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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의 율례를 배웠나이다.
(로마서 15 장)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책망 하시고 강권하시는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 * --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 됨을 위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교회들을 향한 권면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 교회가
또 우리 가정이 우리 부부가 온전히 하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 그리스도처럼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 온 지역을
두 발로 직접 걸어 다니시며 한 영혼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생명수와 같은 말씀을 전하시면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수 많은 병자들이
찾아왔을 때 외면하지 않으시고 고쳐주심으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
하려고 헐뜯고 싸우는 12제자들을 보시면서
실망하기보다는 그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시면서 섬기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섬기셨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아직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으로 격려해주고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 그리스도처럼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목이 뻣뻣해서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낮출 때에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지만 겸손함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부부 간에도 갈등이 생겼을 때
어느 한쪽이 빨리 사과를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은
얼른 용서하고 겸손함으로 받아들여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갑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인간관계에서든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 모든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 그리스도처럼 용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납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를 용납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련하고 완고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셨습니다.
내가 믿음이 연약하여 때로 주님을 실망시키고
가슴 아프게 했을지라도 주님은 끝까지 참아주셨습니다.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나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의 허물과 부족함을 용납해야 합니다. 그와 내가 생각과
습관이 다른 것을 이해하고 용납하여 하나됨을 회복해야 합니다.
1.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함.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로마서 15 :1-2)
강한 자’는 지식이 있고 믿음이 강한 자를
가리키고 연약한 자는 그렇지 못한 자를 가리킵니다.
교회 안에는 진리의 지식과 믿음의 정도가 다른 자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배려하고 그의 유익을 위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2. 예수님처럼 섬겨야함..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로마서 15 :3-4)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일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범이 되십니다. 그의 삶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이 아니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하나님의 진리들을
가르치시고 많은 불쌍한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일들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에게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다면, 제자된 우리도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도
우리들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 살지 말고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일들은 다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위한 것이지만,
이미 믿고 구원얻은 이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때때로 고난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실들을 알려 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고 또 위로를 줌으로써 미래의 소망을 든든히 붙잡게 하십니다.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로마서 15 :5-6)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들에게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과 같은 입을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주기를 기원합니다.
성도의 교회 생활에는 일치가 필요합니다.
그 일치는 단순히 외형적 조직의 일치나 겉모습의 일치가 아니고,
일치된 신앙고백으로 표현되는 생각과 사상의 일치이어야 합니.다
사도신경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과 같은 진정한 일치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란 1647년 스코틀랜드
의회의 승인을 받은 이후 오늘날까지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
교리를 담은 탁월한 교리서로 장로교의 표준 신조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고린도전서 1 :10)
그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이 가능한 일치입니다.
3. 예수님처럼 서로 용납해야 함.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로마서 15 :7)
우리가 과거에 만가지로 부족한
죄인들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납하셔서 구원
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런 저런 약점들을 가진 형제들을 용납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이단을 용납하라는 말이
아니고, 성경에 명백히 계시되지 않은 문제들이나 신앙의
지엽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용납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5 :8-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으셨으나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견고케 하시고 특히 할례
없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증거하기 위해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방인들은 할례 없는 자 즉 하나님의 언약에서
제외된 자들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게 되었습니다.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
으며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로마서 15 :10-12)
예수님이 이새의 뿌리 곧 다윗의 후손에서
열방을 다스리는 왕으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에는 열방들이 예수님에게 소망을 두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11 :10참조)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세계만민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5 :13)
바울은 첨가하여 소망의 하나님께서
믿음 안에서 모든 기쁨과 평강을 그들에게 충만케
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에게 소망을 넘치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절망은 슬픔과 불안과
근심 걱정을 가져오지만, 소망은
기쁨과 평강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영광스런 천국을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그 영광스런 새 세계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소망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참으로,
성도의 삶은 미래의 것을
소망하는 삶일 뿐만 아니라, 현재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바로 이런 복된 삶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또한 그의 성령을 위로자와 격려자로 우리 속에 주셨습니다.
기쁨과 평강과 소망의 충만,
이것이 성도의 정상적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은혜를 충만히 주시기를 바랍니다.
4. 나는 예수님의 일군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
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로마서 15 ;14-15)
사도 바울은
로마 교인들이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서로 권할 수 있는 자들임을 확신하였습니다.
선함은 성도의
특징입니다. 지식도 겸손과
절제를 동반할 때 분명히 영적 성장과 성화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또 서로 권면하는 것도 영적
성장의 결과입니다. 선함이 가득하고 또
모든 지식이 차서 서로 권면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이 복음에 대해 이미 알고 있고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에게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담대히 몇 마디 썼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의 겸손한 태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처음 배울 때도 있지만, 늘 새 것을
배우지는 않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미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아는 것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태도로 겸손히 피차 무엇을 권면해야 하고 또 아는
내용일지라도 복습하는 태도로 감사히 듣고 또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15 :16)
바울 사도는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도는 권위 있는 직분이지만 일꾼이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봉사의 직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으셨고 섬기러 오셨습니다.
친히 자기 목숨을 우리의 대속물로 주신 주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바울은 또한 자신의 사역을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전도 사역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의 제물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5. 예수님의 일군은 주님을 자랑함.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 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로마서 15 :17-18)
바울의 전도 사역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의존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하여 역사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시기 위함
이었고, 그 방법은 말과 행위로, 기적들로, 성령의 능력으로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말로만 전파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말씀과 더불어 활동하십니다.
외적 기적들은 교회 안에서
오래 전에 사라졌을지라도 사람들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역사는 교회 역사상 계속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이 내면적 역사를
더 귀하게 여기며 사모해야 합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죄인들이 영적으로 거듭나고 자라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
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
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5 :19-21)
일루리곤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북서쪽 해안 지방이며 그 서쪽 바다 너머에 로마가 있습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전도 활동을 시작했던
바울은 소아시아는 물론,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 그리고 이제
그 지방의 북서쪽 해안에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충만히 전파했습니다.
바울은 특히 복음이
이미 들어간 지역은 피하고
복음이 전혀 들어간 적이 없는 곳을 찾아 개척 전도에 힘썼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전도의 열심과 개척 정신은 오늘날 모든
전도자들의 표본이 됩니다. 교회는 힘을 다해 복음을 전파해야 하고
특히 복음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곳들에 전도자들을 파송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로마서 15 :22-23)
인간의 소원과 하나님의
뜻은 때때로 다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로 가려고 소원하였지만, 그의 소원은 여러 번 좌절되었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소원이 죄절되었을 때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그의 처한 일터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기의
일을 등한히 하며 다른 큰 일만을 꿈꾸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일이 맡겨지는 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처한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의 최선을
다하는 동안에도 줄곧 로마로 가려는 소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의 미래의 전도 계획은 로마를 거쳐
당시의 세계의 서쪽 끝인 서바나 곧 스페인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소원이었고 그의 사명의 계획이었습니다.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
(로마서 15 :24)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며 힘을 얻고
그리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전도자들에게는 때때로 성도들과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 교제는 피차에게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6. 예수님의 일군은 주는 삶을 실천함.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
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로마서 15 :25-26)
바울 사도에게는 복음 전도가
가장 중요한 사명의 일이었지만, 또한 그는 구원
받은 성도의 믿음과 사랑의 열매인 구제 헌금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성도의 구제 헌금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마음과 말로만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표시는
시간과 수고를 드리는
것으로 나타나며 또한 당연히 물질을 드리는 것도 포함할 것입니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로마서 15 :27)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 돕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이방인 교회들은 유대인 교회에게 빚진 자들이었습니다.
이방인 교회들은 유대교회를 통하여 신령한 것 곧 구원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회가 어려울 때 그들을 육신의
것 곧 물질로 돕는 것은 이방인 교회들의 당연한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줄을 아노라"
(로마서 15 :28-29)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의 구제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사랑의 열매인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성도들의 사랑을 확증한 후 로마를
지나 서바나로 가려고 계획했습니다그때 그는 로마 교인
들에게 충만한 축복, 곧 말씀의 축복을 가지고 갈 것을 확신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로마서 15 :30)
바울 사도는
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권위로나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또
성령의 사랑을 힘입어서 피차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무슨 용기로 권면하며 무슨 용기로 기도 요청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그들이 그와 힘을
같이하여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비록
한 자리에서 기도할 수 없을지라도 합심하여 기도하기를 구한 것입니다.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로마서 15 :31)
성도에게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교회들을 위해 더 살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위해서와 하나님의
복음과 그의 교회를 위해서 살 이유와 의미와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의 뜻 안에서
우리의 목숨을 취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뜻에 순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대한
섬기는 일, 곧 바울의 구제헌금
전달의 일이 성도에게 받음직하게 되게 해주시기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구제 헌금이 구제하는
성도의 자랑이 되지 않고
구제받는 성도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해지기를 구했습니다.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게 계실지어다 아멘"
(로마서 15 :32-33)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가 그들에게 나아가기를 구합니다
로마로 가기를 원한 바울의 소원은 몇 번 좌절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소원은 좌절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
‘평강’이란 말씀은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안정을 다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입니다.
평강과 반대되는 말은 마음의 불안과 슬픔과 우울함,
몸의 질병과 고통, 물질적 궁핍과 곤란, 사회적 불안정과
전쟁, 지진, 기근 등의 불행한 재난들일 것입니다. 참된 평안은
죄를 떠난 삶,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에서만 기대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을 섬기는 일에 전심을 다하셨습니다.
온 땅을 두루 다니시며 한 영혼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전도하셨고 병자들이 찾아오면 외면하지
않으시고 고쳐 주심으로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배고픈 무리에게는 떡과 생선을 떼어주시며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섬기셨습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서로 헐뜯고 싸우는 제자들을 보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섬기던 사랑의 주님을 우리모두가 기억합니다.
우리도 예수님 처럼 나를 기쁘게하고 나의 유익을
챙기기 보다는 남을 기쁘게 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며 믿음과 육신이 연약한 자가 있으면 서로
돌보며 사랑으로 섬겨야 함을 깨닫고 행하는 우리 모두
되도록 성령님 인도하시고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 8. 29. -샬롬- 예수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