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르지마 미치유키: 당포해전 사망
1576년에는 가신 무라카미 요시츠구를 파견해 제1차 키즈카와 전투에서 오다 가문의 수군을 무찔렀으며, 1582년에 재차 코우노 가문에서 이반, 하시바 히데요시의 권유로 오다 가문에 항복했다. 모리 가문에서 우라 무네카쓰, 무라카미 모토요시 등을 시켜 공격하자, 이에 대항하지 못하고 본거지에서 쫓겨나 히데요시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히데요시가 무라카미씨 중 가장 먼저 항복하였다고 성(城)명인 구루시마(来島)라고 부르며 중용하므로, 이때 구루시마 씨로 고쳤다. 이후 모리 가문과 히데요시의 화친 후 영지로 복귀했다.
1584년쯤 쿠루시마 수군으로 복귀했다가 1585년에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때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휘하에서 선진에 서서 종군했으며, 이요 국의 노마, 가자하야군 내에서 1만 4천 석의 지행을 수여받았다. 1587년에는 규슈 정벌 때 모리 가문 휘하에 속해 부젠 국의 우루쓰 성을 공격하고 1590년에는 오다와라 정벌 때 구키, 가토 가문 등과 함께 수군을 편성해 오다와라 성을 해상에서 공격했으며, 1592년의 임진왜란, 1597년의 정유재란에 참전했지만 1597년에 명량 해전에서 선봉장으로 참전했다가 명량의 물살 변화와 이순신의 지휘로 미치후사가 탄 대장선은 난전에서 격파당해서 전사했다.
형인 미치유키[4]는 자식을 남기지 못해서 그 후손은 아예 단절되어 버렸고, 미치후사의 집안은 차남인 나가치카(長親)가 이었다. 나가치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일시 가담했지만 아내의 백부가 동군 진영에 합류한 후쿠시마 마사노리였던 덕에 목이 날아가는 대신 기존 이요국의 영지를 몰수당하고 규슈 동쪽 산간 지방 분고국(豊後国)의 모리 번(森藩)으로 전봉당해 그곳의 번주가 되었다.
도쿠이 미치유키는 동생인 미치후사보다 먼저 죽었는데 당포 해전에서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먼저 거북선으로 근접해서 미치유키가 탄 왜장선을 격파하는 도중에 미치유키는 중위장 권준(權俊)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사도 첨사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적선에 올라타 적장의 목을 베었다. 왜장 도쿠이 미치유키가 죽자,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육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