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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달리 한국 남자 탁구는 1995년 이전까지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한 번도 입상하지 못했습니다. 이전까지 1969년 뮌헨(Munich) 대회에서 4위에 오른 것이 최고 성적이었습니다. 한국은 1969년 뮌헨 대회 남자 단체전 2 그룹 경기에서 서독에 이어 2위에 오르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3, 4위 결정전에서 1 그룹 2위 유고슬라비아에 0 대 5 완패를 당해 최종 4위에 올랐습니다. 결승전은 일본이 서독을 5 대 3으로 꺾고 최종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 그룹 최종 순위 - 1. 일본, 2. 유고슬라비아, 3. 잉글랜드, 4. 소련, 5. 헝가리, 6. 덴마크
2 그룹 최종 순위 - 1. 서독, 2. 한국, 3. 스웨덴, 4. 체코슬로바키아, 5. 프랑스, 6. 아일랜드
한국은 1995년 톈진(Tianjin)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내며 세계 대회 남자 단체전 사상 첫 입상(김택수, 유남규, 이철승, 추교성, 김봉철)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세계 대회 단체전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룹별 예선, 본선으로 나눠 진행되었습니다. 그룹별 예선은 총 16개 팀을 A 그룹 8개 팀, B 그룹 8개 팀으로 나눠 풀리그로 경기했고, 본선은 각 그룹별 상위 4개 팀이 다시 8강 토너먼트로 최종 우승 팀을 가렸습니다. 한국 남자는 A 그룹에서 이탈리아, 체코, 프랑스, 루마니아, 러시아, 일본, 스웨덴과 경기를 해 5승 2패 조 3위의 성적으로 8강에 올랐습니다. 한국은 8강에서 세이브 형제가 이끄는 벨기에를 3 대 2로 꺾고 4강에 올랐고, 4강에서 왕타오(Wang Tao), 마원거(Ma Wenge), 공링후이(Kong Linghui)가 출전한 중국에 2 대 3으로 패했습니다. 한국은 4강에서 중국에 패한 후, 3, 4위전에서 프랑스를 3 대 2로 꺾고 최종 3위의 성적으로 남자 단체전 동메달을 따냈습니다. 당시, 한국이 따낸 동메달은 세계선수권대회 사상 첫 남자 단체전 동메달이었습니다.
이후, 한국은 1997년 맨체스터(Manchester) 대회에서도 동메달을 따내며 남자 단체전 2회 연속 입상에 성공했습니다. 한국은 C 그룹에서 독일에 0 대 3으로 패해 8강 직행에 실패했지만, 16강 유고슬라비아, 8강 일본을 차례로 꺾고 4강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4강에서 또다시 중국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한국은 4강에서 류궈량(Liu Guliang), 왕타오, 공링후이가 활약한 중국에 1 대 3으로 패했고, 3, 4위전 독일과의 재대결에서 3 대 0 완승을 거두며 세계 대회 단체전 2회 연속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나토(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으로 개인전(에인트호번), 단체전(쿠알라룸푸르)이 분리 개최된 2000년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 대회에서 다시 노메달로 대회를 마감했습니다. 한국 C 그룹(그리스, 벨라루스, 이탈리아, 체코, 헝가리) 경기에서 체코에 1 대 3으로 패해 8강 직행에 실패했고, 8강에서 또다시 중국에 0 대 3 완패를 당하며 4강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한국은 1999년 에인트호번(Eindhoven) 대회를 끝으로 세계 대회 7회 연속 출전에 빛나는 유남규(Yoo Namkyu)가 은퇴했고, 그 빈자리를 17살(1982년 8월 5일생) 유승민(Ryu Seungmin)이 채웠지만, 결과는 0 대 3 완패였습니다. 한국은 김택수(Kim Taeksoo), 오상은(Oh Sangeun), 유승민이 차례로 출전해, 마린, 류궈량, 공링후이에 차례로 패했습니다.
한국 조 1위 16강 직행
(출처 : ITTF 홈페이지)
(챌린지 결과)
당시 경기 방식은 지금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먼저, 팀 랭킹 상위 24개 팀을 3개 팀씩 8개 그룹으로 나눠 경기를 해, 각 그룹 1위 팀은 본선 16강에 직행하고, 2위 팀은 24강을 한번 더 거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3위 팀은 하위 디비전인 세컨드 디비전 1위 팀들과 챌린지 경기를 한번 더 거쳐 이긴 팀이 24강에 올랐습니다. 챌린지 결과 퍼스트 디비전 3위 팀 중 총 4개 팀(덴마크, 러시아, 슬로베니아, 캐나다)이 세컨드 디비전 1위 팀에 패해 본선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세컨드 디비전 1위 팀 중 총 4개 팀(크로아티아, 북한, 노르웨이, 잉글랜드)이 24강에 올랐습니다.
(2001 오사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자 단체전 24강 대진표)
스웨덴, 중국, 일본, 이탈리아에 이어 8강 시드를 받은 한국은 E 그룹에서 폴란드, 홍콩과 경기를 해 2전 전승 조 1위로 16강 본선에 직행했습니다. 한국은 홍콩을 3 대 1로 이긴 다음, 폴란드에 3 대 0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한국의 16강 본선 첫 상대는 잉글랜드를 3 대 1로 꺾은 체코슬로바키아였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F 그룹(대만, 체코슬로바키아, 스페인) 조 2위로 본선에 올랐습니다. F 그룹은 세 팀이 모두 1승 1패를 기록했지만, 매치 득실에서 대만이 1위, 체코슬로비키아가 2위, 스페인이 3위에 올랐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그 유명한 페트르 코르벨(Petr Korbel), 리카르드 비보르니(Ricard Vyborny)가 팀을 이끄는 결고 만만치 않은 팀으로, 24강에서 잉글랜드를 3 대 1로 꺾고 16강에 올랐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마레크 클라세크(Marek Klasek)가 1매치, 페테르 코르벨이 2, 4매치를 따내며 팀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본선은 2부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40미리 시대 세계 대회
탁구는 2000년을 기점으로 2가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첫째 셀룰로이드(Celluloid) 볼의 지름이 기존 38미리에서 2미리 더 커진 40미리로 바뀌었고, 둘째 점수제가 기존 21포인트 5전 3선승제에서 11포인트 7전 4선승제로 바뀌었습니다. 40미리 볼은 2000년 시드니(Sydney) 올림픽이 끝나고, 그 해 10월 양저우(Yangzhou) 남자 탁구 월드컵부터 곧바로 적용되었고, 점수제는 그보다 1년이 더 늦은 2001년 9월부터 전격 시행되었습니다. 2001년 오사카(Osaka)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볼은 새로 바뀐 40미리 볼을 사용했지만, 점수제는 기존 방식 그대로 21포인트 5전 3선승제가 적용되었습니다. 2001년 오사카 대회는 개인전(남녀 개인단식, 남녀 개인복식, 혼합복식), 단체전에 한 번에 치러진 마지막 대회였을 뿐만 아니라, 21포인트 5전 3선승제로 치러진 마지막 세계 대회였습니다. 그리고, 40미리 셀룰로이드 볼이 사용된 사상 첫 세계 대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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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40mm로 지름이 바뀌고,
11점제가 도입된지도 20년이 되었네요~^^
그러네요..시간 엄청 빠릅니다..^^
이렇게 탁구 변천사에 대해서도 알려주시고 감사드립니다 맘편히 탁구치던때가 그립네요
가끔씩 찾아보면..아주 재미납니다..
이때부터 탁구공이 40mm로 바뀌고 세트 점수도 11점제로 바뀌었군요!
김택수감독님 현역시절이야기이니 참으로 오래 전 일이군요!
좋은 기사 잘 보고 갑니다.
점수는 안바꼈습니다..^^
21점제의 마지막 세계선수권대회로 지금의 11점제에 비해 스피디한 전개보다는 지구전 양상의 게임의 형태로 펼쳐져 01년 오사카대회는 최근에도 계속 영상을 찾아보게 되는군요. 40mm 볼로 전환을 맞이했고 남자단체4강 5단식 김택수 vs 류궈정 시합은 김택수의 눈물로 기억되는 아쉬움과 단체전 우승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된 명승부로 기억되네요 가장우승에 근접했다는 제목대로 많은 아쉬움으로 기억되는군요
보통, 오사카 대회는 김택수, 류궈정의 경기가 주로 회자되지만, 솔직히..프랑스와의 경기도 대단한 접전이었습니다..^^
김택수 선수가 쉐익크핸드 전형이면 세계 제패도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아님 중펜이었다면. 일펜은 백핸드가 너무 안 되니까요.
글쎄요..그때는 글루잉 시대라..펜홀더도 괜찮았다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