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의 무게 / 송 연 희
늦은 저녁, 노포동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내 옆자리에 여승이 와서 앉는다. 스님의 승복이 가을에 입기에는 서늘해 보인다. 슬쩍 스님을 보니 마른 목이 길다. 서너 정거장을 지나자 초조한 듯 핸드폰을 연신 바라본다. 커다란 글자가 옆에서도 다 읽힌다. '연산동에서 내려서 안락동 가는 36번 버스를 타고 봉생병원 앞에 내려서 전화하세요'
저런, 길을 가르쳐 준 사람도 부산 지리에는 밝지 않은 듯. 그대로 따라서 목적지에 가려면 한참을 두르게 생겼다. 오지랖 넓은 내 입이 간질간질해서 참을 수가 없다. 어디 가시느냐고 물으니 장례식장에 간다는 대답이다. 같은 사찰에 있는 스님의 모친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부산은 초행길이며 경기도 여주에서 버스를 타고 왔다는데 고단하고 지쳐 보였다. 나는, 그렇게 가시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들다. 동래역에 내려서 4호선으로 환승하면 금방 갈 수 있다고 자세히 설명을 해드렸다. 내 말을 듣는 스님의 표정이 아는 듯 모르는 듯 애매하다. 괜히 조바심이 났다. 초행길은 누구나 서툴고 낯설다. 더욱이나 밤이 아닌가.
"스님, 저랑 같이 내리셔요." 스님이 말없이 따라 내리며 동래역이라면 온천이 있는 곳이냐고 묻는다. 아마 동래온천은 들어서 아는 것이리라. 지하철을 내려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뒤돌아보니 스님은 종종걸음으로 따라오고 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둥그레한 달도 따라온다. "구월 열이레라요." 스님이 달을 쳐다보며 말했다. 열이레···,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스님을 보며 웃었다. 따라 웃는 스님의 미소가 건조해 보였다. 문득 미소 속에서 스님의 시장기를 읽은 듯했다. 저녁을 사 드릴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앞장서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 오지랖도 참.
4호선 안락동 방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스님, 충렬사역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 스님이 바랑 속을 뒤적이더니 부채 하나를 꺼냈다. "드릴 것이 이것뿐이네요."
나머지 말은 눈빛이 대신하고 있었다. 안도와 미안함과 감사의 말들이 얹힌 눈빛의 무게가 고스란히 내게로 건너왔다. 새삼 스님을 바라보았다. 엷은 미소 안에 범접할 수 없는 기품. 불시에도, 저런 순발력에 마음 씀이라면 어떤 심성을 가졌는지 알 것 같다.
이럴 때 내게 스님의 부채 같은 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가방 안에 스카프라도 들어있어 스님의 마른 목에 둘러드리면 마음이 가벼울 것을. 짠한 마음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달력을 보다가 가끔 음력을 더듬는다. 열이렛날을 손가락으로 짚어보기도 한다. 스님의 부채는 내 책상 위에 다소곳이 놓여 있다. 한 여승의 고운 손때가 묻어있는 작은 부채. 부채를 펴면 고적한 산사의 바람 소리가 들린다. 수행자의 고뇌와 외로움도 손끝에 전해진다. 어느 가을밤의 짧은 이야기를 소롯이 담고있는 듯한 부채의 표정. 그 안에는 내 가슴으로 전해지던 저릿한 눈빛이 있다. 오는 여름에는 저 부채를 가방에 넣고 다니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