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서 사우나는 열린 공간이다. 적절한 온도 유지를 위해 문은 꽉 닫아놓고 있지만 들어가 보면 의외로 탁 트인 느낌을 준다. 적어도 내가 다녀 본 오클랜드 지역 사우나들은 대부분 그랬다.
우선 남녀가 한통속이다.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남녀 구분 없이 좁은 공간에 앉아 뜨거움의 묘미를 함께 나눈다. 이민사회답게 인종도 다양하다. 북유럽 등 사우나가 일상인 추운 나라 사람들도 있지만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온 이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기후가 온화한 뉴질랜드 땅에서 어떤 이유로든 뜨거움을 맛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사우나만큼 가성비가 좋은 곳도 없는 듯하다.
수영장 부대시설인 사우나는 낯선 사람들과도 비교적 쉽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다. 사랑방 같은 분위기라고나 할까. 이용객은 수영장 회원들이 대부분이지만 처음 오는 사람도 좁은 공간에 앉아 인사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화의 물꼬가 트인다. 주제는 날씨부터 가족 얘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낯이 좀 익어지면 사회와 국제 문제도 얼마든지 오갈 수 있다.
물론 개중에는 눈을 지그시 감고 땀을 뻘뻘 흘리는 묵언 수행자들도 있긴 하다. 언어가 장벽이 될 수도 있겠고 마음을 다른 곳에 놔두고 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평화로우면서도 뜨거운 삶의 순간이 어느 한쪽에 의해 손상되거나 방해받는 일은 거의 없다.
나는 사우나의 그런 분위기를 누구보다 좋아하지만 이민 생활 초기에 무심코 저질렀던 실수는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느 날 내가 사우나에 들어가자 여기저기 앉아 있던 대여섯 명의 남녀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하나 둘 밖으로 빠져나갔다.
잠시 후 혼자가 되었을 때 근무자가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달려와 불만 신고가 들어왔다고 알려주었다. 영문을 몰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는 문 밖에 선 채 ‘마늘’이라는 단어를 꺼냈고 나는 그제야 점심에 먹은 마늘장아찌가 사단임을 깨달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우나의 열기와는 또 다른 종류의 뜨거움이 나를 휘감았다. 마늘냄새라는 게 양치질을 한다고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고 웅녀의 피가 섞이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사건의 충격이 내심 컸던지 나는 한동안 사우나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른 수영장으로 옮겨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는 건 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운동으로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찾은 건 새로 시작한 일 때문에 매일 수영장 앞을 지나다니게 되면서부터였다. 아직도 옛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뜨거운 사우나의 세계로 조용히 다시 진입할 수 있었다.
오히려 조금은 환영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케이팝 등 한류 바람 덕분인지 남북한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더듬더듬 한국말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서울에 가봤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치만 먹어도 혹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건 아닌지 몸을 사리던 내게 자부심을 안겨준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이 다 듣는 데서 김치를 좋아한다며 엄지 척을 해준 제니라는 중년의 마오리 여자였다.
뉴질랜드에선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나이와 성별, 직업에 관계없이 이름만 부르는 게 관례다. 김창수 씨라 부르지 않고 창수야, 하는 식이다. 사우나가 열린 공간이 될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호칭의 평등성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사회적 지위나 나이에 따른 서열이나 위아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모두 수영복 하나만 걸치고 있으니 속된 말로 계급장을 떼고 만나 누구나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사우나인 셈이다.
내가 하는 사업과 관련해 많은 조언을 해준 마이클도 사우나에서 만나 가까워진 사이다. 젊은 시절 경찰에 몸담았다가 은퇴한 그는 사업할 때 주의해야할 점들을 소상하게 알려주기도 했는데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의 조언은 사업뿐 아니라 살아가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설마하며 무시했다가 큰 대가를 치른 적도 몇 번 있다.
뉴질랜드로 이주한 뒤 십년 넘게 한 번도 고국을 찾지 못했던 내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만 사람이 고향 얘기를 해준 것도 사우나에서였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뉴질랜드로 이주했다는 그는 가족과 함께 한국 여행을 다녀왔다며 제주도 동쪽 끝 일출봉에 올랐던 얘기까지 들려주었던 것이다. 먼 나라의 조그만 사우나 안에서 다른 나라 사람에게서 듣는 고향 얘기는 조금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알고 보면 세상은 의외로 좁아 제주도에 가본 사람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 살며 영어를 가르쳤던 영국 청년도 있었고 서양식 목조주택을 지으러 갔던 뉴질랜드 목수도 있었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그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오래 전 떠나온 고향이, 그리고 조국이 세계인들의 가슴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아 내가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소말리아인지 탄자니아인지 지금은 나라 이름도 헷갈리지만 차가운 음료를 전혀 입에 대지 못하던 아프리카 난민 출신 젊은이도 사우나에서 만난 사람 중 하나다. 목마를 때 콜라도 뜨뜻미지근한 것만 찾던 그는 생활 속에서 누구보다 이열치열을 가장 확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의 초일류 기업에 취직하는 게 꿈이라던 그의 소망은 이루어졌을까.
뜨거움과 땀의 행복을 내게서 빼앗아 간 건 육년 전 연말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이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도 그만 두고 내시경을 받다 위암이 발견됐던 것이다. 위 절제수술을 받고 기나긴 항암이 시작됐다. 병원과 집만 오가는 생활이 이어졌다.
항암을 하면서 속이 메스껍고 음식을 넘기기 힘들 땐 뜨거움을 견디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듯 모래시계를 뒤집던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어느 덧 사우나의 열기가 시간의 수레바퀴 아래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고 있었다. 암과 싸우면서 체중이 이십 킬로 정도 빠졌을 때 사우나에 가도 땀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농담하자 아내는 아직도 사우나를 잊지 못하고 있느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삼년 가까운 투병생활을 끝내고 거울 앞에 서자 정말 사우나는 더 이상 갈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십 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와 함께 등에 달라붙은 뱃가죽은 탄력을 잃었고 복강경 수술자국은 복부 여러 곳에 단추 구멍처럼 선명했다. 그나마 칼자국이 길게 남는 개복수술이 아니었던 건 천만다행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걸까.
아침마다 팔굽혀펴기를 하는 나를 지켜보던 아내가 어느 날 불쑥 수영장 회원권을 내밀었다. 수영장과 헬스장과 사우나. 잃어버렸던 추억을 되찾은 것 같은 기쁨이 몰려왔다. 운동만이 살길이라는 아내의 말은 나의 생활신조가 되었다.
전에 입었던 수영복이 헐렁헐렁해져 남의 옷처럼 보였지만 수영장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사우나부터 찾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실망스럽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내가 병치레를 하는 사이 시간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외 없이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격세지감, 상전벽해라는 말로 가슴 속 구멍을 메워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나도 묵언 수행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사우나 마니아를 자처하던 홍콩사람 알렉스를 다시 만난 건 큰 행운이자 기쁨이었다. 전에는 주로 오후에 수영을 했으나 지금은 오전반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내가 갑자기 사라져 사람들이 무척 궁금해 했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입원실로 사람들이 우르르 병문안을 와준 것처럼 고마웠다.
그러나 슬픈 소식은 허리가 꼿꼿했던 마이클은 건강이 나빠져 요양원으로 들어가고 식당을 하던 남아공 사람 토니는 부인과 사별하고 딸이 있는 호주로 건너갔다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상실감이 밀려왔다. 풍경처럼 스쳐가던 인연들이 큰 기쁨도 되고 슬픔도 되는 게 삶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이가 들었다는 뜻일까.
그날 밤 나는 마이클과 토니, 제니 등 추억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과 사우나에서 감질나게 흘러내리는 모래시계를 뒤집으며 아이들처럼 누가 오래 버티는지 시합하는 꿈을 꾸었다.
사우나의 세계는 꿈속에서도 여전히 뜨거웠고 창밖의 수영장 풍경은 평화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