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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서
[ 세계사의 기적, 덩케르크 철수작전 ]
< 파국 >
<덩케르크 철수작전>이란 2차 세계대전 초기, 절망적인 전황에서 연합군을 구원한 사상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을 말합니다. 이 철수작전은 독일의 프랑스 침공 여파로 서부전선이 완전 붕괴되어 전면패배의 위기에 봉착해 있던 연합국에게 항전의지를 되살리고 사기를 크게 올렸으며, 향후 대반격의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세계 전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탈출작전(약 33만명)이었죠. 이와 비견되는 규모의 작전으로 한국전쟁 당시의 흥남 철수 작전이 있습니다. 흥남철수 작전의 경우 병사 10만, 민간인 9만명 규모로 약간 작지만 대신 덩케르크 철수 작전과 달리 장비와 물자들도 적에게 넘기지 않고 대부분 성공적으로 철수시켰습니다.
* 당시 위급했던 상황, 연합군은 덩케르크로 쫓겨 가고 있었고 만신창이가 된
프랑스군은 파리 이남으로 쫓기면서 방어선을 구축해 보려고 했으나...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전면적 침공으로 서부전선이 마침내 포화에 휩싸이게 됩니다. 베네룩스 3국은 물론, 영프 연합군도 각지에서 참패와 후퇴만을 거듭했으며, 독일군이 아르덴 산림지대를 돌파하고 뫼즈 강을 넘으며 연합국이 예측치 못한 대규모 우회포위기동으로 주력부대가 모조리 포위섬멸 될 위기에 빠졌습니다.
연합국은 아라스에서 간신히 반격을 개시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독일군에 완전히 포위되고 맙니다. 독일군 구데리안의 기갑부대가 퇴로가 없는 연합군을 짓밟기 위해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이 거대한 포위망에는,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계속되는 연전연패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영국·프랑스·벨기에의 군인 수십만 명이 갇혀 있었습니다. 프랑스 군 지휘부는 포위망 내부와 외부에서의 동시반격으로 이들을 구원한다는 계획을 실행하려 했으나 사실상 불가능한 계획이었습니다.
[ 철수 결정 ]
그 시점에서 연합군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였습니다. 영국 대륙 파견군 사령관 고트 장군은 벌써 며칠째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이미 처칠 수상으로부터 대륙파견군 전 병력을 프랑스로부터 철수시켜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진 상태였지만, 또 한편 현재의 직속 상관격인 프랑스의 베이강 원수로부터는 롬멜의 전차대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상태였죠.
그는 영국의 역대 어느 지휘관보다도 곤혹스런 선택을 내려야하는 입장에 처해 있는 자신의 운명을 원망했습니다. “내가 처음 청년장교로 군생활을 시작하던 그때, 오늘 이처럼 처참한 패배 속에 빠진 우리 영국군을 이끌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마침내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우리는 영국으로 돌아간다.”
철수 항구로 선정된 덩케르크에서 배를 타고 반나절 남짓이면 영불 해협을 건너 영국의 남단 <도버> 항구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모든 전선에서 만신창이로 찢어진 영국군은 자력으로 전선을 탈출하여 덩케르크에 집결해야 하지만, 당장 그 부대들에게 철수명령을 전달하는 것도 큰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독일군이 영국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덩케르크를 행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 독일 기갑부대의 아버지 하인츠 구데리안
* 히틀러와 함께
독일군 최선봉인 구데리안의 전차부대가 덩케르크로부터 불과 20km 앞둔 <아>운하에 도착한 5월 24일에는 철수명령을 받은 영국군 부대들이 덩케르크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독일전차병들도 지금 자신들의 손에 영국대륙 파견군 잔존 병력 전체의 목에 걸린 밧줄의 한 끄트머리가 쥐어져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 그들은 이제 힘껏 그 밧줄을 잡아 당기기만 하면...
25일 아침, <아> 운하에 임시 가교가 설치되고 첫 전차가 굉음을 울리며 그것을 통과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한통의 전문이 날아 들었습니다. “귀관의 부대는 일단 현 위치에 정지하고 추후명령을 기다릴 것”
* 영화에서
구데리안은 기가 막혔습니다. 무기조차 집어던진 적의 철수병력이 집결해 있는 덩케르크에 전차를 몰고 달려가 완전히 일방적인 집단학살을 감행 할 수 있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포기하라니...!
절대로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명령을 내릴 턱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고, 더구나 히틀러 총통이 직접 내란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그 전날 오후에 룬트슈테트 원수의 A집단군 사령부를 예고없이 방문한 히틀러가 난데없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 영화에서
2차대전의 전 기간을 통하여 독일군이 저지른 가장 큰 작전상의 실패 중 하나이며 이 뜻밖의 행운으로 목숨을 건진 수십만명의 연합군 장병들조차 끝내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많은 역사가와 전술가들이 그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 고심해야 했던 것과는 달리 히틀러가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전쟁이 터지고 난 지난 보름간 너무나도 수월하게 얻어온 손쉬운 승리가 히틀러로 하여금 새삼스런 조심성을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전차부대가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전선 깊숙이 진격해 들어가자 히틀러는 일말의 불안을 느꼈던 것입니다. 보급로가 길게 연장되고 취약한 옆구리가 노출됨으로써 금쪽처럼 아끼는 전차대가 적의 포위망에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는 새삼스러운 조심성이 일어났던 겁니다.
* 영화에서
더도 말고 딱 반나절만 더 전차부대를 돌진시켰더라면 덩케르크 백사장은 영국군의 집단묘지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었지만 하여간 구데리안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발이 묶여 버렸습니다. 덩케르크 시내의 지붕들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쌍안경으로 해안을 살펴 본 구데리안은 분노로 치를 떨었습니다. 철수하는 영국군이 개미떼처럼 새카맣게 항구의 백사장을 뒤덮은 채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직접 총통에게 전화를 걸어 전차의 캐터필러로 영국군을 깔아 뭉개는 것쯤은 아주 식은 죽 먹기라는 것을 재차 설득했지만 히틀러는 결정을 번복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걱정 말아, 자네들의 전차는 파리를 함락시키는 더 큰 할 일이 남아있어. 그까짓 영국군 패잔병들 쯤이야 우리 공군이 토끼사냥하듯 쓸어 버릴 수 있을거야”
각 전선에 분산되어 있던 영국군이 덩케르크를 향해 퇴각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상당수의 프랑스군까지 뒤따라왔고, 철수작전을 알게 된 네델란드,벨기에군 병사들까지 꾸역꾸역 덩케르크로 몰려 들었습니다.
[ 철수작전- 다이나모 작전 ]
영국 남부 켄트주의 해안에서부터 템즈강에 이르기까지 영국은 며칠 전부터 온통 북새통이었습니다. 영국 전역의 배란 배는 모두 해군성의 징발명령이 내려졌고, 이 배들이 모두 프랑스와 마주보는 도버 해안으로 몰려 들고 있었습니다.
<다이나모 작전>이라고 명명된 이 철수작전에 가장 적합한 배는 구축함이었습니다. 속도가 빠른 이 배라면 하루에 두 번 이상 덩케르크까지 왕복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많은 병력을 실을 수 있지만, 당시 영국해군이 사용할 수 있는 구축함 41척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고, 이들을 모두 불러 모으는 데만 석달 이상은 족히 걸릴 터였습니다.
* 영화에서
그래서 내려진 궁여지책이 민간 선박들을 모조리 동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템즈강의 유람선으로부터 구닥다리 증기선, 개인 소유의 호화 요트에 이르기까지 온갖 배가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배의 소유주인 민간인들의 불평 따위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영화에서
1940년 5월 26일.
템즈강의 거룻배, 연안 화물선, 도버해협을 왕복하던 페리선 등 각양각색의 배들로 구성된 선단이 덩케르크를 향해 출항했습니다. 그러자 해군당국에 의해 참가를 거절당하거나 그런 절차조차 생략해버린, 애국심에 불타는 시민들이 모는 온갖 배들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13~14세의 어린 소년들로 구성된 해양 소년단의 연습용 돗단배, 경기용 요트들은 선도하는 구축함의 스피커가 아무리 되돌아가라는 권고방송을 내보내도 도무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괜찮아요. 우리도 군인 아저씨들을 한 다섯명쯤은 태울 수 있다구요!”
* 영화에서 영국 스핏파이어 조종사, 그는 영화 내내 출연합니다
해협을 건너는 일은 덩케르크 해안 집결을 끝낸 병사들의 탈출행로만큼이나 힘든 상황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등대의 불을 모두 꺼버린데다가 선박에도 엄격한 등화관제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항법 장치가 빈약한 민간 선박들은 오직 선도 구축함의 유도에 따라 칠흙같은 밤바다를 헤쳐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바다 곳곳에는 영국 해군이 본토 방위를 위해 부설해 둔 기뢰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 땅이 점점 가까워 올수록 위험은 점점 더 증대되어 갔습니다. 독일군이 이미 칼레 해안에다 대포를 배치해 놓고 영국쪽에서 오는 모든 배들을 향해 열렬히 환영할 준비를 마쳐 놓았던 겁니다.
거기다 독일공군의 슈트카 폭격기들도 이 제발로 걸어오는 먹이들을 곱게 봐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배들은 속도마저 느려서 독일 전투기들의 폭격연습 표적으로 더없이 안성맞춤이었고, 워낙 밀집 대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폭격이 시작된다 해도 지그재그 대피행동조차 전혀 불가능했습니다.
선단이 프랑스 해역으로 진입하자 거기에 탄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폭격을 받은 해안의 유류저장 탱크에 불이 붙어 덩케르크의 하늘이 온통 검은 연기로 가득 뒤덮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연기가 연막구실을 함으로써 독일 전투기의 시야를 가려주고 있다는 것에서 그나마 어느 정도 위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해안을 향해 접근해 가던 선원들은 믿을 수 없을만큼 장엄한 광경에 숙연해졌습니다.
파괴된 부두를 가득 메우고 서있는 영국 병사들은 하나같이 초췌하고 피로에 찌든 모습이었지만 거기에서 무질서한 패주의 흔적 따위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방파제와 부두를 완전히 뒤덮고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맞추어 도열한 대열의 선두는 이미 바닷물이 목까지 차오른 상태였지만, 병사들은 한결같이 대영제국 군인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음이 역력했습니다.
그런 장병들의 머리위로 독일 공군기들이 제마음대로 설쳐대고 있었습니다. 바늘 꽂을 틈도없이 빼곡히 부두를 메운 병사들은 독일기가 기총소사를 퍼부으며 달겨들어도 그저 그 자리에 납작히 엎드려 기총소사의 길다란 궤적이 자신을 피해 가기만을 기도할 뿐, 아무런 대피방법이 없었습니다.
철수선박들이 서둘러 병사들을 싣기 시작하자 독일 전투기들의 공격은 그 배들로 옮겨졌습니다. 덩케르크 해안은 원래 조수간만의 차가 7m나 되는데다 파도조차 거칠고 높습니다. 작은 모터 보트들이 거친 파도에 휩싸여 방파제 위로 내동댕이쳐지면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런 경황에도 어느 군 지휘관 못지않은 침착함과 용기를 보여준 민간인 선장들도 간혹 있었습니다. 빙산에 충돌하여 침몰해 버린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의 승무원으로, 몇 안되는 생존자 중의 하나였던 라이톨러 퇴역 해군중령은 17세의 아들과 함께 자신의 요트 선다우너 호를 몰고 이 작전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 영화에서, 스핏파이어 3대와 구출 요트...스핏파이어는 당시 영국 최고의 전투기였습니다
그는 침착하게 자신의 배를 방파제에 접안시키고 병사들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맨아랫쪽의 선복을 가득 메운 병사들만 해도 70명이 넘었고, 여기에다 갑판에 50명을 더 태우자 요트의 흘수선(물에 잠기는 선)은 거의 갑판까지 육박해 왔습니다. 130명을 태운 10인승 요트 선다우너는 독일 전투기들이 어지럽게 날고 있는 덩케르크를 뒤로 하고 도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심이 약해져 아무리 작은 배조차도 해안 가까이 접안시킬 수 없게 되자 많은 병사들이 장비를 벗어 던지고 배를 향해 헤엄쳐 오기도 했습니다. 한명의 병사라도 더 태우기 위해 대형 선박들은 싣고 있던 구명보트를 모두 바다위에 내려놓았고, 보트에 올라탄 병사들은 연신 철모로 물을 퍼내며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방법으로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돌아오는데 성공한 보트들도 꽤 많았습니다.
승선작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독일 공군의 슈트카와 메사슈미트 전투기는 그들이 ‘덩케르크의 물오리 사냥’이라고 이름붙인 그 신바람 나는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병사들은 백사장에서 승선차례를 기다리며 전투기가 한번 급강하 할 때마다 배 한척이 박살나는 것을 꼼짝없이 지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5월 27일 아침부터 시작된 철수작전은 6월 2일까지 1주일간 계속되었고, 이 기간 동안 영불해협을 오가면서 철수병력을 실어 나른 선박은 거의 900척에 달했습니다. 이 배들이 구출해 낸 영국군은 20만을 넘었고, 10만명 이상의 프랑스군도 이들을 따라왔습니다.
불합리한 명령에 분통을 터뜨리며 발이 묶여있던 구데리안의 전차들이 덩케르크로 쇄도해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나 지난 6월 4일 오후였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그때까지도 해안을 가득 메운채 철수선을 기다리고 있는 프랑스군 병사들이었고, 이들은 모두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 영화에서
영국은 이 참패로 인해 자존심의 상처와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의 전술척 실책에다 군과 민간이 혼연일체가 된 헌신적인 철수노력에 힘입어 프랑스에 파견되었던 대륙 파견군 병력 대부분을 고스란히 본국으로 철수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장병들은 곧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대독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소중한 전력으로 거듭 태어나게 됩니다.
오늘날까지도 <덩케르크의 철수>라는 말은 일대 혼란속의 비참한 패주를 뜻하는 동시에 절대절명의 위기속에서도 기적적으로 빠져나온 행운을 상징하는 말로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첫댓글 시네마 천국 모임에서 이 영화를 못보아 몹시 아쉬웠는데, 덕분에 잘 감상하였습니다.
윗 글에서 기적적인 덩케르크 철수에는 오로지 900여척의 민간 배들의 활약과 히틀러의 오판때문으로
비쳐지고 있는데 조금 덧붙입니다. 실제 영국 공군의 필사적인 혈투에 의한 큰 도움이 있었는데 총 177대
의 전투기가 희생되면서 독일 공군의 이른바 오리 사냥을 결사적으로 막았지요. 영화에서도 공중전 장
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전의 절반 가량 기간을 구름이 짙게 깔려 독일기의
활동을 막았다는 점도 들 수 있겠고...마지막으로 프랑스군 2개 사단이 후미를 맡아 필사적으로 방어
전을 펼쳤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꼭 한번 감상을...잔잔하면서도 묵직한 감동이...
몇일전 저도 덩케르크 영화를 보았습니다.
옛 사관생도 시절에 역사전쟁에 관한 강의를 받았던 감동적인 추억이 생생이 생각나더이다~!!!
영화가 좋다는 평이 계속 퍼지고 있어 아직도 계속 상영중인 곳이 많네요.
특히 이 영화는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꼭 봐야 후회하지않을거라는 입소문이...
8월 23일부터 용산 CGV 아이맥스관에서 다시 상영한다고하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