메시아가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잉태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함 가운데 이를 알고 예언하게 되었을 때, 사가랴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기억하시고 하늘의 영광과 존귀를 다 내려놓으시고 죄와 질병과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가득한 이 땅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인간들을 기억하사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까지 찾아오신 이것이 바로 은혜요, 긍휼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요한’이라는 이름 두 글자에 새겨져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돌아볼 만한, 기억해줄 만한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고서도 그 은혜를 배반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버림받아도 할 말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배은망덕한 백성들이었지만 약속대로 돌아보시고 메시아를 보내 속량해 주셨습니다. ‘속량’은 노예를 값을 주고 사서 자유하게 풀어주는 것입니다. 이는 그 백성이 죄의 노예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며 떠나갔을 때 그들은 죄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는 비정하고 사나운 폭군과도 같아 죄의 종노릇하는 그들의 삶은 불행했습니다. 벗어나려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을만한 아무런 꼬투리도 자격도 없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하게 세상의 온갖 우상들을 섬기며 하나님을 배반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시고 돌아보사 외아들의 핏값으로 구원해주셨습니다. 사가랴는 이 은혜를 생각할 때 찬양하지 않고서는 입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만일 우리가 주님의 돌보심을 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했다면 과연 우리 삶은 어떨까요? 이 시간 우리에게 먼저 찾아와주시고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새겨보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셨습니까? 69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뿔은 강력한 힘을 상징합니다. 어떤 짐승이 뿔로 상대방을 공격하면 그 짐승의 몸무게 전체가 뾰족한 뿔 끝에 집중됩니다. 상대방을 단번에 뚫어버립니다. 현대 무기로 말하자면, 뿔은 핵폭탄의 위력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방으로 모든 것을 끝냅니다. 하나님은 그런 뿔을 자기 백성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이 바로 이 뿔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보다 6개월 늦게 탄생할 것이니까 사가랴가 이 찬송을 부를 때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복중에 머물러 있는 그 아이가 바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뿔입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구원의 뿔이 됩니까?
그 아이가 자라 인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온전히 바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소중했고, 한나에게 사무엘이 더없이 사랑하는 자녀였던 것처럼, 또 사가랴에게 요한이 모든 희망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그 사랑하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희생해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사 죄와 죽음의 세력을 단번에 박살내버렸습니다. 이 예수님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 우위의 파워가 있는 분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어떠한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에게서도 능히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일을 행하실 예수님을 하나님은 마리아의 태 속에 보내셨습니다. 그 아이가 마리아의 복중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 아이의 잉태와 탄생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뿔을 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의 뿔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71절을 보십시오.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구원의 뿔 예수님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서 우리를 구원해주십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성경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대적 마귀, 곧 사탄이 우리의 원수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탄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실제로 존재합니다. 사탄은 사람의 내면에 어둠을 심는 권세자입니다. 이 사탄은 굶주려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잡아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사탄은 창세기에서부터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탐스럽고 재미있는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죄에 넘어지게 했습니다. 이 죄로 인해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죄와 죽음은 강력한 힘이 있어 우리를 육체의 정욕으로 몰아가고 어둠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심령은 죄로 병들어 고통합니다. 교만하여 우쭐해하거나 깊은 열등감으로 괴로워합니다. 비교의식과 시기심에 뼈가 쇠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깊은 고독에 사로잡히고 우울증으로 고통합니다. 요즘 청년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두려워하고 평안이 없습니다. 취업하기 어렵고 사회생활 출발부터 학자금 대출을 비롯한 많은 빚으로 시작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다가도 당면한 현실문제 때문에 깊은 한숨과 어둠에 빠집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평안할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상대적으로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세상 살기가 각박하고 삭막하고, 땀을 흘려 일해야 겨우 먹고 살며 바둥거리다가, 결국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된 것도 죄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님은 강력한 구원의 뿔이 되셔서 우리를 죄의 바다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평강과 새 생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이어서 배신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돌보아주십니다. 우리와 함께해주십니다. 사탄은 죄와 어둠의 세력으로 우리를 옭아맵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킵니다. 너무나 강하고 간교해 우리 힘과 의지로는 도저히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구원의 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탄보다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지키고 계시기 때문에 능히 사탄의 세력을 물리쳐주십니다. 우리를 죄와 어둠의 세력에서 구원하시고 참 평안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한 긍휼을 행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신 결과입니다. 창세기 22장 16~18절에 보면,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여금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대적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대적 원수를 멸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약속은 서로 간에 맺는 것이고, 한쪽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무효가 됩니다. 상대방이 깬 계약을 집행해야 할 이유나 의무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깬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켜야 할 의무는 없으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범죄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배신당하면 상대방을 원수로 저주하며 돌아섭니다. 하나님이 배신한 인간을 저버린다고 해서 그분의 잘못을 추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셔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는 등 계속해서 돌보셨고 이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구원의 뿔이신 예수님을 보내시며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배반했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하신 언약에 매여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돌아보셨습니다. 사람은 신실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스스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고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탄의 손에서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74,7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도 사탄이 심는 정죄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죄로 더러워진 우리 내면을 깨끗이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의롭다 해주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 ‘성결’은 죄를 이긴 거룩함이고, ‘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을 맺고 죄를 이긴 거룩함 속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강과 기쁨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부담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 에덴의 기쁨과 행복이 차고 넘칩니다.
76,77절을 보십시오. 사가랴는 아들 요한의 사명을 이야기합니다.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이,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 길을 준비하는 사명을 감당합니다. 어떻게 준비합니까? 주의 백성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함으로 주의 길을 준비합니다. 당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정치적 구원을 갈망했습니다.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는 현실적 구원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부수적인 구원에 불과합니다. 정치적으로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루고 경제가 발전되어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가난과 질병이 없어진다고 해서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할까요? 물론 삶은 좀 더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지만 본질적인 구원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고통당하는 이유는 죄 때문이고 그 죄 때문에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는 절대자의 심판 앞에 우리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또 이 세상은 극심한 이기심과 개인주의, 정욕, 음란, 각계각층의 만연한 부정부패, 물질만능주의, 많은 이혼과 자살 등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어떤 사람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그 무엇도, 어느 누구도 진정한 구원을 가져다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예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참된 평강과 행복을 주는 근본적인 구원입니다.
그러면 이 구원이 우리에게 어떻게 임하게 됩니까? 78,79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오직 우리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합니다. 사가랴는 예수님을 돋는 해로 비유합니다. 또 여기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말해줍니다. ‘돋는 해’로 오신 예수님은 이사야서 9장 2절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막연히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이 운명주의에 시달리며 팔자를 탓하며 힘겨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진리를 몰라 마음이 어둡고 죄로 인해 마음이 어둡고, 무엇보다도 어쩔 수 없는 질병과 죽음 앞에서 주저앉아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돋는 해, 예수님이 임하기 전의 우리 영혼은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선한 의지로 결심하고 노력해도 우리의 영혼에서 이같은 죄와 죽음 권세의 어둠을 몰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돋는 해, 예수님이 임할 때 이 모든 어둠이 물러가고 우리 영혼은 생명의 빛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돋는 해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웅장한 모습으로 수평선, 지평선 위로 돋아 오릅니다. 이글거리며 힘차게 솟아오른 해는 어둠을 순식간에 몰아내고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춥니다. 이 돋는 해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저도 여수 향일암에서 새해 1월 1일, 해돋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웅장하고 흥분되고 환호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떠오르는 해가 이처럼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어둠을 힘차게 몰아내기 때문이요, 우리 삶에 희망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말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2).” 돋는 해는 치료의 광선을 발합니다. 돋는 해 되신 예수님의 구원은 강력한 빛으로 우리 영육 간에 모든 어둠과 사망의 그늘을 없애시고 치료하시는 전인적인 구원입니다. 돋는 해, 예수님이 우리 심령에 항상 현재형으로 떠오를 때 우리의 삶은 역동적이 됩니다. 더 이상 부정적이지 않으며, 더 이상 주저앉아 있지 않으며, 힘 있고 희망찬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돋는 해, 예수님으로 인해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은혜와 긍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픔과 고난 속에서 애태울 때, 죄 가운데 방황할 때, 혼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구원해주십니다. 구원의 뿔이요, 돋는 해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죄와 어둠에서 구원해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구원의 뿔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성결과 의로 평생토록 주님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또 날마다 돋는 해로 비추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평강 가운데 인도함 받는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뿔, 돋는 해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감사하고 기쁨으로 예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