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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향한 서론
작별의 인사로 예의 있는 고백.
크고 깊은 지혜를 흘려 보내며 느끼는 감정들.
앞으로는 숨을 쉴 때에도, 길을 걸어 갈 때에도 생각하게 될 마음 한 켠의 작은 단칸방.
누가 우리를 찾습니다. 나갈 채비를 합니다.
여러 물 줄기들, 내 손에 잡히지 않는 불빛들, 공허와 두려움 속에 외치는 속 짧은 이야기들.
문 뒤에는 항상 가면이, 하지만 항상 같은 존재가. 문 앞에는 나만이, 그 속에는 수많은 시선들이.
우물. 텅 비어 끝 없이 땅에 꺼져 있는 것. 기도라는 괴성을 질러도 들리는 것은 메아리. 우물. 당신은 무엇입니까. 질문이 아닌 혼잣말. 답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누군가 연민을 느낀 것인가, 혹 그저 나의 불만족의 결실인가. 물이 부어진다. 깊고 깊은 우물 속에 아주 많은 담담하고 맛 좋은 물이. ‘채워 지긴 글렀네’ 우물을 채운다는 멍청한 발상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까?
소리 소문 없이 쓰러져 있는. 태양의 아래에 쓰러져 있는. 아름다운 얼굴. 복스럽게 올라온 볼과 배. 좋은 머리. 흐르는 피 눈물과 축 쳐져 있는 입 꼬리. 그는 누구인가. 최고봉. 그 자리에 올라선 사람 아닌가.
난 당신을 따라. 당신은 그를 따라.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따라.
돌고 돌아 무로. 세상의 모든 것이 합쳐 놀라운 업적 그 업적은 결국 무로. 모든 형상이 모여 그림자를 만든다. 모든 지혜가 합쳐져 무지를 낳는다.
누가 우리를 이끌겠습니까. 누가 무를 유로 만들겠습니까. 누가 나의 푸념을 바꾸겠습니까. 누가 나를 돕겠습니까. 누가 나를. 내가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을 때 누구를 탓하며 내가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을 때 누구를.
그래요 이런 생각이 나를 더욱 무지로. 당신은 나를 어디로.
일 년을 마무리 하는 날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청년들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무어라 말할까. 낭만의 시기라 부를 수 있는 때에 그들은 절망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화려하게 마무리 된 무대, 커튼 콜이 끝나고 난 후 이제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라고 외치는 무대 연출 감독. 그 감독에게 귀가 터지도록 잔소리를 듣는 배우의 얼굴이었다. 무어라 말할까. 그들은 모르는 눈치였다. 멀리 서 본 사진 작가에게는 아름다운 풍경 속 주연으로 찍을 만한 멋진 청년들이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은 하나의 비극의 서막을 알리는 무대에 서있는 덩컨 왕 같은 것이었다. ‘오늘은 누구의 손에 찔려 죽어야 하나’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연말은 설렘의 시간이다. 많은 휴일과 함께 일년 간의 훌륭한 추억을 되새김질 하며 다음 연도 초의 계획을 새워본다. 하지만 청년들에게는 어떤 추억도 계획도 없었다. 다신 자신에게 부여된 현실속에 철저히 갇혀서 하늘을 보지 못하고 있다. 아마 그들은 지금이 연말인지, 연초인지 몇 년인지 이런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연말은 참담한 현실이 가장 잘 들어나는 시기이다. 과거의 추억과 미래에 대한 무책임한 계획. 그 사이에 껴 있는 나 자신을 볼 때면 가장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인생을 계산 해 낼 수 있다. 그들은 바로 그 시간 속에 있다. 계산의 시간. 인간적인 감상은 들어 설 수 없는 불가지한 시간이다. 분해와 통찰과 자책. 이것들이 어우러져 내 안에 있는 소망이라는 이름의 환상을 크게, 넓게 부셔낸다. 분 단위, 초 단위 혹 그보다 더 세밀한 단위로 크게 넓게 부시고. 무덤덤한 표정 속에는 일그러진 분노와 저절로 입이 무거워져 내리는 혼란과 고민들이 섞여 있다. 얼마나 괴로울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술을 마셨을 것이다. 안쓰럽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도와주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의식이 없는 중병환자일 것이다. 현실속에 제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저런 사치스러운 말은 허락 될 수 없다. 회피할 뿐인 고민과 고통의 구렁텅이가 자신과 저 청년들 속에 똑같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이 없다.
벤치 중간에 앉아 있던 청년이 일어나며 말했다. “어디로 갈까요, 어디로.” 그 말을 듣고 있던 양 옆의 청년은 웃음을 지었다. 시험에서 나왔던 일본 한 시의 구절이었다. 나이스한 사람이었던 오른쪽의 청년은 대꾸하여 말했다. “저리로 가거라, 멀리.” “하지만 저기는 덥지 않습니까?” “그럼 여 쪽 끝은 어떤 가? 저 끝.” “이보쇼. 저기는 춥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웃음기도, 시 특유의 곡조도 없는 재미없는 시 읽기였다. 다만 생각할 것은, 시험의 중요 부분도 아니었던 시. 갑자기 입 밖으로 나온 까닭,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까닭. 읽지는 않았다. 각자 말할 뿐이었다.
수 초가 지나고 왼쪽 청년이 갑자기 입을 땠다. 자신 오른편에 아직 남아있던 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이쪽으로 오라, 내 곁으로.” 시에는 없던 구절이었다. “왜 이리 치근 덕 거리 십니까?” 오른쪽 청년이 갑자기 끼어들며 말했다. 아마 그 둘이 남자이고 가운데의 청년이 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이쪽으로 오라, 내 곁으로.” 여자가 말했다. “아까도 있지 않았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기다 답을 찾았다. “조금만 더 깊이, 엉덩이 딱 붙이고 있어 보라.” “싫어 거긴 답답해.” 다소 시를 읽던 목소리와는 좀 달랐다. 정말 그냥 말이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한번 피더니 몇 걸음을 앞으로 뛰어 갔다. 해방감을 느꼈을까? 혹은 찝찝함? 결국 공허를 느꼈을 것은 확실했다.
누군가가 말하였다.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그에 대한 선생의 답은 없었다. 애초에 선생이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다짐하듯 던진 혼잣말이었던 것이다. 자기 객관화 만이 최고의 선생이다. 그리 생각한 끝에는 자신의 연약함 만이 보였다 보다. 그렇게 선생을 찾기 위한 여정 아닌 여정을 떠났을 터이다.
지나가던 사람이 말하였다. 저기 저 노숙자는 누구냐고. 어떤 이가 대답해 주었다. 노숙자가 아닌 나그네라고. “뭐가 다른 겁니까?” “아무것도요. 하지만 신념이 있다고 우기니 취급은 해줘야지요.” 무슨 신념일까? 진리를 찾겠다는 것? “하긴 우리에게서는 그런 감정을 찾기 힘드니 좀 대단해 보기도 하군요.” 내게는 인생이란 벽이. “전 별로 좋게 보진 않아요. 무슨 노숙자니, 나그네니 그 딴 건 말장난 아닙니까? 저희는 인생을 살아야지요. 밭을 갈아야지요.” 그냥 욕하는게 아니라. “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잖아요. 어찌 좋게 보겠습니까?” “저 사람이 밥을 축냅니까? 우리에게 뭔가 좋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겁니까?” 맑은 하늘 아래 누더기 옷을 입은 사내. “보기 안 좋지 않습니까? 그러고 서는 혼자서 중얼중얼 말 만하고 말입니다. 이미 아무것도 안하고 노는 것부터 우리에게 쓸모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그네라는 이름의 노숙자, 어디서 왔습니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자신의 누추한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입을 땠다. “지금 나를 말하는 거요?” 달리 누구겠는가. “나는 나그네도 노숙자도 아니요, 그저 저들이 유흥거리 욕 받이로 날 그리 부르는 것이지.” 그래서 어디서 왔는가. “집에서 왔지요.” 왜 왔는가. “진리를 찾으러 왔지요. 정확히는 진리를 말해줄 선생을 찾으러 왔지요.” 나그네라 함은. “진리가 없으면 이 자리를 떠날 것이요. 선생이 없어도 여기를 떠날 것이요. 그냥 그렇게 마을 몇 곳을 떠돌아 다녔지요. 그 뿐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찾았습니까?” 원래는 비단 옷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누더기. 그 옷의 묻은 여러 종류의 흙들이 답을 대신한다. “여기서도 못 찾으셨습니까?” 포기는 하지 않았다. “아직은 모르죠. 누가 압니까? 혹 당신이 나의 선생일지.”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혹시 지금까지 찾은 진리를 말해주겠소?” 진리는 얻지 못했다는 변명과 자아 성찰의 시간. “대신 얻은 것은 나 자신의 불만족과 그로 인한 소망이죠.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끔과 핑계, 힘과 모든 것이 이루어짐, 희생과 도움, 용서와 사랑, 불만족의 우물이 채워지길 또한 내가 누군가에게 그리 할 수 있기를. “만약 진리가 존재한다면 이 모든 것의 해답이겠지요.” 이해를 하고 싶어서 허벅지를 손으로 쌔게 치며 생각해본다. “해답을 찾으려 뭘 하셨는데요?” 아무것도. 그것이 답이었다. 본인이 생각하여 추하게 보였는지 입은 옹졸하게 닫고. 대화가 거듭 나며 밝혀지는 무지함과 연약함. 신세의 한탄과 바라기만을 좋아하던 나그네는 철저히 짓밟혀 무능력한 노숙자가 될 따름이었다. “배우기라도 하시지요. 몸을 가꾸고 마음을 다잡아 사람이라도 만나시죠. 멀리서 욕하지만 마시고 직접 뛰어 보시죠.” 고개를 끄덕이며 깨닫는다. “이것이 나를 향한 진리군요. 하나씩 가꾸기를 시작하면 언젠가는 도달하겠지요. 일단 움직이는 것이 산 정상으로 향하는 첫번째 규칙이겠지요.”
성인이 있었다. 배움의 뜻을 둔 학도들이 모여 그 앞에 엎드렸다. 떠돌이에 불과하였던 한 천한 놈이 이제는 덕을 깨달어 자리에 올라 사람들을 내려본다는 소문은 누군가에게는 그저 이야기 거리, 비난 거리가 될 지 몰라도 주의 깊게 사실에 집중하여 무엇이라도 얻으려 했던 겉도는 자들에게는 굉장히 새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나는 나그네요, 속 된 말로 노숙자였습니다. 하지만 잘 아시지요? 저는 이제 누군가에게 선생이라 불립니다. 저는 진리를 찾아 다니고 그 진리를 가르쳐줄 선생을 찾아 다녔습니다. 근데 보십시오! 내가 바로 그처럼 되지 않았습니까?” 모든 사람이 주목하여 귀를 기울인다. 그들은 눈에는 한 가지 질문만이, 진리 그 해답 만을 찾고 있다. “진리요? 그것을 말하기 전에 먼저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길을 나서기 위해 발걸음이라도 땐 적 있습니까? 난 진리를 찾는 기간 동안 무엇을 한 줄 아십니까? 노망난 노인처럼, 뭣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계속 놀 뿐이었습니다. 그저 진리를 찾고 있다는 그 말 뒤에 숨어 나태함으로 사치를 부렸습니다. 이딴 것은 사실 진리를 찾는 기간이 아닌 나태함에 찌들어 시간을 날려버린 허송 세월입니다. 비로소 내가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한 것은 당연한 배움의 길을 닦고부터, 조금 더 고개를 들어 세상을 봤을 때입니다.”
박수 갈채 뒤에 숨은 의문들. 성인으로 불리는 나그네 또한 느꼈었던 진리를 찾는 이유, 그 불만족이 과연 채워집니까? “그거 좋은 질문이로군요. 일단 충고 드릴 것은 여러분은 일하십시요, 다른 말로는 배움의 뜻을 두십시오. 제가 보여준 이 길을 한번 걷기나 해오십시오. 그리하면 만족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고는 세상을 보십시오! 또한 세상 속의 다른 사람을 보십시오. 내가 아 자리의 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세상을 보고 사람과 대화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상호간의 예의를 지키고 또한 함께 배우십시오. 그리하면 더 큰 만족을 얻을 것입니다. 그렇게 점점 커진 만족의 푹 빠져 있으면 배움으로써 지식이 해결 되고, 관계로서는 마음 속 불만족을 해결 되고, 서로를 이끄므로 부족함이 해결되고, 예의를 지킴이로 도덕이 해결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의 형태가 아니라 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진리이겠습니까?
무엇을 말하리오. 숨기는 것이 차라리 편하게 생각하기에 도움이 될까. “이 책은 솔직히 올바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자가 용기를 내어 꺼낸 말이었다. “다시 읽어 보거라.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하니 아직 닦고 이겨나가야할 도가 많이 남아있구나.” 제자는 고개를 가우뚱 기울였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주장뿐인 겉으로만 멋들어진 책. 어째서 그리 후한 평가를. 제대로 읽기는 한건지. 다음날 그 제자는 새벽 일찍 짐을 챙겨 밖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그릇이구나.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작은 그릇.” 다음날 처음듣는 말을 가르치는 성인이었고, 제자들은 이 가르침을 받아 적었다.
어떤 날은 여인이 찾아와 가르침을 구하였다. 성인을 혀를 찼다. “안되오.” 이유는 딱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 빨리 이야기가 끝날 줄 알고 제자 중 한 명은 선생의 일정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선생과 여인은 나올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처음듣는 선생의 큰 웃음소리와 멋 들게 부르려 애쓰는 노래 소리. 이내 밖으로 나오는 여인의 표정을 썩어 있었다. “안방부인... 아깝네 아 참나 저리 기가 쌔고 성인의 말을 안 들이니... 집에서나 정치로써나 여자는 소인이로구나. 그저 끌릴 것이지 주장은 왜 그리... 참나.“ 제자는 이 말을 받아 적으며 선생에게 들어갔다. 스승의 표정은 씁쓸해 보였다. 전쟁에서 패한 전사처럼.
성인의 눈의 경로를 살펴 보아라. 색욕으로 가득 찬 눈은 항상 여자 만을 쫓고, 그 경로에는 불순함만이 가득하다. 멋들어진 말을 내뱉으며 준비한 책을 읽는 시간에도 머리 속 반 이상은 섞어 물들어진 헛된 망상만이 가득하다. 불만족이 채워지는 진리는 어디에. 지식과 도덕은 어디에. 오히려 부족함을 파고드는 그 교밀함에는 놀라울 따름이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은 그 가르침을 누구로부터 배웠습니까?” “윗 세대의 놀라운 진리의 왕들로부터 이지.” 거짓말. 최소한 여왕이라고 해줄 것을 전부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 여인은 지금 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던지듯이 한 말에 홀린 몇 천 명의 사람의 존재를 알까? 전혀 모르겠지. 그저 밭을 갈 뿐이겠지. 불만족과 두려움을 느낀 채. “그렇다면 그 왕들은 누구에게서 진리의 가르침을 얻었습니까?” “더욱 더 위의 왕들이지.” 그렇다면 그 왕들은 누구로부터 입니까? “답은 똑같다. ”그리하면 저희는 결국 사람이 만든 진리를 따르는 것이로군요. 그렇다면 그전 위대한 왕들은 덕과 지혜를 쌓음으로 진리의 영역의 이르렀습니까? “침묵이 시작되었다. ”우리도 그들도 이미 이르렀을 따름이다.” “제자는 갑자기 화를 내며 말했다. “제가 만약 진리에 이르렀다면 그 누가 진리에 못 이르겠습니까?”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누구든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것이지.” 제자는 혐오의 눈빛으로 선생을 경멸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말의 뜻은 그런 식이라면 이미 모두 진리에 이르렀다는 소리입니다. 제가 선생님께 가르침을 들었던 듣지 않았던, 배움으로 거듭나거나 덕와 예로 거듭나든 안 나던. 전부 똑같은 상태입니다. 아직도 텅 비어 있는 우물. 무슨 종류의 물을 붓던 채워지지 않는 것은 똑같습니다. 까놓고 말하여 살인귀가 살인으로 이 불만족 채우던 제가 옳다 하는 방법으로 곧 배움과 예로 이 불만족을 채우던 결과는 똑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침묵이 유지되었다. “사람이 만든 가치에 어찌 그리 큰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책을 읽으며 배운 것은 이 세상 사람이 주관적으로 내린 결론은 결국 전부 변할 따름이며, 반박 받을 따름이며, 전부 무로 돌아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돌고 돌기도 하지만 결국 돌고 돌아 사라지기 마련 아닙니까?” 성인이라는 이름의 나그네는 소름이 돋았다. 무너 질질 것 같은 이 기분. 제자는 자리를 벅차고 나갔다. 짐도 남겨둔 체 장군의 걸음걸이였다.
하루에 걸쳐 생각해 보았다. 무엇으로 반박을 할까.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다음날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아 손을 번쩍 들어 검지를 펼쳤다. 검지는 하늘을 찌르듯이 가리켰다. 그러고서는 큰 소리로 말하였다.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 예를 알지 못하면 자립할 수 없다. 말을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알 수 없다(20.3).”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루었구나. 본래의 교리와 함께 천명을 가지고 왔구나. “어제의 어리석은 소인은 천명을 조금도 알지 못하였으니 마침내 살인귀와 군자의 방식을 비교하는 구나.” 그를 향해 침을 뱉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제는 성인의 가르침은 종교가 되었다.
우물을 채운다는 멍청한 생각은 누구에게서 나온 건인가? 추운 곳도 더운 곳도 싫은, 답답하게 앉아 공부하는 것도 싫은, 모든 것을 바라는, 내가 탓할 곳, 내가 기댈 곳, 허리를 피고 벗어난 세계는 맑지만 그것 뿐이고 탁 트인 하늘을 봤을 때에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그저 비어 있어서 채워야 하는 대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절망에 빠진다. 최고봉에 선 나는 떨어질 일만 남을 것이기에. 열심을 다하여도 결국은 망가질 것이기에. 누가 모르겠는가. 우물이 가득 하려면 채우는 것이 아닌 땅에서 쏟아 올라야 하는 것을. 인간은 물을 부을 수 있는 힘만 있지 땅에서 물이 쏟아 오르는 것은 하늘의 뜻에 있다는 것을.
내가 누구를 따르겠는가. 인간을, 그렇다면 내가 따른 인간은 어떤 인간을 따랐는가. 결국은 원숭이를 따라야 하는가? 그렇다면 결론은 우연으로 태어난 세상, 결국 무로 돌아가는 것인데 도대체 여기에 무슨 소망이 있으며 불만족을 채울 만한 요소가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 결국 올라가 소망을 갖을 수 있는 신을 생각할 따름이다. 그런 것이다.
결론적으로 도달 한 것은 천명-신의 말씀. 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할 뿐인데 더 이상 뒷이야기가 없구나. 그저 신을 생각해야 한다는 서론에 불과한 이야기였구나. 그렇게 여러 가면을 쓴 한 존재가 문 앞에 서 있구나. 우물. 물이 쏟아 올라야 한다. 그래야 채워질 수 있다. 갑자기 판 땅에서 물이 쏟아 오른 다는 것. 너무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 이기에, 나에게는 땅을 팔만한 힘도 없기에 여러 핑계를 대며 내면의 시선들이 문을 열어 보는 것을, 땅을 파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한다. 나의 우물에 입을 갖다 대고 소심하게 뚝 던져 본 기도문은 결국 메아리처럼 돌아오고 역시나 그렇지 하며 우울감에 빠진다.
“어디로 갈까요, 어디로.” 그렇게 넓은 세계를 바라보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청년은 말한다. 이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교만하고 오만하게. “어디로 갈까요, 어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