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 / 「의자, 출렁이다」
내면을 흔들어
질문하고 답하고 소리치고 내동댕이쳐, 부스러진 껍데기 파
편을 버리는 중이다
비틀린 모서리 핏빛 관절을 못질하여 하나의 의자로 깊이를
파내는, 끙끙 앓는 사랑 망가진 시간 틈에 끼어들어 고뇌와 고
심을 앓는 병 영靈은 쓸쓸해지고 겉은 후패朽敗하여 낡아가는
여백
깨끗한 손이 마디 없이 투명하게 얽힌 긴 끈을 끌어다 모든
삶을 엮어내는 그의 영혼 속에는 별들의 일상이 치열하게 반
짝이는 푸른 갈등, 무궁한 힘으로 끌어당겼다가 놓았다가 삐
걱거리는 소리를 깨끗이 떨궈낸다
편한 팔걸이와 등받이 높이를 버리고
하늘을 깊숙이 받아들이는 우물은 지상에 가장 큰 의자가 된
다
- 장욱 「의자, 출렁이다」 전문
『태양의 눈 기억함을 던져라』
<감상문>
인간의 본성인 선의 기준은 무엇인가? 인간인가. 창조주인가?
의자는 편한 팔걸이와 높은 등받이가 있다. 의자란 무엇인가? 화자는 지상에서의 권세를 상징하는 의자의 내면을 흔들어 질문하고 답한다. 소리치고 내동댕이쳐, “부스러진 껍데기 파편을 버리는 중이다”
화자는 지상의 권세란 궁극적인 구원을 방해하는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망가진 시간 틈에 끼어들어 고뇌와 고심을 앓는다.
화자와 의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보는 자로서 화자와 사물로서 의자 사이에 살의 두께가 있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프. 1908~1961)는 “살”에 대해 설명한다. “그것은 보는 자와 사물 사이에 있는 살의 두께가 보는 자에게 속하는 신체성의 구성적 요소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 살의 두께가 사물에 든 가시성의 구성적 요소인” 것이다. “살은 보는 자와 사물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고 말한다.
편한 팔걸이와 높은 등받이는 의자의 구성적 요소이다. 살로서 의자는 권세이고 권력 투쟁이고 피비린내이다. 이것이 의자가 지니고 있는 살의 속성이며 살의 두께이다. 이와 같은 요소가 의자를 바라보는 화자의 내면에도 자리하고 있다. 사람의 살에 피비린내 나는 의자가 축적되어 살의 두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살의 불편한 수단으로 인해 화자는 3연에서 “비틀린 모서리 핏빛 관절을 못질하여 하나의 의자로 깊이를 파내는” 중이다.고 피력한다. 즉 의자의 깊이가 살의 두께이다. 핏빛 관절 속에 내재 되어 있는 의자의 살을 파내는 것이다. 모든 삶을 엮어내는 영혼 속에는 별들이 화자의 질문에 답하느라 치열하게 반짝이는 갈등을 한다. 사랑은 끙끙 앓는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의자의 요소는 모두 떨궈낸다. 영(靈)은 쓸쓸해진다
편한 팔걸이와 등받이 높이를 파괴해버리고 대신 우물을 세운다. 살로서 우물이란 무엇인가? 우물은 사람이 만든 삶의 터전이며, 육체적 생명의 식수원이다. 우물이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 우물은 또한 한 마을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체적인 삶이며 공동체의 의식이 함의 되어 있다.
하늘을 받아들이는 우물을 세울 때 지상의 우물과 하늘 사이의 수직 통로가 열린다. “하늘을 깊숙이 받아들이는 우물은 지상에 가장 큰 의자가” 되는 것, 이것은 권세의 의자를 해체하고 우물을 세우는 시인의 전략이다. 우물은 더 큰 의자가 되어 출렁이게 된다.
여기서 하늘은 물질적인 하늘이 아니라 영적 존재로서 창조주인 하느님을 상징한다. 이때 “하늘을 깊숙이 받아들이는 우물”은 소통의 역할로써 화자에게 새로운 살을 형성한다. 즉 인간 중심이 아닌 절대자인 창조주께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이러한 의지는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돌은 날개의 꿈속에 시간을 품고 있다” “돌 속에 갇힌 시간 꼬부라진 고리가 별빛 반짝이는 맥박 소리를 붙잡고 숨뿌리 끝을 잡아당기면// 검은 고독을 뚫고 흰 학 긴 다리 껀-정-껀-정- 걸어 나올지 앵두꽃밭 앵둣살 톡톡 쪼아 붉은 피 흘릴지// 돌은 돌의 심장 속에 영원을 품고 있다”(「돌은 영원을 품고 있다」)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심장에 영원을 품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4연에서 “긴 끈을 끌어다 모든 삶을 엮어낸다”고 끈을 언급했으며, 그것은 또한 “목숨의 길이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실의 힘이 나를 끌어당”(「실의 노래, 파랑 분홍 사이 봄이 온다」)기기 때문이라고 실을 언급한다.
그러한 영원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물질적인 우주는 유한하다. 현실적인 무한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간은 끝없이 흐르므로 잠재적으로 무한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한 시간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현실적인 무한과 잠재적인 무한을 구별한다. 인간의 인식 능력을 벗어난 무한은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무한이란 단어는 오직 신의 몫으로 남겨두자”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도 그 한계를 알지 못하는 대상은 신 뿐이다. 무한은 신의 몫이다. 셩경은 인간의 사유의 한계를 초월한 절대자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공의 성품을 기록한 역사서이다. 창조주로서 신은 인간에게 정하신 때가 되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영원성을 약속해 주고 있다.
시인은 노래한다. “빛은 스스로 존재한다// 저 명쾌한 진리를 깨닫기까지 지혜와 사색의 향기 혼돈의 그릇을 내부쳐 깨트리는 아침 햇살 흰 손// 나의 뜰 깊숙이 가늘고 긴 손가락을 뻗어 나무 나무 풀잎 풀잎 파르르 떨리는 심장을 주무른다” (「압화(壓畵)」) 고,
하늘과의 소통은 결국 인간의 근원지는 하늘이며, 삶의 행복과 지혜도 하늘에서 내려옴을 상기하게 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빛이란 자연으로서의 빛을 의미하지 않고 빛으로 표상되는 영적인 존재자로서의 창조주를 의미한다. 인간의 본성과 선의 기준은 하늘로 표상된 창조주이다.
장욱 시인은 시집 『태양의 눈 기억함을 던져라』 ‘시인의 말’에서 영원성에 대한 도전에 대해 “현실의 강을 건너 내세로 현재를 넘어 미래로 던져지는 존재, 영혼의 자유를 꿈꾸는” 시적 지향을 가지고 있음을 표명했다. 인간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존재의 환경은 변해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인간의 변하지 않는 아이텐티티(identity)를 인식하고 있다.
감상자 –이구한
첫댓글 가입하여 이구한 선생님의 평론 잘 읽어 봤습니다.
필자인 저보다 깊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시의 위상을 살려 주심 감사 드립니다.
좋은 시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미당문학회 카페 가입 인사 겸 감사 들 올립니다.
두방리에서 장욱
두방리 사랑님
감사합니다
건필을 빕니다
해피!
고덕산에서 이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